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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섬광, 쇄빙선 (외 1편)/ 석연경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8.06.21|조회수1,101 목록 댓글 0

  섬광, 쇄빙선 (1)

 

     석연경

 

 

 

   붉은 낙엽 몇 남기고 사라진 공() 여인이 한겨울 성층권을 지날 때 하늘과 땅의 신음소리를 들었네 단지 혼자 들었을 뿐이네 유성우 스치는 동안 지상 오래된 정원에는 나비가 나네 어딘가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네 아무고 모르게 숲속으로 별 하나 깃들고

 

   오래전 헤어진 사람을 생각하네 인어가 사는 바다에 얼음이 얼었으나 꿈에서만 비명을 질렀네 죽게 그냥 두라고 살아 있는 것은 폭력이라고 여자가 차가운 유리창에 비친 얼굴을 보며 우네 암전 표정 없는 사람이 창 안을 보네 멀리 쇄빙선이 눈보다 희네

 

   밖은 캄캄하고 안은 너무 밝네 전구 수십 개가 하얗게 사물을 지우고 빛 중심에 창백한 여자가 있네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네 불이 꺼지지 않네 몸이 자꾸 투명하게 바래가네 절대 잊지 않겠다 하니 섬광이 창문을 부수고 튕겨 나가네

 

   정적이 세계를 감싸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네 대숲에는 푸른 대나무가 꼿꼿이 서 있고 지난여름 해바라기 검은 씨앗이 언 땅 아래 까맣게 엎드려 있네 지상의 섬광이 하늘로 솟네 처음 보는 붉은 별이 여자의 머리 위에 뜨네 우주의 실핏줄이 투명하게 비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네 숙명인 듯 쇄빙선이 출항하네

 

 

오라 사과꽃 오로라

 

 


검은 망토 잿빛 사제가

허공에 별을 뿌리며 탄식한다

 

머나먼 땅에는 훤풍이 불고

화르르 화르르 사과꽃 흩날리네

꺼졌다 켜지는 기억의 징검다리도

씨방 안 빽빽한 환상도 흩날리네

 

오로라 비단 불꽃이

곡비 울음으로 피어오르는데

적막한 설산은 언젠가 본향이던 심해를

겹겹이 풀어내는 비애일 뿐

 

바람이 물관 입구를 열고

숱 많은 슬픔을 길게 땋은 소녀가

광활한 벌판에서 시간을 무두질한다

 

빛의 왈츠를 추려는데

면사포 쓴 오로라가 회오리치며

밤보다 깊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얼음기둥 양떼구름 지붕 집

한 그루 무성한 우울

사과나무는 창밖 수로 따라 꽃잎 뿌리고

물빛은 일렁이며 오고 있는 봄을 자맥질하는데

 

고대 뼈들이 스쳐 지난 바람을 호명하는 동안

텅 빈 미래의 사과나무로 서성이던 설산은

윤슬 눈부신 물길 지나 사과꽃동산이 되고

소녀야 오라 오로라

붉은 사과 주렁주렁 빛나는 언덕으로

 

 

             —시집섬광, 쇄빙선(2018. 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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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연경/ 1968년 경남 밀양 출생. 2013시와 문화신인상에 시 당선. 2015시와 세계신인상에 평론 당선. 시집독수리의 날들섬광, 쇄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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