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耳順)
우대식
이제 묵념 따위가 매우 잘된다
어떤 형식도 괜찮다
벌써 귀가 순해지는지 부끄럽기도 하지만
하나님이나 부처님 이런 분들도 크게 나무랄 것 같지는 않다
내친 김에 봄날 꽃나무와도 한번 크게 겨루어보고 싶다
몇 합 겨루지 못하고
낙화의 황홀에 굴복할지라도
내 안에 뻗은 칼로 된 나뭇가지와 꽃잎도
쨍그렁 쨍그렁
낙화의 종년(終年)을 맞고 싶다
봄비에 붉은 녹물을 뚝뚝 흘리며 울고 있는
내 안의 꽃들이여
순백의 어느 한 날을
우리도 그리워하지 않았겠는가
귀가 순해진다
내 귀를 잘라내고 싶다
⸺월간 《시인동네》 2018년 10월호
------------
우대식 / 1965년 강원도 원주 출생. 199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늙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보다』『단검』『설산 국경』. 산문집『죽은 시인들의 사회』『시에 죽고, 시에 살다』등.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