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김화순
식탁 위 바나나 한 송이
노랗고 푸른 열대가 출렁인다
야자수 잎을 흔드는 햇살은
바나나를 치워도 사라지지 않는다
바나나 온몸이 누렇게 물러진다
어두워져도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억이 삶을 붙들고 있다
바나나를 손으로 잘라본다
마음을 들고 있던 손이 물큰하다
나무를 떠나올 때 놓고 온 생각이 익고 익어서
바나나는 이제 그늘투성이다
늙을수록 향기를 모으는 바나나
손금으로 스며든 미세한 냄새를 씻어버려도
마음을 들고 있는 손은 사라지지 않는다
어둠에 향기와 맛을 가두는 바나나처럼
욕창에서 피어난 고름꽃처럼
죽음을 환하게 피우는 것들
안에서 나를 두드리며
밖에서 나를 지우며 사라지지 않는 것들
—《문학.선》2015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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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순 / 1957년 서울 출생. 2004년 《시와 정신》으로 등단.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 시집 『사랑은 바닥을 쳤다』, 저서 『김종삼 시 연구』. 고려대 출강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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