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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극치의 수피즘 (외 1편)/ 황유원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4.12.05|조회수860 목록 댓글 0

극치의 수피즘 (외 1편)

 

   황유원

 

 

 

수프의 신

 

오늘 저녁은 쌀쌀해

별안간 따뜻한 수프를 원하고

오늘 수프는 간이 안 맞아

수프는 약간의 후추를 원하고

저는 약간의 회전을 원하옵나니

딱 한 번만, 밀어주시면 안 될까요?

빙글빙글 돌고 있는 저는

이제 붙잡아 줄 사람을 원하고

수프를 들고 가다 창밖으로 휙

집어던져 버리기 위해 난데없는 재, 재,

재채기를 원하고 계속 돌아가기 위해

약간의 폭소를 원합니다

덩달아 소금과 폭설과 설탕의 힘을 조금 원하고

지금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약간의 발작을 원해요

이해해 주시리라 믿어요

제가 끓인 수프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로 숩!

숩! 우리에게 더 많은 수프를! 외치는

당신들의 따뜻함이라면

 

‘오늘 밤이 간이 안 맞는 게 아니라 내 혀가 맛이 갔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나는 또 얼마나 많은 수프를 갖다 바쳐야 하나?‘

그런 행복하고도 걸쭉한 고민을 하며 수프를 나르는 동안에도

우리는 열렬히 신을 외치며

입천장이 델 때까지 그 뜨거운 이름을 몇 번이고 끓이고 삼키고 토하고

입천장 껍데기가 벗겨질 때까지 심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지상 최고의 온도로 그대를 불렀습니다 돌았습니다 돌고돌고돌다아주그냥 해까닥,

해 버렸습니다 고맙습니다 미쳤습니다 안녕하세요?

다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서로 얼굴 마주한 채 안전하고 따뜻한 수프 한 그릇씩을 먹으면

우리의 무장도 해제될 거예요! 우리에겐 딱히 무기라 할 만한 것도 없습니다만

알라 알라 라 일라하 일랄라 숩, 숩, 여기도 숩, 저기도 숩,

숩은 식었지만 그대는 식어 빠진 숩 속에도 계십니다

그대는 다 먹고 남은 그릇의 바닥에 몸 깔고 누워

기지개를 펴고 하품을 하고 있습니다

기지개를 펴고 하품을 하는 것만으로도 음악이 된다니!

그릇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당신은 누추에 빠진 식탁을 바야흐로 무슨 놀이공원처럼 만들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희는 먹고 자고 박고 싸면서

거기서 뛰어놀 아이들을 열심히 생산하고 있습니다 낳아 재끼고 있습니다

알라, 알라, 오 저기 저 긴 줄을 좀 보십시오!

만원입니다

그 속에서 당신께서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펴고 계십니다

 

그릇이 작으면 물이 넘친다

 

뜨거운 잠이 쏟아집니다

깊은 잠 속, 뜨거운 수프 같은 잠 속에서

살과 뼈가 분리될 때까지

끓여지고 걸쭉해집니다 맛있어집니다

누구라도 괜찮습니다

저를 드세요

저를 드시고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펴는 음악이 되세요

평화! 평화! 평화! 앗살라무 알라이쿰!

오직 신만이 영원하시다

그리고 내 옷 아래에는 신밖에 없으니*

내가 바로 신이며

우리 모두가 신이다

천사들의 관악기 소리

빰빠라밤빰 빰빠라밤

천사들의 총격 소리

투두두두두 투두두두두두두

 

그깟 돌집 한 채를 보겠다고 그 먼 길을 가야 한다니*

누구는 나사를 조이듯 돌멩이 주위를 도는 동안

나는 기도로 새로운 중심을 창조하리라

그 중심을 기준으로 나는 한번

휙 돌아본다 돌아가기 시작한다

왼쪽 바퀴 두 개로만 달리는 차 위에 올라

오른쪽 바퀴 하나를 빼 테이블로 삼고서

차를 마시고 물담배를 피우고 웃고 떠들고 누워서 잠시 좀 졸다가

다시 바퀴를 끼우고 안으로 들어가면

다시 네 바퀴가 되어 굴러가는 차처럼

중심을 이동시키고 좌우로 핸들을 틀며

부드럽게 돌아가기 시작하리라

점점 넓어지는 중심의 행동반경이 모든 것을 뒤덮어

더 이상 그걸 중심이라 부를 수도 없을 때까지

나사를 풀어 버리듯 휘리리리리릭 한번

돌려 볼 순 없을까?

 

우리에게 무기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목청과 혀

내가 좀 씨불이면 넌 날 죽이고 싶어질 거야

죽고 못 사는 연인이 될 수도 있겠지

지옥에 물을 끼얹고

천국에 불을 지른** 죄로

마침내 완전한 무방비 상태에 이르고 말지라도

우리에게 무기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최대한 많은 문형(文型)의 운용 능력과

지독한 어휘력

살면서 더러운 꼴을 당하면 당할수록

백지 위로 더 많은 예문들을 출격시킬 수 있는 자유

 

우리에게 압둘라와 압둘라힘이란 이름을 지어 줬던 무슬림 노인에게

내가 대체 왜 이렇게 자꾸 뭘 주냐, 너무 많다, 부담스럽다고 말하자

그는 같잖다는 듯이 우릴 한번 쳐다본 후 그것들을 싸그리 가리키며 말했지

This is nothing!

그러더니 곧장 오른손 검지를 뻗어 하늘 가리키며 말하길,

He gave everything!

 

이봐, 그릇이 작으니까 자꾸 물이 넘치는 거잖아?

그릇이 작으니 물이 넘친다

저 작은 그릇에 담기느니

차라리 증발하는 게 낫겠어

두두두 두두두두

비스밀라

비스밀라

 

말하자면 이 세상 전부가, 우리에겐 무기고인 셈입니다만

 

 

————

* 아부 사이드 이븐 아빌하이르.

** 라비아 알 아다위야.

 

 

                         —《시작》2014년 겨울호

 

 

양 모양의 수면양말

 

 

 

도저히 눈이 안 감기는 밤, 창밖 골목에선

버려진 양말 몇 켤레 얼어가고 있었다

한때 누군가의 발을 따뜻하게 해준 기억이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얼어붙고 있었다

 

아무리 감아 봐도 눈이 자꾸 안으로 떠지는 밤,

내가 헤아린 수천수만의 양떼들이 부풀고 있었다

각막처럼 얇은 목장을 찢고서

두둥실, 더러운 눈 온몸에 묻힌 채

온데만데 떠오르고 있었다

쓸어놓은 눈들은 무슨 포대자루처럼

발로 차도 끄떡없는 무게로 굳어 있었고

 

누가 주워가기엔 양말이 너무 싸구려지만

그런 양말을 주워 갈 사람도 있을 거란 상상이

골목을 비참하게 한다

너를 녹여 주고 빨아 주고 말려 줄 사람이 다시

너를 두 발에 신고 다닐 거란 망상의 온도가

골목을 쪼그려 앉아 우는

한 사람의 남자로 보이게 하고

 

같이 쪼그려 앉아 그의 등을 쓰다듬어 주는데

거꾸로 벗어놓은 양말 안에서 하나둘씩

양들이 기어 나오고 있었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신호음처럼 메헤헤헤헤

하얗게 울면서 흘리는 양들의 뜨거운 침이

딱딱한 포대자루에 뻥 뻥 구멍을 뚫고 있었다

 

당신의 오래된 입냄새 속에서 익어가고만 싶었는데

낡은 베개처럼 삭아만 가는 밤,

꿈나라는 풀려난 양들이 밤새 이동한 거리만큼 광범위해져 있었고

양들은 다들 각자의 위치에 정지해 있었는데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건 모두 한 장의 사진에 가까웠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들 졸고 있었다

내가 함부로 꾸어온 꿈들이 주인 몰래

주인도 모르는 곳에서 선 채로 졸고 있었다

 

 

 

                     —《시사사》2014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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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원 / 1982년 경남 울산 출생. 2013년 가을호《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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