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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배가 산으로 간다(외 2편)/ 민구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4.11.24|조회수958 목록 댓글 0

배가 산으로 간다(외 2편)

 

   민 구

 

 

 

저녁 강가에 배 두 척이 나란히 놓여 있다

저것은 망자가 벗어놓은 신이다

저 신을 신고 걸어가서

수심을 내비치지 않는 강의 수면을 두드린다

거기엔 사공도 없이 홀로 산으로 간 배들을 모아서

깨끗이 닦아 내어주는 구두닦이가 계신가

 

산중턱에 앉아서 저 아래 강가를 내려다보다가도

정상에서 나를 굽어보는 어느 구두닦이가 있어

벗어둔 신발을 도로 주워 신는다

누가 언제 저 신을 신을까, 지켜본다

 

나는 강의 한가운데

불붙은 장작을 미끼로 던지고

수면 위의 기다란 굴참나무 그림자를 들어올렸다 놓는다

산허리가 휘어지며 밀고 당기기를 몇 번일까

회백색 물고기들이 나무줄기에 매달려 밖으로 나온다

 

그때 누가 나무 밑에서 걸어나와

빈 배에 올라타는지 그의 신발 뒤축에 끌려

산아래부터 중턱까지 흙부스러기가 쏟아진다

 

또 한번 배가 산으로 가나?

너의 낡은 구두가 빛난다

살아서는 신지 못할

 

물속에 매달아 놓은 조등

 

 

 

—거울

 

 

 

거울아 녹아라

내가 흐르게

흘러나오게

 

근데 우리 둘

같이 있으면

얼마나 어색할까

 

문득 바라본 그곳에

누가 서 있을까

 

나는 기다려

천천히 녹는 거울을

흐르는 평범한 세계를

 

거울이 녹으면

내 방은 잠기겠지

치워지지 않은 주검들도

떠내려오겠지

 

물이 싫은 나의 고양이가

그림의 난간으로 건너간다

죽은 사상가가

입에 문 시가를 놓치고

텀블러 안으로 달아난다

 

그녀가 젖었네

거울에서 나온 내가

사진 속 먼로의 가슴을

주무르고 있다

 

이제 누가 돌아갈까

우리 둘

 

 

 

—빛의 사과

 

 

 

그림 속의 사과 하나가

내 앞으로 굴러왔다

잠시 뒤 바구니를 든 여인이 나타나

사과를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방바닥의 사과를 주워

송진 냄새가 진동하는 들판을 향해

천천히 내밀었다 그러자 사과는

손바닥에서 뛰는 심장처럼

은은하게 빛이 번져 어두운 방구석을 환하게 비추었다

나는 사과를 반으로 잘라서 삼켰다

나머지 반은 책상에 엎어두고

그녀가 그림에서 나오기를

멀리 점으로 묘사한 굴뚝의 연기와

소리없이 날아가는 철새들이

검은 우박처럼 방안으로 쏟아지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구부정하게 서 있다가

드넓은 포도농장을 가로질러

물감이 덜 마른 갈대밭으로 사라졌다

빗방울이 들이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쪽 사과를 집어들었다

추수를 마친 사내들이 술잔을 부딪치며

빈 오크통을 굴리는 소리가

짤막한 천둥과 함께 들려왔다

 

 

 

                   —시집『배가 산으로 간다』(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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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구 / 1983년 인천 출생.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배가 산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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