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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눈이 멀다/ 정진혁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5.06.24|조회수1,057 목록 댓글 0

눈이 멀다

 

  정진혁

 

 

 

너에게 가 닿지 못한 이야기가

멀었다

침묵에 빠져 죽었다

 

침묵은 눈언저리를 한 바퀴 휘돌아

정처 없이 갔다

 

눈은 멀어서 밤은 멀고 내가 멀어서 그림자가 멀다

눈은 나를 송두리째 담아 멀리 갔다

 

눈이 멀어서 사거리가 그대로이고

만두집은 여전히 사람들이 줄을 서고

모퉁이 앵두나무에는 앵두가 익어갈 것이다

 

세상은 공중이고 내 손은 사무적이다

몇 발자국을 세다가 길들은 끊어지고

손끝에 닿는 대로 어떤 기억이 순서도 없이 왔다

 

눈은 고요하고 끝이 넓고 아무도 없었다

나는 고요를 떠다가 손을 씻었다

아카시아 향기가 종일 흔들렸다

저녁이 눈에 슬그머니 몸을 담근다

 

마음 하나가 눈 주위에 오래 앉아 있다가 사라졌다

누가 먼 눈을 들여다 보랴

 

눈이 멀리 가서

여기서는 볼 수 없던 것을 보고 있다

눈에 먼 오후가 가득하다

 

어딘지도 모르고 한참을 서 있었다

아무리 멀어도 더 멀지는 않았다

 

 

 

                        —《현대시학》2015년 5월호

--------------

정진혁 / 1960년 청주 출생. 2008년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간잽이』『자주 먼 것이 내게 올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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