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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첩첩산중/ 황유원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5.12.24|조회수1,760 목록 댓글 0

첩첩산중

 

  황유원

 

 

 

 

나 거기 내 눈과 귀를 두고 왔네

내가 두고 온 눈이 바다를 보고

내가 두고 온 귀가 파도를 듣고 있다니

그것들은 아직 내게 매달려 있는데

나는 거의 그날 해변가에 서 있던 펜션이 되어가네

지금은 새벽이고

그토록 가시적이고 전면적인 해무라니

수평선 너머 어디 불이라도 난 줄 알았어

바다가 자신을 공중으로 띄워 올려 바람에 날려 보낸 것들이

말 그대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지

그날

양양의 하조대

바위 위에 붙어 있던

수령 200년 된 소나무 한 그루

파도 소린 저녁부터 들려왔고

새벽에도 들려왔고

아침에도 들려왔네

자꾸 뭘 두고 온 것만 같았는데

두고 오길 잘했지

핸드폰 충전기는 안 들고 가길 잘했네

핸드폰이 꺼지자 며칠째 바다와 너와 나…… 그리고 파도 소리만이 남았지

나는 이곳에 다른 여자와 온 적이 있고

너는 이곳에 다른 남자와 온 적이 있지만

이제는 우리 둘이 이곳에 온 적도 있게 된다

1층이었던 우리는

잠시 2층이 되었다가

붕괴되는 건물처럼

다시 1층으로 나란해졌고

네 엉덩이에 치던 물결도 모두 멎엇지만

기억은 엉덩이 같군

엉덩이라면 누구의 엉덩이라도 푹신할 것이다

첩첩산중 속

하나의 기억

몇 개의 연합된 기억처럼

그 안으로 쑥, 빠져들었다

다시 쑥, 빠져나올 것이다

손으로 갈기면 철썩철썩 소리를 내고

붉은 손자국을 가질 것이다

강원도의 첩첩산중 끝에서 만난 절대수평

첩첩산중은 참 좋은 말이야

중첩될수록 더욱 깊어지고

고요해지고 있었으므로

첩첩산중으로 기어 들어가는 버스 안에서

네가 내 어깨에 고개를 얹을 때마다

거기 놓이는 건 삶의 무게였고

삶이 널 떠난 후에도 한참 동안

네가 두고 온 눈과 귀가 삶의 무게로 흔들리고

네 눈과 귀가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는 삶의 무게로 바다는 흔들리겠지

첩첩산중에서 기어 나올 때 차창 밖 어두운 산맥이 하늘로 높이

치켜든 엉덩이가 하릴없이 내뱉던 하품

구멍 주변에 난 털을 하염없이 쓰다듬어주는 기분으로

하나는 또 다른 하나로 이어지고

어차피 다 들고 올 수도 없는 거

두고 오길 잘했지

들고 온 것도 마저 여기 두고

다시 더 많은 걸 두러 가야만 하고

더 많은 곳에 더 많은 걸 두고 오다 보면

결국 모든 걸 두고 가야 할 때가 오는 거겠지

그러니 너무 아끼지 마

나를

빈 나뭇가지 위에서 놀다 가는

바람 정도로 생각해

 

 

                         —《문학과 사회》2015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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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유원 / 1982년 울산 출생. 2013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세상의 모든 최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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