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신동
금 란
골목은 언제나 비가와도 바짝 말라 있다
사람의 발자국이 어쩌다 골목에 박히지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여지없이 사라지고 만다
완제품을 실어 나르는 오토바이 바퀴자국이 무수히 남겨진
가파른 골목에 미싱 소리로 요란하다
서울에서 이태리까지 열 번을 왕복으로 오갈 수 있는
실타래비가 내린다
남산타워가 지척이고
광화문의 촛불이 손끝에서 뜨겁게 달아올라도
토요일 하늘을 등진 여자의 발바닥에 달린 미싱 페달 위로
바늘비가 내린다
슈퍼에서 사온 과자봉지가 들썩거리고
낙산 공원의 가로등 불빛이 자정을 재촉하는
슬리퍼비가 내린다
염색 오천 원, 퍼머 이만오천 원이 무색한 텅 빈 미장원
형형색색의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는 원장의 앞치마에
머리카락비가 내린다
공장 문짝에 너덜너덜 붙어 있는
방 두 칸에 보증금 이천만원, 월 오십오만 원 전단지
구찌, 와끼, 마도메, 시야게 간판 속으로 파고드는
뽕짝비가 내린다
미싱 바늘구멍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페달을 밟을 수 있는
창신동 골목길에
늙은 여자의 주름비가 내린다
—《현대시학》201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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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란 / 1965년 전북 순창 출생. 2013년《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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