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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아스피린 / 문정영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6.05.03|조회수747 목록 댓글 0

아스피린

 

   문정영

 

 

 

둘러보니 썩은 서어나무 속이다

내가 잎이었는지, 잎의 언저리에 피는 헛꿈이었는지

불우한 생각이 각설탕 태우는 냄새 같은

 

기억 같은 건 믿지 말라, 그 말을 새가 물고 있는 동안 네가 내 안에 멈추어 있었는지, 비어 있었는지

있다가 사라져버린 것이 나에게 묻는

 

눈발이 내리는 날

서어나무 발자국은 길 가운데 멈추고, 서쪽 뿌리에서 어떤 처연한 결기가 걸어나온다

 

수첩에 적어 둔 계절은 느리게도 오지 않는다

눈을 감아도 네가 내 안에서 눈에 덮여 있는 저녁은 갈까마귀 목덜미 빛이다

 

아침에 먹는 아스피린으로 내 피는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흘러 너에게 가다보면 나는 조막만 해진 밀랍인형이 될 것이다

결국, 이란 허공의 말이 천천히 지혈되고 있었다

 

 

 

                      —《시산맥》2016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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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영 / 1959년 전남 장흥 출생. 199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낯선 금요일』『잉크』『그만큼』. 현재 계간 《시산맥》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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