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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은유로서의 질병/ 이현승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5.12.24|조회수817 목록 댓글 0

은유로서의 질병

 

   이현승

 

 

 

다시 태어난다면 하고 생각해 본 적 있지만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후회가 없는 사람은 없고

우리는 모두 실패한 적이 있지만,

그래서 실패의 기원으로 가서

기원을 제거해야 하는 것은

터미네이터-T1000의 일이겠지만

 

다시 태어난다면 유감스럽게도

액체 금속이나 최첨단 나노 갑주도 없이

기껏 두부처럼 무른 살가죽만 걸치고 태어나야 한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빨거나 쥐는 것,

먹고 싸고 울고 웃는 게 전부일 뿐이며

 

더욱이 우리에겐 기억이 없을 것이므로

시간을 거슬러,

마땅히 되돌아온 이유를 모르는 우주 전사의 처지란

기실 우주 미아와 같을 것이다.

 

나는 전생을 믿지 않고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 만큼

철두철미한 현실주의자이지만

코끝 벌름거리게 하는 간지러운 봄바람에 날려

막 암술에 도착한 꽃가루 같은 생을 생각하니

삶이란 늘 의미에 목말랐던 것이다.

 

미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란 속류 쾌락주의자이며

진정한 미래주의자는 비관주의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꽃가루만큼이라도 의미가 필요하다면

처세의 철학보다는 파산이나 암 선고가 더 빠를 것이다.

 

암술에 도착한 꽃가루란 하나의 기적이다.

다시 해 볼 것도 없이.

 

 

 

                       —《무크 파란》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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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승 /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2002년 《문예중앙》을 통해 등단. 시집 『아이스크림과 늑대』『친애하는 사물들』『생활이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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