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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굴절을 읽다 (외 2편)/ 이서화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6.12.03|조회수509 목록 댓글 0

굴절을 읽다 (외 2편)

 

   이서화

 

 

 

베란다 유리창에 어둠이 내리면

거기, 유리의 거실에

말 없는 가족이 평면으로 다정해 보인다.

어쩌다 눈 마주친 여자가 나를 본다.

어둑해지면 나타나서

저녁이 만든 평수에 살다 가는 굴절의 가족이 있다.

어쩌면 그들은 기슭의 부족이 아닐까.

문을 열면 캄캄한 공중으로 흩어지는 불안한 세상의

불안한 후예들은 아닐지.

 

어쩌다 저들은 얇은 강화유리에 세 들어 살고 있을까.

창문 밖에서만 웃고 떠들고 있는

닫혀 있는 가족.

 

화분들이 자라고 드라마가 방영되고 쾅하고 문이 닫히고 커튼 뒤에 숨어서

미닫이문을 열면,

한쪽 문으로 옮겨가는 굴절의 저녁

너무도 익숙한 풍경들이

몇 평 창문의 불빛에 매달려 산다.

 

강화 유리 두 장 너머

불안한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하다.

모든 공중엔 흔들리는 겹겹이 있고 모든 불빛엔

꺼지고야 마는 밝기가 있다.

밝은 시간엔 사라졌다 어둑한 저녁에 둘러앉는

딸깍, 불 끄는 가족들.

 

 

 

둥근 방

 

 

 

양파는 늦가을부터 초여름까지

여러 겹 나이를 한꺼번에 먹는다

알뿌리들은 뿌리를 묶고

줄기로 바람을 불어넣는다

 

겨울 동안 온갖 바람을 다 들여놓고

부풀어진다고 생각했었다

양파를 까고 칼로 반을 자른 양파 속에는

눈물을 쏙 빼게 하는 질책이 들어있다

눈물을 직감하는 일들처럼

어떤 양파 앞에서는 저렇게 여러 겹으로

웅크린 채 울어본 적이 있다

그런데도 내가 둥글어지지 못한 이유는

매듭지을 뿌리도 바람을 불어넣을

긴 싹이 없었기 때문이다

겉부터 속까지

여기저기 울긋불긋 마음 쓸 겨를이 없다

그냥 사납게 매워지자고

웅크리고 울었던 기억밖에 없다

 

울지 않아야 둥글어진다

 

 

 

스위치백

 

 

 

대부분의 간이역들은

덜컹거리는 잠 속에 있다

 

심포리역을 지나며 안내방송을 듣는다.

‘잠시 후 스위치백 구간입니다 4분정도 소요될 예정입니다’

통리 협곡을 지나 흥전역과 나한정역 사이

누구나 지나온 길과 조우할 수 있는 구간이 있다

 

잠에서 깬 몇몇의 승객들 어리둥절한 풍경

차창 밖엔 성의 없이 다가온 가을과

잠결에 놓친 과거가 구불구불 나타나고 길이 되감기고 있다

무슨 재주로 지나 온 길의 뒤편으로 갈 수 있나

지나왔던 시간만큼

뒤로 가는 시간도 구불거린다

 

시간을 끌고 열차는 다시 순방향으로 달린다.

두고 온 어느 즈음에 탄력의 힘이 있다는 것

그 놓친 힘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희망 같은 것이 있는

알파벳 Z자 모양으로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스위치백 구간

기차가 지나가면 시간은 다시 닫히고 만다.

 

덜컹거리는 잠에 빠져 있던 차창 밖에 있는 전생을

잠 깨서 신기한 듯 바라본다

접어 두었던 날들을 펴면

저 언덕 쉬지 않고 올라가려고만 했었다

 

꽃은 아래쪽에서 위로 피고

저 위에서부터 후진으로 내려오는 단풍

오르내림의 발원이 곧 지금이겠지

 

지상에서 숨을 고른 후

다시 꽃의 계절로 올라갈 계절이 붉다

 

 

                        —시집『굴절을 읽다』(201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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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화 / 강원 영월 출생. 상지영서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8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시집『굴절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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