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거인간
나희덕
이 도시의 지하는 생각보다 깊어요
뿌리들이 나무를 지탱하듯
빌딩들이 버틸 수 있는 건 지하세계 덕분이지요
몇 그램의 절망이
일용할 양식이 되는 곳
어두운 계단과 구멍들 사이로
기적처럼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는 곳
내일을 꿈꿀 필요가 없고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곳
산소 없이 살 수 없지만
너무 많은 산소에도 견디지 못하는 우리는
썩은 공기로 숨 쉬는 법을 배웠어요
인간이라는 비루한 감옥에 갇혀 살기는
지상이나 지하나 마찬가지,
물론 지하세계에도 시장과 학교와 교회가 있어요
우리는 투명인간처럼 살지만
그렇다고 빛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에요
이 세계에서는
전구들이 태양을 대신하지요
빛의 찌꺼기들은 모두 여기로 와요
아직은 쓸 만한 전구들이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어내는 방
우리에겐 더 깊고 투명한 집이 필요해요
검은 흙 속으로 끝없이 뻗어가는 흰 뿌리들처럼
지상으로 난 환기구에 풀들이 자라기 시작했어요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월간 《문학사상》 2018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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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희덕 /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신춘문예 시 등단. 시집『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야생사과』『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시선집 『그녀에게』. 현재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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