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철지붕을 사야겠다 (외 2편)
유종인
다시 양철지붕을 올려야겠다
내게 저 들판 끝에 단독의, 아니 독단으로라도
새로 지붕을 얹을 폐가가 있다면
빗방울이
얼어오는 몸을 부풀려
눈송이로 맘을 띄우는 겨울이 오기 전에
모든 소리에 성감대를 가진
양철지붕을 올려야겠다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너도밤나무 나무란 나무들
갈잎과 솔가리에 얹히는 된서리와 별빛 달빛마저
여줄가리 소리들로 쟁쟁하게 되비추는
거울을 눌러 입힌 양철지붕을 그믐밤 고양이가 거닐 때
그 발자국에서
꽃들이 눌러 퍼지는 소리에 소스라치는 고양이여
겨울에도 한뎃잠을 자다 깬 꽃들이
양철지붕에 꿈속의 비명을 던져 올려도 좋겠네
한 무덤 방에 누워
부부가 동짓달 궁금한 입 군것질거리를 구시렁거릴 때
그 소리마저 눈보라에 실려
양철지붕에 내려앉으면 그 말 서슬에 깬 아들이
그날로 때 아닌 제사상을 보는 저녁도 있어
운감하시라
운감하시라
서로 마음 출출한 날이 가장 좋은 제삿날이니
키 높은 옆집 처마의 눈석임물이
양철북을 두드리듯
양철지붕을 두드려 먼가래 한 꽃들의 귀를 부르네
나무 인상 사전
달에 고향을 둔 계수나무는 키가 훤칠하다
산벚나무는 그 꽃들로 때늦은 눈발이다
산그늘 옮겨 다니는 환한 시름들
마음이 옥죌 때 그 눈발로 발등 적시면 낫는다
소나무는 슬쩍 고개를 숙이거나
가만히 허리를 뒤틀거나 짐짓 목을 늘여 빼거나
어스름 허공에 어깨를 기대거나
그 모두 한 생각 다른 생을 고르는 고요의 몸짓이다
호두나무는
고소한 생각들을 고르고 있다
허무를 웃길 만한 익살과 입담을 골라
생각의 가지마다 한 주먹씩 재미를 쥐고 있다
뇌의 주름이 많은가 슬픔이 자주 골탕을 먹을 만하다
오리나무는 엉뚱한 방향으로 웃는다
고민이 오면 딴청을 부리며 오리걸음 뒷짐을 진다
말문이 막힌 무덤들을 불러 웃음부터 틔워준다
가을에도 봄 생각을 키워 오리주둥이로 잎을 흔든다
버드나무는 물가에 주점을 차렸다
작은 누각의 푸른 주렴을 걷고 들어가면
주인은 없고 벌레들이 생을 좀 바꿔다오 꾸물꾸물 술상을 봐온다
어느 수양버들 가지를 잡아당기면
술과 여자가 나와서 귀신마저 객소리하는 소슬한 술판이 벌어진다
가만 저 나무는 초록 속에 상거지처럼 서 있다
모두들 죽었다고 하나 가만히 보면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헐벗음을 입고 있다
대개 그런 몸엔 버섯이 봉기하고 벌레집이 자자하다
햇 접시
고추기름 묻은 붉은 접시를
혼자서 닦는다
접시는 홀로 닦아야 제맛,
무슨 다 아는 비밀을
저 혼자의 비밀로 혼자 닦아서
새로 마음의 선반 위에
얹어놓는 호젓함
그러나 너무 깨끗해진 접시
그 말개진 비밀이 께름칙해
거기 물기가 다 마르기 전
햇빛을
한 접시 받아두는 것이다
거기 구멍이 파이듯
그릇으로 우묵해지려는 허기를
다시 말갛게 펼쳐놓는 것이다
가끔은 그대 그늘이 와서
전생을 보여주듯 손을 얹어
그리운 손금이 파다해지는 접시,
그걸 가만히 가슴의 찬장으로
들이기도 하는 것이다
—시집『양철지붕을 사야겠다』(201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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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인 / 1968년 인천 출생. 1996년 《문예중앙》에 시, 2003년〈동아일보〉신춘문예에 시조, 2011년〈조선일보〉신춘문예에 미술평론 당선. 시집 『아껴 먹는 슬픔』『교우록』『수수밭 전별기』『사랑이라는 재촉들』『양철지붕을 사야겠다』, 시조집『얼굴을 더듬다』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