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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존재의 집 (외 1편)/ 김행숙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4.10.31|조회수917 목록 댓글 0

존재의 집 (외 1편)

 

   김행숙

 

 

 

그런 입 모양은 아직은 침묵하지 않은 침묵을

침묵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입구에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기다리고, 끊어질 것 같은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람을 뜻한다

그 사람이 얼음의 집에 들어와서 바닥을 쓸면 빗자루에 묻는 물기 같고

원래 그것은 물의 집이었으나 살얼음이 이끼처럼 끼기 시작하고

물결이 사라지듯이 말수가 줄어든 사람이

아직은 침묵하지 않은 침묵을

침묵으로 들어가는 좁은 입구를

그런 입 모양은

표시했다

식사 시간에 그런 입 모양이 나타났을 때 숟가락을 떨어뜨렸고, 그 사람은 숟가락을 떨어뜨린 줄도 몰랐는데

그 숟가락은 무엇이든 조금씩 조금씩 덜어내기에 좋은 모양으로 패어 있고

구부러져 있다

숟가락의 크기를 키우면 삽이 되고 삽은 흙을 파기에 좋다

물, 불, 공기, 흙 중에서 흙에 가까워지는 시간에

이를테면 가을이 흙빛이고 노을이 흙빛이고 얼굴이 흙빛일 때

그런 입 모양은 아직은 입을 떠나지 않은 입을

아직은 입으로 말하지 않은 말을

침묵의 귀퉁이를

아직까지도 울지 않은 어느 집 아기의 울음을

 

 

 

새의 위치

 

 

 

날아오르는 새는 얼마나 무거운지, 어떤 무게가 중력을 거스르는지,

우리는 가볍게 사랑하자. 기분이 좋아서 나는 너한테 오늘도 지고, 내일도 져야지.

어쩜 눈이 내리고 있네. 겨울 코트엔 온통 깃털이 묻고,

공중에서 죽어가는 새는 중력을 거절하지 않네.

우리는 죽은 새처럼 말이 없네.

나는 너를 공기처럼 껴안아야지. 헐거워져서 팔이 빠지고, 헐거워져서 다리가 빠져야지.

나는 나를 줄줄 흘리고 다녀야지. 나는 조심 같은 건 할 수 없고, 나는 노력 같은 건 할 수 없네. 오늘은 내내 어제 오전 같고, 어제 오후 같고,

어쩜 눈이 내리고 있네. 오늘은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그러나 오늘은 발자국이 생기기에 얼마나 좋은 날인지,

사람들은 전부 발자국을 만드느라 정신이 없네.

춥다, 춥다, 그러면서 땅만 보며 걸어다니네.

눈 내리는 소리는 안 들리는데 눈을 밟으면 소리가 났다.

우리는 눈 내리는 소리처럼 말하자. 나는 너한테 안 들리는 소리처럼 말했다가

죽은 새처럼 말했다가

죽은 새를 두 손에 보듬고 걸어가야지.

 

 

 

                       —시집『에코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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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숙 / 1970년 서울 출생. 고려대 국어교육과 및 같은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99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사춘기』『이별의 능력』『타인의 의미』. 현재 강남대학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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