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중심에 서서
이근화
도서관을 세웠습니다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책을 날마다 주워 와서
번호를 매기고
뜯긴 책장을 붙였습니다
나란히 꽂았습니다
캄캄하고 냄새가 나서
나는 이곳이 좋아요
조금 더럽고 안락해서
날마다 다른 꿈을 꿉니다
도서관이에요
책들은 하룻밤이 지나면
숨을 쉬고
이틀 밤이 지나면
입술이 생기고
사흘째 팔다리가 태어납니다
나흘째 사랑을 나누고
먼지가 가라앉습니다
나는 뻘뻘 땀을 흘리며
혼자 길고 긴 산책을 합니다
멀리서 책을 한 권 또 주워 왔습니다
이번에는 코가 없고
감기에 걸린 놈이었습니다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함께 커피를 마시고
토론을 했습니다
불을 다 끈 도서관에서
우리는 우리는 우리는
세상의 중심에 서서
구멍 난 내일을
헌신짝 같은 어제를
조용히 끌어안았습니다
도서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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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들이 원하지 않는 서정적이고, 신들린 것 같은 미국의 저술을 모으는 일이야(리처드 브라우티건, 『임신중절』).
⸻계간 《모:든시》 2018년 여름호, 〈나의 시 나의 시론 | 이근화 ‘자선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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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화 / 1976년 서울 출생. 200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칸트의 동물원』『우리들의 진화』『차가운 잠』『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동시집 『안녕, 외계인』『콧속의 작은 동물원』, 산문집 『쓰면서 이야기하는 사람』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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