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와 로라 (외 3편)
심지아
로라와 로라, 한 사람처럼
두 사람처럼, 다섯 사람처럼, 로라와 로라
의자의 이름처럼
의자에 앉은 쌍둥이처럼
의자에 앉은 이름이 같은 사람처럼
의자에 앉은 이름이 다른 사람처럼
의자에 앉은 긴 이름의 외계인처럼
의자에 앉은 오후 다섯 시의 햇빛처럼
의자가 많은 기차처럼
한 개의 의자가 정지한 밤처럼
한 개의 의자가 사라진 낮처럼
사색하는 코끼리처럼
사색을 중단한 사제처럼
사색에 놓인 시체처럼
로라와 로라,
사랑했던 한 개의 이름처럼
미워했던 한 개의 이름처럼
개처럼 짖는 사람처럼
개처럼 조용해진 사람처럼
이름이 지워진 묘비명처럼
로라와 로라,
가장 나이며 가장 나의 것이 아닌 것처럼
가장 너이며 가장 너의 것이 아닌 것처럼
로라와 로라,
책상 위로 팔을 올리는 감정처럼
책상 위에 턱을 괴고
얼굴이 비대칭으로 자라나는
로라와 로라
이상한 활주로
나는 토성의 고리, 여섯 번의 비명을 지르는
나는 멀리 던진 부메랑, 새들의 이마에 부딪히며 안녕
나는 때로 읽히는 책, 꿈의 허리를 쓰다듬는
나는 귓속에 펼쳐진 지도, 낮은 음표들의 동굴
나는 분홍 뺨, 거짓말들의 사탕 봉투
나는 한밤의 괘종시계, 불면을 배달하는
나는 해 질 녘의 그림자, 긴 목으로 인사하는
나는 토끼, 앞니로 뜀박질하는
나는 빨래집게, 햇살의 부푼 배를 깨무는
나는 불협화음, 아픈 아가를 위한 자장가
나는 계단, 오직 뛰어내리기 위해 오르는
나는 여름, 우산과 장화의 날들
나는 바람개비, 은밀하게 미친
나는 타이밍, 어긋나기 위해 태어난
나는 창문, 노크는 금물
나는 마법사, 검은 모자에 손을 넣는 순간을 사랑하는
등을 맞대고 소녀소녀
테이블 아래에서
아이들은
놀이를 발명한다
생물이 잠을 발명하듯이
얼굴 위로 떠오르거나 지는 것들
우리가 기도라고 읽는 것
긴 바다뱀처럼 구불구불한
등 뒤를 맞대고
쉿, 이라는 말이 좋았다
손가락을 입술 가까이 대고
쉿, 이라고 말하는 것
흘러내리는 것
시작되는 것
지붕이 부드러워지고
떠오르는 집시들
무릎을 꿇고
충실한 초상화처럼
네가 벗어 놓은 우주
우리가 빠트린 것들을 말해 볼래
축복을 내리는 허공처럼
수첩 속에서
너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거야
범람
양을 세는 일은 문득 시작된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양들이 흩어진 풍경이 나타날 때까지
양들이 흩어진 풍경이 고요하게 고집스럽게 구겨질 때까지
양들이 읽을 수 없는 것들이 될 때까지
양들이 읽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감각이 될 때까지
핏속에는 도덕이 없고
나는 조금 슬픈 것 같아
나는 조금 의심하는 것 같아
양에게 넘치는 것은 하얀색
양을 세다가 양을 세다가 나는
색깔이 부족해진다
부족한 것은 내게 잘 어울려
나는 조금 아무렇게나 놓인 것 같아
아무렇게나 양을 세도 언제나 양은 그럴듯해지네
풀을 쓸면 쉽게 손가락이 베이는 것이 좋아
풀을 쓸면 대지는 오래도록 엎드려 있는
어린 포유류 같아, 기도의 자세니 슬픔을 길들이는 자세니 아가야
풀밭에서 얼굴은 건초 자루가 될 때까지
풀밭에서 양들은 입구가 될 때까지
부족한 것이 나의 도덕이 될 때까지
부족한 것이 나의 윤곽이 될 때까지
목이 보호하는 목소리처럼 고요하게
고집스럽게
양을 세다가 양을 잃다가
⸻시집 『로라와 로라』 (2018. 6)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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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아 / 1978년 전북 익산 출생. 2010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로라와 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