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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시 읽기

[시]평화의 잠 (외 1편) / 조병준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07.09.18|조회수343 목록 댓글 0
평화의 잠

조병준




1.

내 나무 밑 그 벤치에
누군가 잠들어 있는 날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그 벤치를 멀리서 서성이며 지키는
작은 나무가 되어보기도 했다

-내가 그대의 건너편에서
그대 벗어놓은 구두와
그대 집 잃은 여름밤을
지킬 터이니, 그대여
편히 잠드시라

2.

아이들은 손뼉 치며 노래하고 있었네
밤이 깊어
일생의 일을 모두 마친 벌레들이
서둘러 불빛 속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오, 신비한 녹색이여
밤이면 한없이 신비한,
불빛에 떠 있는 나뭇잎을 세다가 잠이 들었네
잠든 몸 위로 나뭇잎이 떨어져
내 몸이 나무가 되는
꿈을 꾸었네

노래하던 아이들은 어느새 돌아가고
나뭇잎 사이의 밤은 투명해져 있었네
어디선가 차가운 물 한 방울, 내 발목을 적셨네


3.

새벽바람이
떨어진 꿈들을 쓸어 모아 지나가면
나는 아직 따뜻한 그 벤치에 누워
잠시 내 몫의 꿈을 꾸어보기도 했다

-언젠가 그대
나무가 되었을 때
그대 발치에 구두 벗고
내 집 잃은 여름밤 그대에게 맡길 때
그대여
내게 편안한 잠 허락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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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기어온다





나는 그저 걷고 있었을 뿐이다
내 눈먼 발치로 내 오지랖 넓은 눈이
포르르 기어 내려간 건 내 잘못이 아니다
당신이 내 발치에서 스르르 기어가던 것이
당신 잘못이 아니듯이

당신이 그것을
서러운 예정이라 부르든
징그러운 윤회라 부르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당신, 기억하겠지
이쁜 도마뱀으로 기어와
내게 꼬리 던져주고 달아났던 날을
고운 까치독사로 기어와
내 복숭아뼈에 독니 박고 몸부림치던 날을
허리 가는 개미로 기어와
내 눈 속에서 맴돌고 또 맴돌던 날을
바짝 마른 지렁이로 기어와
내 발바닥에 들러붙어 떠나지 않던 날을

당신, 잊었겠지
이 징그럽게 긴 세월,
내 눈먼 발이 몇 억의 당신에게로 걸어갔는지
이 서럽게 둥근 세상,
내 밝은 눈이 몇 억 바퀴를 돌았는지,
잊었겠지,
잊었으니 또 그렇게 기어왔던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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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준 / 1960년 출생. 서강대 신문방송학과 및 같은 대학원 졸업. 1992년 《세계의문학》으로 등단. 2007년 9월 첫 시집 『나는 세상을 떠도는 집』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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