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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혈거인간 / 나희덕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8.08.27|조회수702 목록 댓글 0

혈거인간

 

   나희덕

 

 

 

이 도시의 지하는 생각보다 깊어요

뿌리들이 나무를 지탱하듯

빌딩들이 버틸 수 있는 건 지하세계 덕분이지요

 

몇 그램의 절망이

일용할 양식이 되는 곳

 

어두운 계단과 구멍들 사이로

기적처럼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는 곳

 

내일을 꿈꿀 필요가 없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곳

 

산소 없이 살 수 없지만

너무 많은 산소에도 견디지 못하는 우리는

썩은 공기로 숨 쉬는 법을 배웠어요

 

인간이라는 비루한 감옥에 갇혀 살기는

지상이나 지하나 마찬가지,

물론 지하세계에도 시장과 학교와 교회가 있어요

 

우리는 투명인간처럼 살지만

그렇다고 빛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이 세계에서는

전구들이 태양을 대신하지요

빛의 찌꺼기들은 모두 여기로 와요

 

아직은 쓸 만한 전구들이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방

 

우리에겐 더 깊고 투명한 집이 필요해요

검은 흙 속으로 끝없이 뻗어가는 흰 뿌리들처럼

 

지상으로 난 환기구에 풀들이 자라기 시작했어요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월간 문학사상2018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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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중앙일보신춘문예 시 등단. 시집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야생사과』『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시선집 그녀에게.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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