나무서점 방문기
반칠환
숲은 신간으로 그득하다. 봄비가 가장 먼저 초록 시집을 읽는다. 전생 과거시험 심사관이었는지 잎눈마다 물방울 방점 찍으며 읽는다. 여름바람은 전직 은행원이었는지 돈 세듯 읽고 다른 서점으로 사라진다. 태양은 제 빛에 눈이 나빠졌는지 돋보기로 읽는다. 오래 읽으면 책이 타들어간다. 자벌레 청년은 고시 공부하던 습관인지 중요한 구절을 우물우물 삼킨다. 거위벌레는 신갈나무 백과를 대놓고 절취하니 곧 가위벌레라 불릴 것이다. 가을서리는 열렬한 독서광이다. 읽는 책마다 노랗게 붉게 형광 빛으로 칠한다. 형편이 어려운지 읽기만 하고 사지는 않는다. 가을바람은 그 해의 신간을 몽땅 사지만 한 장도 읽지 않고 폐지상에 넘긴다. 겨울 눈도 진시황의 후예인지 문자를 지워 백지로 만든다. 그러나 폭설의 분서焚書 속에도 언제나 맵푸른 활자가 눈뜨고 있는 법이다.
—《서정시학》2013년 가을호
-------------
반칠환 / 1964년 충북 청주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199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웃음의 힘』『전쟁광 보호구역』, 시선집 『누나야』, 장편동화 『하늘궁전의 비밀』『지킴이는 뭘 지키지』, 시 해설집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등.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