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에서 사슴까지 (외 2편)
김중일
어느 날 내 가슴이 불타면 어쩌나.
내 사슴은 어쩌나.
깡마른 사슴. 비 맞는 사슴. 눈물 맺힌 사슴. 다리 부러진 사슴. 멍 투성이 사슴. 땅에 파묻힌 사슴. 아빠 없는 사슴. 엄마 없는 사슴.
폐에 바닷물이 찬 사슴. 바다가 된 사슴. 자식 잃은 사슴.
집으로 돌아오는 늦은 밤, 어김없이 마중 나온 사슴. 폴짝 내 가슴 속으로 뛰어드는 사슴. 잠 못 드는 사슴, 때문에 점점 커지는 가슴. 점점 자라는 사슴이 사는 사람의 가슴.
온몸에 멍이 든 알몸의 네 살배기 아이가 제 손을 과자처럼 선뜻 내민다. 사슴은 잘도 받아먹는다. 꽃잎보다도 작은 나뭇잎 한 장 남김없이, 내 가슴팍에 앉아 사슴은 다 먹어치운다. 그렇다고 이 계절이 오는 걸 막을 수는 없다. 가는 걸 붙잡아 놓을 수도 없다.
이 계절에 일어난 참혹한 사건으로 사슴은 태어났다. 누군가는 죽고, 사슴은 태어났다. 나는 죽은 이의 가슴을 사슴이라고 부른다.
사슴은 태어나자마자 눈 뜨고, 일어섰으며, 매일 나를 어디론가 데려가려 한다. 나는 그 여정을 가슴에서 사슴까지, 라고 한다.
무너진 내 가슴에서 태어난 사슴 한 마리가, 자란다. 내 가슴은 사슴 따라 점점 커진다. 계속 커진다.
어느 날 가슴이 터지고 불타면 내 사슴을 어쩌나.
한순간 구름처럼 하얀 재가 된 내 사슴을 어쩌나.
사슴 한 마리 사슴 두 마리 사슴 세 마리…… 아무리 백까지 백번을 헤아려도 잠이 오지 않는다.
어깨에서 봄까지
내 어깨에 기대어 오 분이나 잤는지 너는, 물빛 선연한 꿈을 꿨다는데 거짓말처럼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내 어깨에 기대어 한숨 자고 난 너는, 몇 년간이나 파도처럼 밀려왔던 차가운 꿈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잠든 새 기대어 있던 한쪽 귀로 꿈이 다 흘러나온 것
틀어놓은 수도꼭지 같은 귀에서 콸콸 다 쏟아진 것 아니겠냐고 했다.
그때 네가 쏟은 꿈이 내 어깨에는 여전히 물 얼룩처럼 묻어 있다.
저녁에 나가 보니 문 앞에 고양이가 쓰러져 있었다.
급작스레 고양이의 장례를 치르고, 곧 꺼질 걸 뻔히 알면서도 문 앞에다 양초 한 자루를 밝혀두었다.
달빛이 촛불 주위를 부나비처럼 맴도는 걸
달빛이 눈발처럼 촛불에 달라붙어 타 죽는 걸 보고 들어왔다.
새벽에 나가 보니 간밤에 네가 일으켜 세워놨는지, 촛불이 있던 자리에 눈사람이 서 있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턱걸이를 하듯,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던 겨울의 맨 끝이었다.
내 어깨에 꽃그늘처럼 기대어 잠들기 전 너는, 여생의 봄을 꿈속으로 미리 다 흘려보냈으니, 앞으로는 곧바로 장미가 피고 여름이 올 거라고 했다.
봄에 죽은 친구가 이제 별 얘기를 다 한다고, 생각하며 어깨 위를 돌아봤다.
예상치 못한 계절이 정말 오고 있었다.
지구를 끌어안다가 가슴이 꿰뚫린 하늘
공중이 우주로 날아가지 않도록
공중의 끝자락에 무수히 꽂아둔 나뭇가지들
공중과 가지 사이 실밥처럼 불거진 꽃들
공중에 나무들이 쏘아올린 공처럼 치솟는 새들
새들은 까마득한 공중에 난 검은 구멍이다.
그 구멍으로 검고 깊은 우주가 들여다보인다.
새는 지구를 끌어안다가 가슴이 꿰뚫린 하늘의 구멍이다.
새의 깃털은 하나하나 깊은 주름이다.
새 한 마리가 여자의 정수리 위를 맴돈다.
한 여자가 공중에 난 구멍을 올려다본다.
한 아이가 공중에 난 구멍을 내려다본다.
새의 그림자 같은 검고 희미한 얼굴빛의 여자들
한 아이가 공중에 난 구멍으로 오래도록 들여다본다.
지구를 덮은
하늘에 수십여 개의 구멍이 나 있다.
⸺시집 『가슴에서 사슴까지』(2018. 7)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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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일 / 1977년 서울 출생. 2002년 〈동아일보〉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 『국경꽃집』『아무튼 씨 미안해요』『내가 살아갈 사람』『가슴에서 사슴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