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집(외 3편)
이종형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었던 것
햇살이 쟁쟁한 팔월 한낮
조천읍 선흘리 산 26번지 목시물굴에 들었다가
한 사나흘 족히 앓았습니다
들짐승조차 제 몸을 뒤집어야 할 만큼
좁디좁은 입구
키를 낮추고 몸을 비틀며
낮은 포복으로 엉금엉금 기어간 탓에 생긴
통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해 겨울
좁은 굴속의 한기寒氣보다 더 차가운 공포에
시퍼렇게 질리다 끝내 윤기 잃고 시들어 간
이 빠진 사기그릇 몇 점
녹슨 솥뚜껑과
시절 모르는 아이의 발에서 벗겨진 하얀 고무신
그 앞에서라면
당신도 아마
오랫동안
숨이 막혔을 것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처럼
사나흘 족히 앓아누웠을 것입니다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세 살에 아비 잃은 소년은
아비보다 더 나이 든 사내가 되었습니다
유품이라고 남겨진
새끼손가락 같은 상아 도장 하나
그 세월 긴 인연을 벗겨내기에
한없이 가엽고 가벼우나
마침내 사내는
세월을 거슬러 돌아와
소년에게 미안하다 합니다
먼 길을 돌아 걸어온 순례의 끝
죽음의 그늘을 벗기는
꽃이 피고 봄이 오고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간절한 노래는 다시 시작되나
나는 아직도 당신과 작별하지 못했습니다
생명
아들이 아버지가 된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아주 잠깐,
천지간이 기우뚱거렸다
폭설에 묻힌 산허리 어디쯤에
꼼지락거리는
복수초 꽃잎 한 점
꽁꽁 언 땅을 가만히 녹이고 있었으리
햇살 톡톡 터트리며 오시는 봄을 따라온
새 생명의 이름
너의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2017.1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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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형 / 1956년 제주 출생. 2004년 《제주작가》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