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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모자를 사랑하는 사람들(외 2편)/ 최금진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4.08.16|조회수581 목록 댓글 0

모자를 사랑하는 사람들(외 2편)

 

   최금진

 

 

 

모자 값이 오르면 증시가 오르고 덩달아 농산물 값도 오르고

밭에다 채소를 가꾸듯 모자를 자식들 머리에 심어줍니다

왜 처음부터 인생을 잘 벗어서 선반 위에 올려놓지 않았느냐고요

그건 모자의 흑백논리입니다

울타리를 넘어 모자 한 송이를 몰래 꺾었다고 칩시다

그것이 살인죄는 아니지만 어머니는

모자를 벗어 예를 표하는 일에 익숙합니다

모자의 무게 때문에 척추가 휘어진 농부들도 있습니다

우린 장자에게 모자를 물려줍니다

과일을 파는 사람들이 향긋한 꿈을 언제나 뒤집어쓰고 다니듯

모든 모자는 반드시 불행해야만 한다, 건국 오천 년을 맞는

우리의 모자보호법입니다

시집올 때 쓰고 온 모자 안에 어머니가 몰래 텃밭을 늘려가는 것처럼

무덤 같은 하늘을 쓰고 비를 피하는 모자들은 쓸쓸합니다

초립을 쓰고 일생 떠돌며 모자에 대한 시를 쓴 사람도 있습니다

산사의 범종 밑엔 새들이 모자를 벗고 앉아 떨고 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시장에서 비싼 모자 앞을 오래 서성일 때

부디 모자를 벗고 서로 인사를 나누며 웃어주세요

우린 모자 앞에서 기하학적인 어떤 사랑의 형상을 배웁니다

 

 

 

개미귀신

 

 

 

사랑도 없이 귀신이 되어가는 세월

시를 쓰기엔 인생이 너무 짧은 건 아닐까

변명을 횃불처럼 들고 찾아가는 산 82-5번지 모래 사원

염주를 주렁주렁 목에 걸고 있는 개미귀신이란 놈은

시체애호증이 있어서

집 가까운 곳에 마른 피육을 쌓아놓는다

침침한 눈으로 머리카락을 골라내듯 언어를 골라내기엔

너무 늦은 저녁, 신경쇠약으로 잔뜩 찡그린 얼굴로

어제 먹다 남은 말을 마저 먹는다, 아득바득

시를 쓰기엔 인생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수도복을 입은 개미귀신들이 미사라도 보는 걸까

모래 속에 몸을 납작 엎드린 채 울고 있다

부스스, 내 손에서 사라지는 고운 모래의 언어를 만져본다

시를 쓰기엔 너무 컴컴한 모래 구덩이에서

죽은 비유들을 해골처럼 주렁주렁 꿰어 목에 걸고

그중 입맛에 맞을 것 같은 시 한 줄을 맛보다가

퉤, 하고 뱉어내는, 당최 입맛이 없는 개미귀신 한 마리

폐업신고라도 해야 할까

 

 

 

고독한 혀, 즐거운 이빨

 

 

 

혀는 제 몸을 맛보며 묘비명을 읽는다

나사를 박을 수는 있지만 핥아서 먹을 수 없는 혀

살려둘 수는 있지만 죽일 수 없는 혀

볼펜으로 명언을 쓸 수 없는 곳에 혀가 있다

그 살점으론 신조차도 배불리 애인의 말을 굽지 못할 것이다

혀는 생각을 미리 알고, 먼저 말을 삼킨다

얼굴은 혀가 파내려간 고통스러운 문신

혓바닥의 무늬는 얼굴에 옮겨 붙어 화문석이 된다

혀는 언제나 먼저 몸에 도착하고, 먼저 사랑을 지운다

이빨로 맹세해,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팽이버섯처럼 생긴 어금니로 오래 씹어주면 좋겠어

피 냄새, 달 냄새, 정액 냄새, 무덤 냄새

가장 어리석은 암컷으로 널 기억할게

사랑한다면 이빨을 전부 뽑아줄 수도 있어

얼굴을 다 뜯어 먹고, 골을 빠개어 씹어도 울지 않겠어

혀가 이빨들을 훑어주면 이빨들은 웃는다

혀는 이빨의 안쪽에서 사랑을 낭송한다

 

 

 

                         —시집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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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금진 / 1970년 충북 제천 출생. 2001년 창비신인시인상에 당선. 시집『새들의 역사』 『황금을 찾아서』『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산문집 『나무 위에 새긴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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