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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호 모던포엠 포커스 - 홍서연

작성자까망연필|작성시간26.06.12|조회수209 목록 댓글 0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외 9편

홍서연

 

 

그날 하늘은 세찬 소나기를 쏟아부었고, 어디론가 떠밀려 들어 웅크리고 있었지요 향불을 피우는 그림자들은 나를 조여왔어요

 

입구엔 외부인 출입금지 팻말이 있었지요

 

어쩌면 보지 않으려 했어요

 

그림자는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지요 고개를 저었어요

 

조금 버티니까

그게 동굴의 속셈이라고

그들은 말했어요

 

향 냄새가 짙어졌고 얼굴은 연기 속에서 점점 흐려졌어요 벽이 되고, 흔들리는 어둠이 되었죠 혼잣말을 중얼거렸어요

 

향불이 웃으면서 말했지요

 

인류의 마지막 목적은 이 동굴을 빠져나오는 거라고

 

나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저 발밑이 밀리는 그 감각이면 충분했어요

 

동굴은 마치 생물인 것처럼 꿈틀댔어요

 

향불이 꺼지고 그림자도 하나둘 사라졌어요

동굴의 어둠은 더 짙어졌지요

 

밖으로 나와보니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어요 젖은 땅을 밟으면서 천천히 걸었어요 한 줄 빛이 다가왔어요 하지만 아무 의도도, 의미도 없는 빛이었어요

 

뚜벅뚜벅 걸었어요

흙탕물을 튀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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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봄을 주워들었다

홍서연

 

 

 

꽃은

묻히기 위해 피어난다

 

제이는 웃었다

 

어떤 계절은

기억처럼 문득 도착한다

 

말보다 빨리 닿으려고

서두르는 봄

 

과거는

현재에 옮겨붙는다

 

악몽은 냄새가 되고

슬픔은 온도가 된다

 

우리는

같은 장면을 보고도

다른 계절을 지나온 사람처럼 서 있다

철문을 밀어 올리듯봉오리가 삐져나왔다

 

아몬드꽃이 피기 전의 시간

일찍 져버린,

 

시든 꽃잎을 주워

옆에 내려놓았다

 

제이는 얼굴 위로 지나가는 구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녀의 살결을 스쳐가던 오후, 숨마다 자국처럼 핀 것과 그려진 것

 

지금도

지문에 남은

붉은 그림자

 

제이는 손으로 말했다

 

액자 안에서는 계절이 늦지 않는다고

향기가 없는 꽃,

그것은 여전히 꽃일까

 

입술은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기억 하나가 또 떨어졌다

 

울지 않았다

 

그때 나는

아몬드꽃의 계절을 건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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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염색

홍서연

 

 

지구는 추웠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어요

 

설빙기와 블루블랙의 우연 찾기

 

해저의 화산

최초의 탄생이 탄생하던 곳

 

올챙이가 방울방울 떠올라요

착하게 뒤척이는 웅덩이를 의심해요

 

처음이 되는 경우는 있어도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죠

물방울 속엔 보이지 않는 거울이 있거든요

 

부딪히고 겹치고 공기에 찔려야 완성되는

원소처럼

얼룩처럼

 

친구 머리 염색하기

 

지금부터 실기에 집중해요 구멍 난 장갑 미리 버려요

장소 특성 고려하고 한눈파는 건 필수

진행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를 거예요

 

지나간 시간 다 볼우물에 담아요 소용될 때까지 우적우적 씹다가 미끄러지는 것들은 버려요 금 간 브러시를 삼키고 그 자리에 구름 씨앗 심어요 말풍선 정도의 산소만 남겨두고 언어가 부족하면 불량한 눈물 몇 방울 떨궈요

 

끓어오를 때를 기다려요

 

아뿔싸!

염모제가 벌써 산란을 시작했군요 머리칼 가시층을 파랑으로 문질러요

 

모든 색은 태양의 특허,

20년이 훨씬 지났는걸요 정직하게 훔쳐요

 

―차라리 모래 미용실로 갈까요

 

서늘한 맑음

 

탄생이 물든 그곳으로부터

 

다시 염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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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리홀

홍서연

 

 

크리스마스트리가 유행할 줄 전세기(前世紀) 인류는 알지 못했어요 벌목공은 카나리아해 비의 숲으로 들어가 어린 침엽수만을 벴지요 나무에는 바람이 걸리지 않았어요

 

침엽수 잎 사이에서

햇볕은 시원하게 쏟아지고

하늘하늘 가지를 흔들고 지나갔어요

때를 기다린 바닥, 낙엽을 밀고 올라오는 어린순들

양지에 얼굴을 비볐어요

 

손 닿는 곳은 어둠뿐

무지개는 걸리지 않았어요

 

물방울 하나가 숲을 이루던 날들이 있었어요 글로리홀 밑으로 쏟아지던 그 많은 폭포수는 어디로 갔을까요

 

왜 무지개다리를 건너야 하지요 부러지는 색을 하나 추가할까요 검은색은 어떨까요 차라리 부사를 빼고 낭창낭창 걸어볼까요 삭은 글로리홀은 어떤가요

 

머리칼 휘날리며 바닥을 향해 점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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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를수록

나는 발소리가 되어간다

 

수십억 년 전부터 투명한 세 시

잊어야 볼 수 있는 곳이 절벽이겠다

 

시간과 공간이 섞여 바위를 만들었다

그때 지구에 막 도착한 햇살 몇 줄기가 슬쩍 내려온다

 

오랫동안 재단한 절리를 보면

절벽을 사랑한 새들이 떠오른다

 

바닥없는 곳만 딛는

절벽

 

프리솔로는 가파른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을까

돌부리를 살피며 쓸쓸을 기어오르는 손

그의 등 뒤에는 중력이 없다

 

마당바위를 지나 수락산으로 접어든 계곡

큰 보폭으로 놓인 갈비뼈와 두개골

 

아득한

꽃이 피었다

 

나는 발로부터 오래 추락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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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

 

 

 

너의 목소리를 들려줘

캐리커쳐의 각진 소리를

너의 목소리를 들려줘

강렬한 자연의 평화로운 인상을

살롱에 걸리지 않은 외로운 소리를

 

너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아무 이유도 계산도 없는

신화도 종교도 역사도 아닌

너만의 소리를 들려줘

사랑에 들뜬 소년의 목소리를

 

그 소리를 들려준다면

나는 너를 안고 싶겠지

내 팔에 안긴 푸른 그림자를

나는 사랑하겠지

 

부채와 가발은 필요 없어

네가 튜브에 물을 섞지 않았다는 걸

나는 알지

 

박물관에 걸린 완벽한 전통이 아닌

소리 하나로 휘몰아칠 너만의 터치를

늦여름의 절정처럼 나는 원해

매끄러운 살롱은 치욕이야

 

분명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너의 소리

 

너만의 목소리를 들려줘

 

 

* 모네는 아내 카미유에게 일본 전통 의상을 입힌 모습을 그린 뒤, 그 그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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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풀

홍서연

 

 

풀은 흐느끼지 않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은 없더라

 

김수영 문학관에서

쓰러질 듯 눕고

 

나는 사라지고

겨울나무만 광대처럼 서 있더라

 

벽을 차지한 눈은

녹아 흐르지도 않고

 

발밑까지 쌓이지도 않고

나만 펑펑 내리고

북풍에 부딪히더라

 

백야 12시

 

사라진 풀숲에

텍스트만 누워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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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상 버스

홍서연

 

 

12월 하순

우리 사이에 거짓이 태어나고 있었다

 

척. 척. 척.

초점 없는 사진들

한랭전선이 몰고 온 유령은 찍히지 않았다

 

발톱에 실 한 땀이 걸렸다

시베리아 호수가 버스 안으로 들이쳤다

놀란 의자가 미끄러졌다

불편해지고 백지들이 자리에 앉는다

 

돌아갈 문장과 돌아올 문장을 쏟아냈다

휘몰아쳤다 찬바람 틈으로

어린 별. 별. 별. 별. 태어났다

 

뒤섞인 문장들을 다독여 그의 옆자리에 올려놓았다

 

그 옆자리에는.

이미.

그믐달처럼.

잘.

삭은.

칼바람 맞아. 모서리. 잃은.

무덤처럼. 수북한.

 

바닥이 없었다

엔진을 점화한 누리호가 날아가고 있었다

버리지 못한 발음이 일어났다

버스는 종착지로 달렸다

 

PM 10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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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카르텔

홍서연

 

 

한 줌의 약을 삼키는 여자가 있다.

불탄 바람이 몸에 들어 영혼처럼 떠돌았다.

 

거칠게 숲이 탄다. 골짜기를 휘돌아 이 산 저 산 도깨비가 날아다닌다.

 

질퍽한 손조차 쓰지 못한다. 미끄러질 줄 알면서 잡는다. 시커먼 토사를 줄줄 흘리는 너는 다른 곳을 보고 말한다.

 

그림자가 여자는 아니지만, 여자는 그림자야. 장마전선이 떠난 후 그녀는 목을 열고 울었다.

 

어느 날 자음도 모음도 활활 타오른다. 새로 태어난 텍스트. 송진의 더러운 뒷배.

 

그곳엔 이상한 사람들이 와 있었어.

까맣게 탄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어.

납골당의 연기가 생각났어.

지갑을 들여다보는 그들은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는 듯 불쾌한 인상을 썼어. 소름이 돋았어.

 

불탄 자리 훤한 가지. 명과나무 도깨비바늘 하늘말나리 뿌리들. 자르고 뽑고 파헤치고 다시 묻고.

 

이 땅의 낮밤과 어울릴 수 없는 잔뿌리. 유골함을 굴리며 걸어 나오는 불탄 산비탈.

 

그림자는 손을 뻗어 잡목들이 올라오는 불탄 골짜기를 끌어안는다. 씨앗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한 줌의 약을 삼킨 여자.

구름은 자주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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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산

홍서연

 

 

십이월,

 

마른 나뭇가지 위에 어미 새가 집을 짓는다

 

앙상한 바람 사이로

 

고집멸도의 지푸라기를 얹는다

 

하루 사흘 그리고 며칠,

 

바닥에서 퍼드덕거리는 아기 개똥지빠귀

 

모닥불이 훨훨 타고 있었다

 

휘이 휘이,

 

나지막이 저 먼 치서 들리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겨울 잎새 하나,

 

와불 와불 굴러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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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서연

 

014년 《수필춘추》 겨울호 등단

2022년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

모던포엠작가회 회원

시집 『당신은 A형 나는 BB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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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포엠 포커스 6>

 

투명한 시혼과 해법의 적절성(適切性)

- 홍서연 시인의 에스프리와 층계 오르기

엄창섭(가톨릭관동대 명예교수, 본지 주간)

 

 

1. 직물 대상과 시적 형상화의 매혹

 

모름지기 시오니즘(Zionism)에서 유대교 신비주의로의 관심을 전환시킨 20세기의 사상가인 관계 철학의 마틴 부버(Martin Buber)는 ‘너와 나’의 대화법을 천착시켜 “생각과 마음을 비우면 ‘영원한 그대’인 신과의 합일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였다. 그 같은 일면에서「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을 포함한 10편으로 『모던포엠』 통권 273호 「모던포엠 포커스」 지면에서 중량감 있게 분할·통합될 「투명한 시혼과 해법의 적절성(適切性) - 홍서연 시인의 에스프리와 층계 오르기」의 시편 해설은, 그 자신의 시 의식에 맞물린 직물 대상과도 깊은 연계성을 지닌다. 일단 충남 대덕에서 출생하고 현재 경기도 남양주에 거처하며 2022년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첫 시집 『당신은 A형 나는 BB형』(시인동네 시인선 270, 2026)의 출간은 냉소주의로 치닫는 비정한 지식·정보화 사회에서 좋은 인간 관계성의 회복을 위한 ‘느림의 시학’으로 사물을 따뜻하게 응시할 「불화하는 세계와 견딤의 형상화」라 한층 더 뜻깊다.

특히 ‘문인은 등단 연도보다는 그 작품으로 평가를 받아야 할 존재이기’에 객관적 관점에서 비중 있게 논의될 문제의 시편은 시적 형식의 구조처리가 천편일률적으로 지극히 이채롭다. 까닭에 ‘향불을 피우는 그림자들은 나를 조여왔어요’라는 그 자신의 시적 변명 뒤에 “향냄새가 짙어졌고 얼굴은 연기 속에서 점점 흐려졌어요 벽이 되고, 흔들리는 어둠이 되었죠 혼잣말을 중얼거렸어요//향불이 웃으면서 말했지요(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의 일면의 시적 흐름은, 삶의 일상에서 종종 만나고 겪는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그렇게 모남이 주어지지 아니할뿐더러 시미(詩味)가 가일층 감미롭다. 까닭에 삶의 지문(指紋)에 해당하는 시적 기법은 멕시코의 문인으로 외교관인 옥타비오 파스(Octavio Paz Rozano)의 “언어는 리듬이 되려고 하는 본래의 경향을 지닌다. 그 점은 신비스러운 중력의 법칙에 따르기를 하는 언어의 교합은 자발적으로 시로 돌아간다.”라는 지적처럼 영혼이 자유로운 바람에 견주어 언어의 응결체가 현대시의 이중구조를 적절히 수용한 동질성은 또 하나의 관심사다.

차제에「직물 대상과 시적 형상화의 매혹」에서 ‘천상엔 별, 지상에는 꽃, 그리고 마음에 시(詩)’라는 일관성은 그 자신의 시편이 시적 질료와 깊은 연계성을 맺은 결과물이기에 결(結) 고운 시적 틀 짜기는 동시대에 처한 충직한 독자의 관심을 자극하기에도 부족하지 아니하다. 따라서 비교적 단조로운 호흡이나 상징성이 강한 그 자신의 시편에서 ‘꽃은 묻히기 위해 피어난다.’라는 응축성이 가미된 그만의 긴장감은 인용한 시편의 ‘기억 하나가 또 떨어지는’ 그 같은 현상의 맞물림으로 ’ 어설픈 푸념의 막연함은 끝내 감회(感懷)를 안겨줄 따름이다.

 

 

제이는 손으로 말했다//

액자 안에서는 계절이 늦지 않는다고/향기가 없는 꽃,/그것은 여전히 꽃일까//

입술은 그 문장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기억 하나가 또 떨어졌다//

울지 않았다//

그때 나는/아몬드꽃의 계절을 건너는 중이었다//

-「떨어진 봄을 주워들었다」에서

 

그렇다. 하나같이 무분별한 언어가 정신적 공해를 조성하여 편 가르기로 불안한 시간대이지만, 그 자신이 처한 삶의 처소에서 그 나름으로 인간의 생존 가치를 천착(穿鑿)하며 경계 허물기를 통한 소외된 타자의 곁으로 분별력을 지니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담백한 품격(稟格)을 지닌 시인으로서 지극히 구속을 거부한 자유로운 시 심리나 시적 구사(構思)는 못내 흥미롭다. 따라서 그 자신이 절감하는 절대 고독은, 충직한 독자가 가슴 저리게 공감하는 본질적인 소외, 곧 무상무념이기에 ‘물안개 속에서 떠도는 빈 배’와 같은 무상함이 곁들여 있다.

차제에 미래가 암울한 시간대에서 동시대 대다수 정신작업의 종사자와는 상이하게 이처럼 유유자적하며 그만의 빛나는 존재감으로 개아적(個我的) 차별성이 신선한 충동감으로 ‘처음이 되는 경우 있어도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죠. 물방울 속엔 보이지 않는 거울이 있거든요.’라는 시적 변명에서 시 의미의 다양성은 ‘서늘한 맑음’의 어투처럼 지극히 이채로울 따름이다. 까닭에 반어적인 언어의 구사도 한층 놀랍지만 “지나간 시간 다 볼우물에 담아요 소용될 때까지 우적우적 씹다가 미끄러지는 것들은 버려요 금 간 브러시를 삼키고 그 자리에 구름 씨앗 심어요 말풍선 정도의 산소만 남겨두고 언어가 부족하면 불량한 눈물 몇 방울 떨궈요//끓어오를 때를 기다려요//아뿔싸!/염모제가 벌써 산란을 시작했군요 머리칼 가시층을 파랑으로 문질러요(어쩌다 염색)”를 통해 확인되듯 냉혹한 시대 상황에서 얼어버린 눈물도 따뜻한 정신적 기후로 변형시켜 줄 대상의 형질을 우직한 어투로 놀랍게 일깨워준 창조적 작업은 끝내 따듯한 감성과 절제된 언어로 제작한 생명감이다.

 

 

2. 빛의 교감과 시인의 시대적 소임

 

각론하고 오랜 고뇌 끝에 간행하는 그 자신의 빛나는 정신적 생산물의 총화에 해당하는 대다수 시편은, 결과적으로 무엇에도 얽매이거나 구속됨이 없는 수행자의 삶이 충직하게 반영될 것이다. 모처럼 끊임없는 정직성의 탐색으로 밝은 사회를 스스럼없이 지향하는 그 자신의 시적 작위(作爲)야말로 일상의 감동을 회복시키는 역동성에 결부되기에 대다수의 시편은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틀 짜기로 ‘인생은 잠시 머물다 가는 무위무상(無爲無想)’의 깊은 사변성(思辨性)에 사유의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처럼 일관성을 지닌 그 자신의 정신작업은 ‘인연과 자연, 그리고 즉물적 대상’을 즐겨 시적 질료로 삼고 있음은 새삼 헤아릴 점이다.

그와 같이 영혼의 깊은 상처로 고통받는 이들의 영적 치유를 위하여 초인의 출현을 일관되게 주창한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오직 예술만이 두려움이나 현존재의 불합리에 대한 구역질이 나는 생각을, 사는 보람을 주는 표상으로 바꿀 수 있다."라는 극단적인 언급도 숙고할 점이다. 일단 사전적 의미로 ‘글로리홀(Gloryhole)은, 갱도로 들어가기 위하여 또는 지름이 큰 구멍을 파기 위하여 임시로 작게 만드는 구멍’을 뜻하나 비록 ‘손 닿는 곳은 어둠뿐 무지개는 걸리지 않았어요’라는 그 자신의 상황설명이 주어질지라도 폭넓게 시 의미의 다양성을 자유롭게 구사하며 “물방울 하나가 숲을 이루던 날들이 있었어요 글로리홀 밑으로 쏟아지던 그 많은 폭포수는 어디로 갔을까요//왜 무지개다리를 건너야 하지요 부러지는 색을 하나 추가할까요 검은색은 어떨까요 차라리 부사를 빼고 낭창낭창 걸어볼까요 삭은 글로리홀은 어떤가요(글로리홀)”의 일면에서 시적 상상력은 폭넓게 확장이 되기에 그 통로는 막힘이 없다.

특히 그 자신의 시적 상상력은 동시대의 어느 시인과도 쉽게 비견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이 섞여 바위를 만들었다 그때 지구에 막 도착한 햇살 몇 줄기가 슬쩍 내려온다’와 같이 지극히 자유롭기에, 진정한 ‘정신작업의 종사자는 작품으로 승부를 겨루어야 할 존재이다. 까닭에 “바닥없는 곳만 딛는/절벽//프리솔로는 가파른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을까/돌부리를 살피며 쓸쓸을 기어오르는 손/그의 등 뒤에는 중력이 없다//마당바위를 지나 수락산으로 접어든 계곡/큰 보폭으로 놓인 갈비뼈와 두개골//아득한/꽃이 피었다(숨)”를 통해서 이같이 검증될 것이나 누구도 쉽게 모방할 수 없이 존재감이 빛나는 그 자신의 시적 비법은 견줌을 일체(一切)로 거부한 뒤 천부적인 다재다능(多才多能)함의 맞물림이다. 그렇다. 정신적으로 창조된 것은 물질보다 한결 생명적인 삶에서 시적 의미망을 확장할 때 그 자신의 특이한 어법 구사(構思)의 내구성(耐久性)은 끝내 견고한 까닭에 일상적 삶에 수용된 심상(心象)의 형상화는 못내 친근한 분위기다.

차제에 거대한 삶의 격랑에 그 자신이 비록 떠밀리면서도 어려운 한 시대의 늪을 건너며 끊임없이 전통의 실타래를 꼬며 풀어내며 사유와 생각의 속도를 조절하는데 능숙한 그 자신이 자연의 순차(循次)에 스스럼없음은 더없이 자랑스럽다. 그렇다. 종종 그 자신의 시편 「절규」를 접하면 노르웨이 표현주의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가 기억 저편에서 때로는 클로즈업(close-up)될 것이나 ‘분명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너의 소리 너만의 목소리를 들려줘’라는 때로는 간절함이 주어질지라도, 홍서연 시인이 ‘빛을 그리는’ 프랑스 인상주의의 화가인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를 호명하여 시적 질료로 삼아 형상화한 시적 행위와 상상력의 확장에 의한 그 추이(推移)는 한층 더 경이롭다.

 

 

너의 목소리를 들려줘/캐리커쳐의 각진 소리를/너의 목소리를 들려줘/강렬한 자연의 평화로운 인상을/살롱에 걸리지 않은 외로운 소리를//

너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아무 이유도 계산도 없는/신화도 종교도 역사도 아닌/너만의 소리를 들려줘/사랑에 들뜬 소년의 목소리를//

그 소리를 들려준다면/나는 너를 안고 싶겠지/내 팔에 안긴 푸른 그림자를/나는 사랑하겠지//

-「절규」에서

 

각론하고 그 자신의 관조적 삶을 통해 언어예술로 직조해낸 동일화 일면에서 또 그렇게 ‘풀은 흐느끼지 않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풀은 없더라’라는 그 자신의 시적 해명은 물론이거니와 “벽을 차지한 눈은/녹아 흐르지도 않고//발밑까지 쌓이지도 않고/나만 펑펑 내리고/북풍에 부딪히더라//백야 12시//사라진 풀숲에/텍스트만 누워 있더라(사라진 풀)”의 보기를 통해 이같이 확증됨도 그럴 것이나, 여기서 김수영 시인의 시편인 「풀」에 견주어 서로 간에 대척점에 있는 ‘풀과 바람’ 대신 ‘풀과 텍스트’의 존재감을 통해 그 자신의 지극히 현대감각에 의해 제작된 그 자신의 「사라진 풀」은 단순히 들판의 풀을 예찬하기 위해 쓴 것은 아님도 파악될 것이나 대자연의 순리 속의 바람과 풀에 관한 이야기와 무관한 시적 동기부여(動機附輿)다. 차제에 ‘사라진 풀’의 시적 의미 또한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 곧 진정한 강함임’에, 이 같은 점에서 풀의 상징성은 단순히 무력한 존재가 아닌 까닭에 깊은 상처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수성은 못내 누구보다 고통에 반응하는 진정한 용기에 해당한다.

모름지기 쟝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가 「작가의 책임」에서 “작가의 책임은 명백하다. 바로 그것은 자유와 해방의 이론을 구축하는 것이다.”라고 기술하였듯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이탈은 정신적 위안과 맞물려 있음은 헤아릴 바다. 특히 그 자신의 시적 형상화는 대다수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은 지극히 자유로운 상상력의 확대로 ‘12월 하순 우리 사이에 거짓이 태어나고 있었다.’라는 막연한 개연성의 제기는 문장부호 사용 하나에도 형식에 구속됨이 없는 멋스러움에 짐짓 이채로울 것이다.

 

 

돌아갈 문장과 돌아올 문장을 쏟아냈다/휘몰아쳤다 찬바람 틈으로/어린 별. 별. 별. 별. 태어났다//

뒤섞인 문장들을 다독여 그의 옆자리에 올려놓았다//

그 옆자리에는./이미./그믐달처럼./잘./삭은./칼바람 맞아. 모서리. 잃은./무덤처럼. 수북한.//

바닥이 없었다/엔진을 점화한 누리호가 날아가고 있었다/버리지 못한 발음이 일어났다/

버스는 종착지로 달렸다//

PM 10시 37분//

-「문상 버스」에서

 

모처럼 허망한 삶의 일상에서 마침내 「문상 버스」를 통해 생명의 존엄성을 담백하게 풀어내어 시적 미감을 살려내려고 그 자신을 해체하고 창조하는 생명에의 변주는, 시적 흥취를 일깨워 ‘분열된 자아의 회복’은 시각적인 면의 치중과 따뜻한 감성에 호소하는 끊임없는 탐색으로 충직한 독자의 시선을 끌기에 일체의 부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한다.

 

 

3. 감성의 미감과 화해의 시학

 

어디까지나 감성의 미감과 화해의 시학으로 해석되는 그 자신의 시 정신은 비교적 식물성 언어로 직조된 전율 같은 가슴 떨림이며, 동시에 그만이 겪는 황홀함이다. 까닭에 그 자신의 도전·실험정신의 일면에서도 좌절을 극복한 기질의 표징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홍서연 시인은 존엄한 삶에서 필연적인 만남의 소중함을 시적 행간에서 틈틈이 확인시켜 주는 편이다. 또 한편 견고한 고독 앞에서도 맑은 영성의 울림으로 시적 대상을 형상화한 그 자신의 시편은 타자 간의 심상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닦아줄뿐더러 달빛 묻은 영혼을 흔들어 깨우고 삶의 지침마저 돌려놓는다. 이처럼 그 자신이 초연한 자세로 삶과 현실을 교감시키는 미학적 도전은 끝내 정신적으로 빈곤한 우리네 삶을 내적 충만의 인자(因子)로 변형시키는 역할을 켜켜이 지켜줄 따름이다.

특히 『모던포엠』 통권 273호 「모던포엠 포커스」 지면에서 다루어진 비교적 중량감 실린 그 자신의 시편은 흙냄새를 풍기는 삶의 애환을 고뇌를 자잘하게 투영시킨 진지한 삶의 편린(片鱗)이다. 따라서 파괴와 오염의 도시가 아니라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어 조화로운 삶을 누릴 수 있는 현상에서 하나같이 정신적 부산물로 형상화한 낯익은 시편은 엄격하게 유의미한 것으로 ‘적확, 격렬, 구체적, 복합적이다.’ 까닭에 그만의 차별성을 지니고 자유로운 리듬과 형태를 갖춘 지난(至難)한 ‘몸의 시학’이 눈물겹도록 순수한 것은 감동의 회복에 연유한 결과라 예술적인 질감과 터치는 한층 더 역동적이다.

또 한편 카르텔(Kartell)의 사전적 개념이 ‘동일 업종의 기업들이 이윤의 증대를 노리고 자유 경쟁을 피하기 위한 협정을 맺는 것으로 형성되는 시장 독점의 연합 형태임’으로 밝혀지는 현상에서, 그 자신의 시적 상상력의 확장은 ‘거칠게 숲이 탄다. 골짜기를 휘돌아 이 산 저 산 도깨비가 날아다닌다.’라는 형상으로 가끔 시적 형상화의 구도적 처리가 저토록 변형될지라도 “질퍽한 손조차 쓰지 못한다. 미끄러질 줄 알면서 잡는다. 시커먼 토사를 줄줄 흘리는 너는 다른 곳을 보고 말한다.//그림자가 여자는 아니지만, 여자는 그림자야. 장마전선이 떠난 후 그녀는 목을 열고 울었다.//어느 날 자음도 모음도 활활 타오른다. 새로 태어난 텍스트. 송진의 더러운 뒷배.//그곳엔 이상한 사람들이 와 있었어./까맣게 탄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어./납골당의 연기가 생각났어. (불타는 카르텔)”라는 해법은 「불타는 카르텔」의 해법에 맞물려 더없이 격정적일 따름이다.

각론하고 하나 같이 자신에게 허락된 소중한 삶에 있어 숨져간 이들이 절박한 심정으로“하루만 더 살았으면… 하던 그 시간의 끝자락에서 오늘은 내 삶의 최초이며 최후의 날이라.”는 그 초조와 응축된 긴장감으로 존엄한 목숨의 의미를 새삼 절감해야 하는 까닭에 그 자신은 처절한 삶의 현장에서도 자연 회귀성을 거역하지 아니하고 ‘생명의 씨앗을 파종하는 농부의 보폭(步幅)에 의한 느림의 시학’으로 부조리와 부당함을 절대 고독 앞에서도 오염된 정신세계를 정화시켜주는 맑은 영혼과 담백한 품격을 지닌 당당한 자존감의 시인이기에, 때로는 살아온 세월의 흐름과는 무관하게도 새삼 구명되듯 화려한 장식을 거부한 담백한 격조(格調)는 ‘맑고 투명한 눈물’에 의해 평상심을 유지시켜주는 지순한 선미(禪美)에 의해 짐짓 시적 분위기는 밝고 경이롭다.

이 같은 관점에서 깊은 사유의 그물망과 시적 감응에 견주어, 시의 틀을 받쳐주는 문맥에 의한 변주로 아득히 흘려버린 세월에 대한 회감(會減)을 그 자신이 사유의 깊이와 적당한 속도를 지탱하며, 즉물적인 질료에 관한 관심사를 시적 의미와 가치로 담아낸 인자(因子)로 그 해명은 뜻깊다. 또 한편 그 자신의 시적 정조가 빚어낸 자잘한 질료는 비정한 이기주의로 치닫는 현상에서 인간관계의 지속적인 또 하나의 일깨움으로 자존감을 회복하는 결과물에 해당한다. 따라서 「푸른 꽃」의 저자로 독일의 세계적 낭만주의의 시인인 노발리스(Novalis)가 “철학이란 본래 향수요, 어디에서나 고향을 만들려는 하나의 충동이다.”라고 역설하였듯 소소한 삶의 일상에서 즉물적 현상의 응시와 탐색의 과정을 걸쳐 독자적으로 심상(心象)의 깊이에 이처럼 둥지를 틀어가며 관념의 본질을 끊임없이 규명하는 작업은 더없이 유의미하다.

특히 이 땅의 충직한 독자를 착각이나 갈등, 그리고 몽유(夢遊)에 빠져들게 하는 매혹(魅惑)의 비법은 다소 경이롭다. 까닭에 비교적 단조로운 음조로 시적 응축감을 한껏 압축시킨 ‘불교의 우주관에서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거대한 수미산(須彌山)’은 불교 우주론에서 중심 세계산의 이름이고 어원은 메루(Meru)다. 따라서 시적 형상화는 그 자신의 일상적인 삶의 다양성을 확증할뿐더러 끝내 종교적 긴장감을 ‘와불 와불 굴러다니는’ 형체의 일면은 한껏 이채로움을 일깨워주고 있다. 또 한편 그 자신의 대표 시편에 해당하는 「수미산」은, 수사적 기법으로 중의법(重義法)을 사용하여 언어적 단조로움을 이탈한 ‘와불(臥佛)은 ‘누워 있는 불상’ 뜻하나 여기서 ’와글와글‘은 ‘사람이나 벌레 등이 한 곳에 복잡하게 모여 떠들거나 움직이는 소리를 나타내는 의태어’다. 모처럼 이채롭게도 ‘성(聖)스러운 ‘-臥佛 臥佛(와불 와불)’과 ‘속(俗)어인 ‘-와글 와글’의 연계성을 불러 모아 언어의 단조로움을 한껏 벗어난 기교적 처리는 이처럼 시흥을 안겨줄 따름이다.

 

십이월,/마른 나뭇가지 위에 어미 새가 집을 짓는다/앙상한 바람 사이로/고집멸도의 지푸라기를 얹는다/하루 사흘 그리고 며칠,/바닥에서 퍼드덕거리는 아기 개똥지빠귀/모닥불이 훨훨 타고 있었다/휘이 휘이,/나지막이 저 먼 치서 들리는/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겨울 잎새 하나,/와불 와불 굴러다닌다//

-「수미산」 전문

 

결론적으로 앞서 그 자신의 시집에 특이한 조화로움을 구축한 특성 있는 결과물에 관한 ‘공간과 시각, 그리고 시적 기교와 시 정신’의 모색은 차별성을 지닌 정신적인 작업이다. 따라서 갈등과 모호성 뒤에 빚어진 신비성은 천상을 향한 생명의 언어이며 영혼의 은총이다. 까닭에 사변성(思辨性)을 수용한 이 같은 시편은 일상의 감동을 회복시켜주기에 평자 그 나름의 한결같은 기대라면, ‘적확하게 사물의 추이(推移)를 응시하되 서정성의 미적 확장’을 위해 영감 반짝일 언어의 비늘과 칙칙한 어둠을 말끔 씻겨낼 극소수의 창조자’로서 시대적 소임의 엄격한 역할수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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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창섭

 

강릉출생, 『華虹詩壇』(1965) 발행인, 『시문학』 출신, 한국시문학 학회 및 김동명학회 회장, 관동대학교 대학원장(총장대행) 역임, 현재 가톨릭관동대학 명예교수, 한국기독교문협 고문, 월간『모던포엠』 주간, 사) k 정나눔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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