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의 봄날 (외 1편)
박서영
이사 다닌 집들이 눈사람처럼 녹아 사라져버렸다
환한 벚꽃이 깨진 창문을 잠시 엿보다 가버리고
이후의 긴 그늘에 대해선 모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 국도를 지나쳐, 지나쳐온 봄날이었다
길고양이 한 마리처럼 도시 외곽에서 달을 분양받았지만
나의 열망은 달과 태양을 제본하는 것
한겨울에 만든 눈사람을 한여름에도 들여다보는 것
태양의 밀짚모자를 쓴 채
달의 털모자를 쓴 채
태양과 달은 서로의 표정을 사각사각 베어 먹고 있다
그러니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는
뜨겁고 차가운 두 얼굴은 그냥 놔두시길,
괜한 관심으로 눈썹과 코와 입술을
그려 넣지 마시길,
지금은 눈사람처럼 녹아내리고 있는 집에 들어가
그해의 환했던 벚꽃과
어느 여름밤의 뜨거운 포옹과
술렁이는 꽃그늘 따위를 모두 들고 나오고 싶은 날이다
어쩌면 이미 누군가 청소하면서 다 치워버렸을
쓸모없이 소중하고 궁핍한 기억들 말이다
—《시인동네》2014년 여름호
삵
밤이면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지
오랫동안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며
부드러운 털 사이로 피가 나지 않을 만큼
누군가 슬픔은 뭔가를 찌르고
쪼아대는 일 따위를 모른다고 말하네
울고 싶을 때
갑자기 가로등이 꺼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사람을 끌어안으며
서로 번진다는 건 어떤 걸까
바람이 불면 목덜미에 키스하고 싶은
우리는 아무도 서로에게 망명한 적 없어
눈빛이 눈빛을 올라타고
왼손이 오른손을 올라탄 순간이 있더라도
털 사이로 피가 나지 않을 만큼
서로를 조금 할퀴다가 헤어졌을 뿐
내가 누군가를 물어뜯지 않는 건
밤이 뭔가를 기록하고 불을 지르고 가버렸기 때문,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면
삵의 울음소리가 복원된 거라고 생각해도 좋아
밤이면 다정한 사람들이 모이지
만질 수 없는데, 먼 울음 들리곤 하지
보이지 않는데, 먼 발소리 들리곤 하지
우리는 타인을 할퀴던 두 손으로
자신의 이마에 길고 흰 사랑을 기록한다
잃어버린 짠맛을 보충하기 위하여
마지막 남은 한놈을 대하듯 서로의 눈물을 핥아먹는다
—《창작과 비평》 2014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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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영 / 1968년 경남 고성 출생.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좋은 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