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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이응의 세계 (외 1편)/ 김은주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5.02.04|조회수817 목록 댓글 0

이응의 세계 (외 1편)

 

  김은주

 

 

 

숲이라 불리던 나무들은 한동안 자라기를 멈췄다

그림자를 잘게 부수는 데에만 밤과 초록을 쓸 때

먹는 것에 색의 이름을 처음 붙인 사람은 누구지?

나는 밤과 오렌지가 좋은 사람

일부러 맞춤법을 틀리게 쓰며 친해질 때

아이들은 자주 도시락을 나누어 먹었다

 

나무 밑에 둘러앉은 무리가

그늘이 짜놓은 레이스를 뭉개며 시끄러울 때

공원 벤치는 요의(尿意)를 겨우 참는다

챙이 넓은 모자로 얼굴을 덮고 잠든 척하는 남자와

빈약한 가슴을 감추기 위해 엎드린 여자

다른 물을 먹고 자란 꽃들을 하나의 병에 꽂아두고

같은 냄새를 견디게 하는 일 사이

투명한 벽을 종교로 삼은 늙은이들이 있다

 

마른 몸에 액체를 바르고

쓴맛과 단맛이 뒤엉켜 둥글어질 때까지

실온을 견디는 열매와

 

다 다른 맛이 날 때까지

손가락을 빠는 내가 있다

 

 

 

유원지의 방식으로

 

 

 

아마도 태어나면서부터 오늘은 내가 가장 조숙한 기분

오늘의 구름은 본격적이고

아무도 다가올 표정을 예방할 순 없어

 

페달을 밟아요

꽥 꽥 꽥 꽥

호수를 가르는 규칙적인 오리떼의 리듬으로

 

외발 자전거 위에서

빨가면 사과 사과는 맛있어

더욱 빨개진 엉덩이의 전천후성처럼

 

(하지만 원숭이에게 흉내 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페달을 밟아요

오르간의 작은 발건반을 찍듯

하지만 발끝으론 사과의 상상을 멈추지 말 것

 

(호흡이 어긋나는 순간 참기 힘들 정도로 표정이 마려워지거든)

 

서커스단의 고별공연에서

끝날 줄 모르고 돌아가는 빈 접시의 반동

되 뚱 되 뚱

기울일 곳을 찾는 엉덩이들

 

(방수 신발 속에 페달을 감추면 그 어떤 표정도 스며들진 못할 거야)

 

오늘의 구름은 본격적이고

우리는 모두 다른 무늬로 흩어지길 원했지만

 

 

 

                      —시집『희치희치』(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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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주 / 1980년 서울 출생. 한양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희치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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