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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바람의 집(외 3편) / 이종형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8.04.15|조회수1,116 목록 댓글 0

바람의 집(외 3편)

 

  이종형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었던 것



통점


 

   

햇살이 쟁쟁한 팔월 한낮
조천읍 선흘리 산 26번지 목시물굴에 들었다가
한 사나흘 족히 앓았습니다

들짐승조차 제 몸을 뒤집어야 할 만큼
좁디좁은 입구
키를 낮추고 몸을 비틀며
낮은 포복으로 엉금엉금 기어간 탓에 생긴
통점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해 겨울
좁은 굴속의 한기寒氣보다 더 차가운 공포에
시퍼렇게 질리다 끝내 윤기 잃고 시들어 간
이 빠진 사기그릇 몇 점
녹슨 솥뚜껑과
시절 모르는 아이의 발에서 벗겨진 하얀 고무신

그 앞에서라면
당신도 아마
오랫동안
숨이 막혔을 것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처럼
사나흘 족히 앓아누웠을 것입니다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세 살에 아비 잃은 소년은
아비보다 더 나이 든 사내가 되었습니다

유품이라고 남겨진
새끼손가락 같은 상아 도장 하나
그 세월 긴 인연을 벗겨내기에
한없이 가엽고 가벼우나
마침내 사내는
세월을 거슬러 돌아와
소년에게 미안하다 합니다

먼 길을 돌아 걸어온 순례의 끝
죽음의 그늘을 벗기는
꽃이 피고 봄이 오고
꽃비 내리는 이 봄날에
간절한 노래는 다시 시작되나
나는 아직도 당신과 작별하지 못했습니다 


 

 

생명

 

 

 

아들이 아버지가 된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아주 잠깐,
천지간이 기우뚱거렸다

폭설에 묻힌 산허리 어디쯤에
꼼지락거리는
복수초 꽃잎 한 점
꽁꽁 언 땅을 가만히 녹이고 있었으리

햇살 톡톡 터트리며 오시는 봄을 따라온
새 생명의 이름
너의 이름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2017.1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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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형 / 1956년 제주 출생. 2004제주작가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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