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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소행성 (외 2편) / 신철규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7.08.04|조회수960 목록 댓글 0

소행성 (외 2편)

 

   신철규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의자만 뒤로 계속 물리면 하루종일 석양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너와 나는 이 별의 반대편에 집을 짓고 산다.

내가 밤이면 너는 낮이어서

내가 캄캄하면 너는 환해서

우리의 눈동자는 조금씩 희미해지거나 짙어졌다.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적도까지 몇 발자국이면 걸어갈 수 있다.

금방 입었던 털외투를 다시 벗어 손에 걸고 적도를 지날 때

우리의 살갗은 급격히 뜨거워지고  또 금세 얼어붙는다.

우리는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나는 네게 하루에 하나씩

재미있고 우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네가 못 보고 지나친 유성에 대해

행성의 반대편에만 잠시 들렀다가 떠난 외계인들에 대해.

너는 거짓말하지 마, 라며 손사래를 친다.

 

바다가 있으면 좋겠다,

너와 나 사이에

너에게 한없이 헤엄쳐갈 수 있는 바다가

간간이 파도가 높아서 포기해버리고 싶은 바다가.

 

우리는 금세 등을 맞대고 있다가도 조금씩 가까워지려는 입술이 된다.

 

지구의 둘레만큼 긴 칼로 사람을 찌른다고 해서 죄책감이 사라질까.

죄책감은 칼의 길이에 비례하는 것일까.

 

우리가 사는 별은 너무 작아서

네 꿈속의 유일한 등장인물은 나.

우리는 마주보며 서로의 지나간 죄에 밑줄을 긋는다.

 

 

  *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검은 방

 

 

 

슬픔의 과적 때문에 우리는 가라앉았다

슬픔이 한쪽으로 치우쳐 이 세계는 비틀거렸다

 

신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그것이 일반명사인지 고유명사인지 알 수 없어 포기했다

기도를 하던 두 손엔 검은 물이 가득 고였다

 

가만히 있으면 죽는다

최대한 가만히 있으려고 할수록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딱딱해지고 있었다

 

해변에 맨발로 서 있던 유가족

맨살로 닿을 수 없는 거리가 그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죽을 때까지 악몽을 꾸어야 하는 사람들의 뒷모습

학살은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꾸는 악몽 같은 것

 

손가락과 발가락까지 피가 돌지 않고

눈이 심장과 바로 연결된 것처럼 쿵쾅거렸다

 

모든 것이 가만히 있는 곳이 지옥이다

꽃도 나무도 시들지 않고 살아 있는 곳

별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멈춰서 못처럼 박혀 있는 곳

죽은 마음, 죽은 손가락, 죽은 눈동자

 

위로받아야 할 사람과 위로할 사람이 한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기도밖에 없는 것인가

 

우리는 떠올라야 한다

우리는 기어올라야 한다

누구도 우리를 끌어올리지 않는다

 

가을이 멀었는데 온통 국화다

가을이 지난 지가 언젠데 국화 향이 이 세계를 덮고 있다

컴컴한 방에 검은 비닐봉지를 쓰고 앉아 있는 것처럼 숨이 막힌다

꿈속에서도 공기가 희박했다

 

해변은 제단이 되었다

바다 가운데 강철로 된 검은 허파가 떠 있었다

 

 

 

슬픔의 자전

 

 

 

지구 속은 눈물로 가득 차 있다

 

타워팰리스 근처 빈민촌에 사는 아이들의 인터뷰

반에서 유일하게 생일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아이는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타워팰리스 근처를 둘러싸고 있는 낮은 무허가 건물들

초대받지 못한 자들의 식탁

 

그녀는 사과를 매만지며 오래된 추방을 떠올린다

그녀는 조심조심 사과를 깎는다

자전의 기울기만큼 사과를 기울인다 칼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속살을 파고드는 칼날

 

아이는 텅빈 접시에 먹고 싶은 음식의 이름을 손가락에 물을 묻혀 하나씩 적는다

 

사과를 한 바퀴 돌릴 때마다

끊어질 듯 말 듯 떨리는 사과 껍질

그녀의 눈동자는 우물처럼 검고 맑고 깊다

 

혀끝에 눈물이 매달려 있다

그녀 속에서 얼마나 오래 굴렀기에 저렇게

둥글게 툭툭,

사과 속살은 누렇게 변해가고

 

식탁의 모서리에 앉아 우리는 서로의 입 속에

서과 조각을 넣어준다

한입 베어 물자 입 안에 짠맛이 돈다

 

처음 자전을 시작한  행성처럼 우리는 먹먹했다

 

 

 

                         —시집『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2017. 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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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철규 / 1980년 경남 거창 출생.  2011년〈조선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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