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 시가詩歌의 7.5조는 한국의 율조律調 -한국인 왕인王仁은 일본 와카[和歌]의 창시자創始者 문학박사 홍윤기洪潤基1) 1. 7.5조에 영향 받은 한국 근대시 한국 근대시近代詩가 일본 근대시에 의해서 영향받았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한국 근대시는 특히 일본 시가詩歌의 7.5조의 영향을 받았다.2)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5.7조의 영향도 입었다. 그렇다면 7.5조와 5.7조라는 율격律格은 본래 일본 시가의 전통적인 율조인가. 아니면 그것이 고대古代 한국韓國으로부터 일본으로 유입된 것인가를 규명해야만 한다. 본고는 박사博士 왕인王人3)의 시가詩歌인 〈난파진가難波津歌, なにわづのらた〉(〈梅花頌〉으로도 부름)가 일본 최초의 와카[和歌]이며 그 발생 과정을 비교 검증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 굳이 부기해 둘 것은, 앞으로 한일韓日 시가詩歌에 있어서 양국 학자 간의 본격적인 비교연구가 전개될 것을 제의하는 바이다. ‘난파진難波津’은 지금의 오오사카[大阪] 항구의 고대의 지명地名이며, 서기 3C 경부터 백제인들이 개척했던 유서 깊은 터전이다. 일찍이 홍기삼洪起三 교수는 “‘안서岸曙’가 끝까지 자아를 고집하면서 고수한 7.5조와 한국의 전통적 리듬과의 비교, 또한 그 계승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라든가, 일본의 와카[和假]와의 비교, 또는 안서岸曙 당대에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을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매우 중요하다”4)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김윤식金允植 교수 이외 몇 분이, “소월素月의 시는 민요라고 하지만 주조음主調音은 7.5조이다. 거기에 문제가 있다. 이것은 일본 시의 리듬과 깊은 관계가 있다”5), 또는 조동일趙東一 교수 외 몇 분이, “일본 시가의 7.5조의 영향을 받은 김소월은 민요시인이 아니다”6)고 지적했는가 하면, 오세영吳世榮 교수는 “7·5조가 개화기 이후 일본 창가唱歌의 영향 아래서 크게 유행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일본 시가의 전통 음수율音數律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한국 시가의 독특한 3음보격音步格이 이와 비슷한 일본 시가(和歌나 俳句)의 음수율에 상호작용을 일으켜, 다만 그 전대前代 보다 널리 보급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7)고 밝힌 것 등도 앞으로 한일 시가의 비교연구 과정에서 중요한 메시지로써 간주한다”8)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일본 센슈우大學 大學院 國文科 文學博士, 檀國大學校 大學院 日本詩文學 招聘敎授, 韓國外大 〈韓國詩作品論〉 담당교수. 2)趙芝薰 《韓國現代文學史》〈趙芝薰全集③〉(一志社,1973,p.211), 趙演鉉 《韓國現代文學史》(成文閣,1969,p.118), 鄭漢漠 《韓國現代文學史》(一志社,1971,p.161), 金海星 《韓國現代詩文學槪說》(乙酉文化社,1976,p.42), 金容稷 《韓國近代詩史》(上卷,學硏社,1991,p.137), 尹柄魯 《韓國近現代文學史》(明文堂,1991,p.58) 3)왕인 박사는 왜나라 왕의 초청을 받고 응신천황應神天皇(생년미상∼402) 16년에 백제로부터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를 가지고 일본 왕실에 건너가서 왕자의 스승이 되고 정무장관(文首)으로 활약했다(《日本書紀》〈應神條〉). 4)洪起三 〈岸曙의 선구적 위치와 문학〉(《文學思想》,1973.5,p.293) 5)金允植 〈植民地의 虛無主義와 詩와 選擇〉(《文學思想》,1973.5,p.58), 趙芝薰 《半世紀歌謠文化史》〈趙芝薰全集⑥〉(一志社,pp.370∼371), 金容稷 《韓國近代詩史》(上卷,學硏社,1991,p.364) 6)趙東一 〈民謠와 金素月詩〉(《曉星女大學報》,1970.4.1.第2面) 7)吳世榮 《韓國浪漫主義研究》(一志社,1990.12, p.46) 8)本論의 제1장 〈7·5조에 영향 받은 한국근대시〉는 저자가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일본근대문학회 초청강연(1996.11.26)에서 밝힌 내용임. 2. 왕인이 창시한 일본 최초의 시가詩歌 일본 고대의 시가詩歌를 총칭해서 와카[和歌]로 일컫고 있다. 이 와카는 백제인 왕인 박사에 의해서 서기 405년에 처음으로 일본에서 발표되었다.9) 이는 서기 5세기 초, 한국인에 의해서, 일본이 자랑삼는 와카가 읊어지게 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왕인 박사는 5.7.5.7.7 음수율音數律을 갖춘 일본 와카의 창시자인 것이다. 박사 왕인의 와카는 ‘나니와츠노우타’[난파진가難波津歌] 또는 ‘바이카쇼우’[매화송梅花頌]로도 통칭되어 왔다. 〈난파진가〉는 처음에 다음과 같이 한자어로 쓰여졌다. 우리의 〈향가〉가 한자어를 음音, 훈訓 등 표기방식 즉 ‘향찰鄕札’로 기록했던 것처럼, 난파진가 역시 한자어를 차용借用해서 ‘민요우가나’[만엽가명萬葉假名]라고 칭하는 음, 훈의 표기식으로 기록했던 것이다. 難波津尒 佐具哉此花 冬古毛梨 今波春邊 佐具哉此花10) 난파진에는 피는구나이꽃이 겨울잠자고 지금은봄이라고 피는구나이꽃이 (필자 번역) 이같이 왕인의 〈매화송〉은 음音과 훈訓으로 읽으면, 음수율은 5.7.5.7.7 이 된다. 이 5.7.5.7.7의 음수율은 일본의 카나(假名,かな) 글자로 풀어서 쓰게 되며, 따라서 ‘와카’를 ‘미소히토모지’(三十一文子,みそひともじ)라고도 통칭한다. 일본 근대시가 7.5조 또는 5.7조로 되어 있거니와, 그와 같은 율조는 다름 아닌 박사 왕인의 와카 〈난파진가〉로부터 비로소 창시되었음을 우리는 우선 쉽게 살필 수 있다. 일본 7.5조의 발자취11)에 대해서는 논고를 달리해서 구체적으로 밝힐 예정이다. 앞에서 예시한 박사 왕인의 일본 최초의 와카 〈난파진가〉는 우리의 향찰鄕札 또는 이두[吏讀]처럼, 일본말을 한자어를 차용借用하여 쓴, 이른바 ‘만요우가나’[萬葉假名]라는 표기법에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인이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간 뒤 왜나라 왕자에게 글을 가르치며 서기 405년에 〈난파진가〉를 지은 일은, 또한 왕인 박사가 최초로 왜나라에서 ‘만요우가나’를 창시해서 쓴 것을 말해준다. 왜냐하면 왕인 박사가 문자가 없던 왜땅으로 한자를 처음으로 가지고 건너가서 비로소 문자의 사용법을 가르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왕인이 처음으로 문맹국인 왜국에 건너가 왕자에게 글을 가르쳤다는 사실은 왕명에 의해 관찬된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12)라는 고대 역사책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부기하자면 〈일본의 ‘만요우가나’[萬葉假名,まんよらがな])는 한국 고대의 이두[吏讀]의 영향을 받았다〉13)고 일본의 학자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1882∼1944)가 밝힌 바 있다. 왕인이 서기 405년에 쓴 〈난파진가〉(매화송)는 서기 905년에 키노 츠라유키[紀貫之] 등이, 카나[假名] 글자로 편찬한 《고금와카집》14)의 ‘카나서[假名序]’라는 서문에 실려 있다. 다음과 같은 것이다. 여기 예시한 〈난파진가〉는 시문학자며 가인歌人이었던 후지와라노 사타이에[藤原定家]가 고대의 원본 《고금와카집》을 베껴 쓴 《다테본[伊達本]》에 있는 〈난파진가〉이다. 왕인의 원문原文 한자어 대신 일본 글자 ‘히라가나[平假名]’로 썼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일본 최초의 시가詩歌는, 문자가 없던 왜나라에 한자를 가지고 건너간 왕인 박사에 의해서, 최초로 지어진 〈난파진가〉(매화송)이다. 이것을 보면 음수율이 5.7.5.7.7의 와카[和歌]의 전형典型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음율은 일본 시가의 5.7조와 7.5조의 기본 율격을 이룬 것도 쉽게 살필 수 있다. 한국 근대시가 일본 시가詩歌 7.5조의 영향을 입었다고 하지만, 본래의 5.7, 7.5조 율격은 왕인이 창시한 와카 〈난파진가〉가 그 원천源泉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일본 시가 7.5조는 ‘카구라노우타’[神樂歌]가 작용했다는 게 저명 일본 학자들의 통론이다. 바로 이 ‘카구라노우타’도 일본 고대에 천황들이 한국신인 ‘한신韓神’을 제사지내던 축문祝文인 〈제신가祭神歌〉를 일컫는 것이다.16) 우리나라 고시가(古詩歌)에도 보면 7.5조의 율격이 가끔은 나타나고 있다. 그 전형적인 것이 백제가요 「정읍사」의 제1연 3. 4행과 제3연 2행 및 3. 4행에서 살필 수 있다. 그것을 3.4.5 음보격으로도 일컫는데, 7.5조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와 같이 〈정읍사〉에는 7.5조의 음수율音數律, 5음구(五音句), 7음구(七音句)들이 지배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일찍부터 고대 한국에 일본 와카[和歌]에서 볼 수 있는 5.7, 7.5 율조가 존재해 왔음을 고찰하게 된다. 여기 부기해 둘 것은 우리나라 국문학서의 〈정읍사〉의 가사는 ‘아 다롱다리’가 모두 5음(五音)으로 전해 오고 있다. 따라서 ‘어긔야 어강됴리/ 아 다롱디리’의 7.5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살피게 된다. 그런데 고정옥 교수가 저술한 《조선민요연구》17)에는 ‘아으 다롱다리’로 표기되어 있다. 이 경우 ‘아으’는 고정옥 씨가 민요 채집 당시에 ‘아-’라는 긴 장음長音의 발음을 멋스럽게 ‘아으’로써 구송口誦한 사람으로부터 채집한 것에서 그와 같이 ‘아으’로 기술한 것으로 추찰한다. 그러나 ‘아으’ 역시 원原音은 ‘아’로써 간주하는 게 옳은 것으로 본다.18) 〈정읍사〉는 ‘고려가요설’ 도 있으나, 본고에서는 〈정읍사〉를 한국 고시가로서 예시해 보았다. 그리고 여기 또 한 가지 간략히 부언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고금와카집》의 〈카나서〉[假名序]에서, 편자(紀貫之)는 신대神代, 즉 신화 시대에 ‘스사노오노미코토’[須佐之男命]라는 신神이 〈야쿠모〉[八雲]라는 와카를 지었다고 하는 엉뚱한 설을 내세웠다. 〈야쿠모〉는 다음과 같다. 음수율에 맞춰서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팔운(八雲)이솟는 이즈모[出雲]팔중(八重)담장 아내맞으려 팔중담장만드네 그팔중담장을 (필자 번역) 물론, 이와 같은 와카를 인간이 아닌 하늘나라의 신이 신화시대에 지을 수는 없는 것이고, 후세에 조작造作된 것이라고, 일본의 저명한 국문학자 히사마쓰 센이치[久松潛一](1894∼1976) 교수 등등이 논리 정연하게 지적하고20) 있어서 본고에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므로 왜나라에 최초로 문자를 가지고 간 박사 왕인의 〈난파진가〉는 일본 시가의 창시임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물론 일부 국수적인 일본 학자들이 〈야쿠모〉가 일본 시가의 효시라는 망발을 했던 일도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9)洪潤基 〈일본 和歌를 창시한 왕인 박사와 韓神歌〉(《現代文學》통권 506호1997.2,pp.378∼389) 10)《古今集注》(일본京都大學藏, 京都大學 國語國文資料叢書, 臨川書店, 1984.11.p.54) 11)洪潤基 〈日本詩歌と七五調音數律〉(金億と藤村の長編七五調定型四行詩), 《專修大學人文科學硏究月報》(第166號,1995.5.pp.35∼38) 12)《古事記》(서기 712년 편찬).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관찬 역사책. 《日本書紀》(서기 720년 편찬). 일본에서 두 번째로 편찬된 관찬 역사책이다. 그러나 ‘한국사’와 ‘중국사’ 등과 비교할 때 연대 기술이 최소한 60년 또는 120년 내지 603년 이상 각기 빠른 거짓된 기록으로서의 문제점을 갖고 있는 史書이다. 13)小倉進平 《鄕歌及び吏讀の硏究》(1929) 14)《古今和假集》(서기 905년 편찬) 15)《伊達本》 藤原定家(1162∼1241)가 12세기 말경에 原本 《古今集》을 필사筆寫한 책이며 일본 국보(1938.7.4.지정)이다. 16)洪潤基 〈일본 와카[和歌]를 창시한 왕인王仁 박사와 한신가韓神歌〉(앞의 논문,pp.378∼389) 17)高晶玉 《朝鮮民謠硏究》(首善社,1949.3.pp.50∼51) 18)洪潤基 《일본문화사》(서문당,1999,pp.221∼222,pp.240∼244) 19)《伊達本》 20)久松潛一, 《和歌史》(東京堂,1948.3,pp.330∼301), 折口信夫, 《折口信夫全集》〈제11권〉(中央公論社,1973.3,p.75) 3. 〈난파진가〉의 확고부동한 내용의 전본傳本들 왕인박사가 일본에서 최초로 5.7, 7.5조의 와카를 지었다는 사실은 《고금와카집》(905)의 필사본筆寫本으로서 권위 있는, 일본 국보國寶인 《다테본[伊達本]》(12세기 말경 필사) 등등이, 왕인의 시가詩歌 〈난파진가〉를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그 점을 굳이 강조하는 것은, 뒤늦은 일이지만 지금부터라도 ‘한국문학사’에 고대 일본에서 활약한 왕인의 시가며, 고대 일본에 살던 한국인들의 ‘제신가祭神歌’ 등등 각종 시가가 수록 평가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런 견지에서 왕인의 〈난파진가〉가 기록된 《고금와카집》의 고대 필사본 등 문헌文獻에 대한 사항들을 살피는 것은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라고 본다. 지금까지 우리 ‘한국문학사’에 왕인의 시가詩歌 등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며, 이유야 어떻든 저자 자신에게도 일단의 책임이 있다고 여기고 있다. 따라서 《고금와카집》의 대표적인 전본傳本인 《다테본》에 관한 사항 등부터 순차적으로 검토를 하기로 한다. 먼저 ‘구소카미 노보루’ 교수의 논술부터 살펴보자. “전본인 《다테본 고금와카집》은 ‘다테가’[伊達家]에 장구한 세월에 걸쳐 비장秘藏되어 왔던 귀중한 필사본으로서, 1938년 7월 4일에 국보(國寶)로 지정되었다”21) 또한 《슌세이본[俊成本] 고금와카집》은 《다테본[伊達本]》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전본傳本이다. 니시시타 게이이치[西下經一] 교수는 《고금와카집》의 전본傳本 들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고금와카집》의 전본의 종류는 매우 많다. 그중에서 중요한 것을 들어본다면 교정본校訂本으로서는 ‘사다이에본’[定家本](필자注:앞에서 왕인 박사의 시를 인용한 필사본인 《다테본[伊達本]》) 등 그 친본親本으로서의 《슌세이본[俊成本]》(필자注:역시 박사 왕인의 시를 인용한 필사본)이 있고, ‘신원어본’[新院御本]의 계통을 전하는 《가케이본[雅經本]》이 있으며, ‘오노황태후궁본’[小野皇太后宮本]의 계통을 전하는 《키요스케본[淸輔本]》과, 헤이안조[平安朝](794∼1192) 후기後期에 유포된 것으로 보이는 《간에이본[元永本]》 등이 있다. 이 다섯 책은 그 어느 것이나 완본完本이다. 그 밖에 단간斷簡(필자注:문서나 편지가 보관이 잘못되어 여기저기 흩어져 떨어져 나온 단편斷片으로 되어 버린 조각들)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는 ‘교우세이필절’[行成筆切], ‘혼아미절’[本阿彌切] 등등이 있다. ‘사다이에본’[定家本]이라고 하더라도 그 중에는 《테이오우본[貞應本]》, 《가로쿠본[嘉祿本]》 등이 있다. -중략- 이것들을 종種과 유類로 나누면 거의 20종 30류가 된다”22) 현재까지 고금와카집의 계통론 연구에 있어서는 니시시다 케이이치[西下經一] 교수의 《고금집 전본의 연구》와 쿠소카미 노보루[久曾神昇] 교수의 《고금와카집성립론》과 《고금와카집총람》 등이 권위서로서 평가되고 있다.23) 박사 왕인의 〈난파진가〉를 필사한 각 대표적 전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각 전본의 〈난파진가〉의 내용24) 《私稿本》 なにはつにさ くやこのはな 冬こもりいま ははるへとさ くやこのはな といへるなるへし 《基俊本》 なにはつにさく やこのはなふゆ こもりいまはは るへとさけやこ のはな といへるなるへし 《筋切本》 なにはつにさ くやこのはな ふゆこもりい まはゝるへとさ くやこのはな といへるなるへし 《元永本》 なにはつにさ くやこのはな 冬こもりいま はゝるへとさく やこのはな と云るなるへし 《唐紙卷子本》 なにはつにさ くやこのはな 冬こもりいま は春へとさく やこの花 といへるなるへし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왕인 박사의 시가인 〈난파진가〉(매화송)는 5.7, 7.5조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전형적典型的인 단가短歌의 율격律格으로서의 5.7.5.7.7의 음보율音步律을 보이고 있다. 이 단가인 와카[和歌]에서 제시한 ‘이 꽃’은 ‘매화梅花’를 가리킨다고 하는 게 원본에 해설로써 함께 표기되어 있다. 참고삼아 밝혀둔다면, 일본의 와카[和歌]란 ‘단가短歌’와 ‘장가長歌’ 그리고 ‘선두가旋頭歌’[세도우가] 등 ‘가체歌體의 시가詩歌’를 일컫는다. 전술前述한 《고금와카집》의 고대古代 필사본筆寫本인 국보 《다테본[伊達本]》이며, 《슌세이본[俊成本]》은 왕인 박사의 단가 〈난파진가〉를(다음과 같이) 서로 똑같은 내용으로 각기 해설하고 있다. 물론 다른 모든 전본傳本들도 한결같이 똑같은 내용이다. 먼저 《다테본》을 살펴본다.25) 이번에는 《슌세이본》을 살펴본다.26) 이상 쓴 사람의 붓글씨의 필체는 서로가 크게 다르나 두 내용은 똑같다. 즉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니와츠의 노래(난파진가)는 제帝의 어시御始이노라. 오오사사키노미코토[大雀命]가 나니와츠[난파진]에서 황자皇子로 불리우던 때, 동궁東宮을 서로 양보하고 위位에 오르지 않은 채 3년이 지나자, 왕인王人이라는 사람이 딱하게 여기면서 읊은 노래이노라. 이 꽃은 ‘매화梅花’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같이 《고금와카집》의 해설이 가리키는 것은, 오우진 천황, 應神天皇)이 서거한 뒤에, 태자(제5왕자)였던 우지노와키이라츠코[字遲能和紀郞子]와 그의 손위 형인 왕자 오오사사키노미코토[大雀命](제4왕자)가 서로 왕위에 오르기를 양보하면서, 왕위를 비워둔 채 3년을 지내게 되자, 태자의 스승이요, 왕실의 정무장관이었던 왕인 박사가 ‘오오사사키노미코토’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하면서, 〈매화송〉(난파진가)를 읊었다고 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시에 나오는 ‘이 꽃’은 ‘매화梅花’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왕인 박사가 오오사사키노미코토[大雀命]에게 등극을 권유한 것은, 황태자였던 우지노와키이라츠코[字遲能和紀郞子]가 요절했기 때문이다. 그 사실은 일본 최고最古의 역사책인 《고사기古事記》에, ‘우지노와키이라츠코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까닭에 오오사사키노미코토가 천하를 다스리게 된다’27)라는 기록이 보인다. 왕인 박사는 다른 모든 사람들을 제치고, ‘오오사사키노미코토’ 왕자를 새 임금으로 천거했던 것이다. 그 천거 방법으로써 왕인 박사 스스로가 시를 지은 것이 〈난파진가〉(매화송)임은 부연할 것도 없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1)久曾神昇 解題 《伊達本.古今和歌集.藤原定家筆》(風間書店,1961.10,p.7) 22)西下經一 《古今集の傳本硏究》(明治書院,1954.11,p.1) 23)奧村恒哉 《古今集.後撰集の題問題》(風間書店,1971.2,p.26) 24)久曾神昇 解題 《伊達本.古今和歌集.藤原定家筆》(風間書店,1988.12,p.34) 25)《伊達本》 26)《俊成本》 27)《古事記》日本古典文學大系1,倉野憲司 外(注,岩波書店,1958.6.p.255) 4. 고대 한국인에 의한 왜나라 정복론 고대 한국인들이 왜나라로 건너가, 그 터전을 정복한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토우쿄우 대학의 에가미 나미오[江上被夫](1906∼2002) 교수는 화제의 논저論著인 《기마민족국가(騎馬民族國歌》( 1967)에서 “고대 한국인 즉, 기마민족인 퉁구스계의 부여족扶餘族이 만주 땅에서 차츰 한반도韓半島로 남하南下하여 ’삼국시대‘를 이루게 된 것이고, 한반도 남부에 내려가서 살던 그 일부의 기마민족이, 고대 일본으로 건너간 ‘스진 천황’(숭신,崇神天皇, BC9 7∼BC 30 재위, 《日本書記》. ‘에가미 나미오’ 교수는 스진 천황을 서기 4세기 초엽의 인물人物로 보고 있다)이며, 그가 선주민들을 정복하고, ‘왜한연합왕국倭韓聯合王國’을 세웠는데, 이때 왕인王人 등 대호족이 ‘야마토연합정권[大和聯合政權]’28)을 구성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에가미 나미오 교수의 ‘기마민족 정복왕조설’을 거듭 밑받침하는 것이, 토우쿄우 대학 이노우에 미쓰사다[井上光貞](1917∼1983) 교수이기도 하다. “몽고인은 색목인色目人을, 만주국은 몽고인을 중용重用했던 것처럼, 천황씨天皇氏 자신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이주해 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와 같이 많은 귀화인들을 조직할 수 있었다”29)고 이노우에 교수는 지적하면서,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이 천황이 되었기 때문에 역시 한반도에서 왜국으로 도래한 사람들을 많이 중용重用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노우에 교수는 “문화가 발달한 백제 땅으로부터 수많은 관리며 기술자들을 초대해 온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사람들이 대륙이며 한국의 제도制度를 모방해서 만든 ‘후히토’(史, 필자 注: 고등행정 관리)며 ‘토모베’(品部, 필자 注: 행정부서)의 ‘토모노미야츠코’(반조伴造, 필자 注: 황실皇室 소유의 부部를 세습적으로 관리하고 통솔한 수장首長, 귀족貴族)가 되어 문화며 생산의 지도를 담당했다”30)고 한다. 그리고 여기 한 가지 첨가해 두고 싶은 것은 저명한 작가며 역사가였던 마쓰모토 세이쵸우[松本清張](1909∼1988) 씨가 고대 일본은 신라, 고구려, 백제의 삼국 분쟁 시대에, 고대 한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했다고 하는 것이다. “7세기의 ‘아스카[飛鳥]시대’라고 하는 것은, ‘야마토조정[大和朝廷]’ 이 성립되려고 하던 시기다. 이 시기는 나중에 오게 된 우수한 기술을 가진 한국인들이 합류되었기에, 문화가 강대强大해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과정은 한국문화를 흡수吸收한 것이 아니라, 본래는 서로가 똑같은 민족이었기에, 합류가 자연스러웠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한 가지 극언極言하자면, 일본은 한국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나라이다. 행幸인지 불행인지 ‘대마해협對馬海峽’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동란動亂(필자 注: 신라, 고구려, 백제의 분쟁 시기)이 일고 있던 때에 일본은 독립을 해서 보다 ‘일본적日本的’으로 되어 갔다. 일본적이라는 것은, 선주민족先住民族(필자 注: 아득한 옛날부터 일본에 먼저 와서 살던 종족)의 풍속을 살리면서 여기서 융합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과 같은 것이다”31) 이와 같은 일본고대사日本古代史의 권위 있는 학자들의 지적은 곧 고대 한국인들이 한때 일본을 정복했거나, 최소한 식민지 체제로서 일본을 지배한 사실을 입증한다. 왕인 박사가 왜국에 건너간 것은 백제의 근초고왕近肖古王(346∼375) 때이므로 4세기 후반이다. 일본사日本史에서의 오우진 천황[응신, 應神天皇](270∼310) 시대인 것만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본 역사에서의 오우진 천황의 실제의 집권 시기는 근초고왕과 비슷한 연대이므로, 60년의 연수를 아래로 내려서 따져야 한다. 그 점은 일본 사학계의 통설이기도 하다. 박사 왕인이 닌토쿠 왕조[인덕, 仁德王朝] 때, 왕도였던 오오사카[대판大阪, 難波津] 핵심지역에, 자신의 거대한 점거지占據地를 갖고 대호족으로서 또한 왕실의 정무장관으로 활약했거니와32) 이를 다시금 입증해 주는 것이 미즈노 유우[水野 祐](1918∼2000) 교수의 학설이기도 하다. 즉 “우리나라(필자 注: 日本)와 한반도와의 교섭에 있어서, 특히 백제와의 관계사, 오우진 천황[응신, 應神天皇]과 닌토쿠 천황[仁德天皇](필자 注: 오우진 천황의 제4왕자) 시대 이후에 관계사료關係史料가 두드러지게 많이 증가하고 있다. 이것은 오우진, 닌토쿠 천황의 인덕왕조仁德王朝는 ‘외래민족적外來民族的’ 세력의 침입에 기인해서 발생한 ‘정복왕조征服王朝’로서, 대륙적인 성격을 갖는 새로운 왕조라고 하는데서부터, 대륙의 사정에도 상세하고, 따라서 그 정세에는 민감하며, 특히 그 지배층이 ‘백제국가百濟國家’와 ‘동일민족계통同一民族系統’(백제왕은 부여족)에 속하며, 예부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데 기인하고 있다고 본다”33)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할 때, 왕인이 천거한 닌토쿠 천황은 한국으로부터 건너온 백제인 도래인이며,34) 그러기에 왕인의 시가詩歌 〈난파진가〉(매화송)의 성립도 완전무결한 역사적 배경마저 갖는 것이다. 〈난파진가〉(매화송)의 집필 시기를 서기 313년으로 필자가 《현대문학》(1997.2)에 발표한 것은, 어디까지나 과장된 《일본서기》의 닌토쿠 천황의 등극년(서기 313)을 따라 준 것이었음을 굳이 여기에 밝혀둔다. 따라서 사실상의 집필 연도는 서기 405년으로 보는 게, ‘한국사’ 등과 한일 역사 관계를 비교해 볼 때 가장 타당한 것임을 지적해 둔다. 또한 〈난파진가〉(매화송)에 관해 부기해 둘 사항이 있다. 일본의 시가詩歌 문화文化가 한창 꽃피던 헤이안[平安](794∼1185) 시대에는 역대 천황들도 ‘연초 궁중 시낭송회’[歌會始]에서 왕인의 〈난파진가〉를 낭송한다. 스스로 지은 자작시 ‘와카’를 낭송했으며, 와카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난파진가〉는 ‘아버지의 노래’[父歌]로서 표본을 삼았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서예의 붓글씨[手習]의 표본으로도 역시 〈난파진가〉를 습득했다. 18세기 일본에서도 그 당시 저명한 시문학자였던 에무라 홋카이[江村北海](1713∼1788)가 그의 목판본木板本(1771) 저서 《일본시사日本詩史》의 모두(卷之一)에서 백제의 박사 왕인王仁의 일본 최초의 와카[和歌]인 〈매화송梅花頌〉 즉 〈난파진가難波津歌津〉와, 왕인에 관해 다음처럼 밝히고 있다. “역사를 살펴볼 때, 오우진[應神] 천황(필자 注: 4∼5C) 15년에 백제국百濟國의 박사 아직기[博士阿直幾]가 내조來朝하였고, 《주역》, 《논어》, 《효경》 등의 책을 바쳤다. 왕은 기뻐하며 ‘아직기’로 하여금 ‘경經’을 왕자들에게 가르치게 하였다. 우리나라의 경학經學은 이와 같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뒷날 아직기는 왕인王仁을 추천했다. 왕은 즉시 백제왕에게 편지하여 왕인을 부르게 되었다. 왕인이 도착했다. 아직기와 마찬가지로 여러 왕자들을 가르쳤다. 왕이 붕어하고 닌토쿠[仁德] 천황이 즉위(필자 注: 서기 405년)하여 나니와(필자 注:難波, 현재의 오오사카)에 천도했다. 왕인은 〈매화송梅花頌〉을 지어 바쳤다. 이른바 31언(三十一言, 필자 注: 글자가 31자라는 것이고, 흔히 ‘미소히토모지’라 하여 ‘三十一文字’로써 표기해 왔음)의 ‘와카[和歌]’라는 것이로다” 이와 같은 것으로도 ‘왕인이 일본 최초의 와카를 5.7, 7.5조로 지었다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일본 근대의 대표적인 언어학자 ‘카나자와 쇼우사브로우’[金澤庄三郞](1872∼1967) 박사는 일찍이 1902년에 《日韓兩國語同系論》(일한양국어동계론)을 써서 이름났거니와 그는 당시 일본의 대표적 국어사전 《廣辭林》(1925,p.1455)에서, ‘왕인 박사의 〈난파진가〉(매화송)를 싣고, 이 노래가 서예를 배우는 아이들이 가장 먼저 익혀야 할 와카라는 것’ 등을 상세히 밝혔다. 그러나 현대 일본의 국어사전에는 ‘나니와츠’[難波津] 항목에서 왕인의 시와 그에 얽힌 내용을 언급 내지 설명하고 있지 않다. 필자(홍윤기)는 30여년 전에 고서점에서 왕인의 〈난파진가〉(매화송)를 찾아낸 뒤로, 왕인을 찾아 오랜 세월 일본 땅을 헤매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동안 찾아낸 왕인에 관한 여러 가지 일본 ‘고대 시편’ 등도 앞으로 논증 발표할 것을 여기 적어둔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8)江上波夫 《騎馬民族國家》(中央公論社,1982.1,pp.194∼202) 29)井上光貞 《日本國家の起源》(岩波書店,1960.4,pp.189∼190) 30)井上光貞 《日本國家の起源》(岩波書店,1960.4,p.214) 31)松本淸張 〈東京新聞〉(朝刊,1972.4.1) 32)平野邦雄 《日本歷史》(岩波書店,1962.6,p.92) 33)水野 祐 《日本國家の國家形成》(講談社,1978.4,p.199) 34)홍윤기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효형출판,2000.3,pp.15∼95) |
| 문학박사 홍윤기洪潤基 *1959.4. 《현대문학》(박두진 추천, 〈석류사초〉(1958.8), 〈비둘기〉(1959.2), 〈신령지의 노래〉(1959.4), 3회 추천 완료) *1959.1 〈해바라기〉(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심사위원-김광섭, 박목월, 김용호, 서정주 공동심사) *제26회 월탄문학상 수상, 제9회 한국문학평론가협회 문학상 수상, 제24회 한국문학상 수상.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졸업, 일본 셴슈우대학 대학원 국문과 문학박사 (〈韓日詩歌의 音韻비교 연구〉), 일본 셴슈우대학 겸임교원(한국어문학 담당교수),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어연수평가원 교수, 단국대학교(일본 센슈우대 자매대학) 대학원 초빙교수, 단국대학교 일본연구소 연구·자문위원, 한국외국어대학교 《한국시작품론》 담당교수,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과 석좌교수 *저서: 《한국현대시 이해와 감상》(한림출판사.1987), 《한국명시》(예림당.1989), 《시창작법》(한림출판사.1992), 《한국 현대시 해설》(한누리미디어.2003), 제1시집 《내가 처음 너에게 던진 것은》(거목.1986), 제2시집 《수수한 꽃이여》(문학세계사.1989), 제3시집 《시인의 편지》(명문당.1991), 《일본문화사》(서문당.1999), 《일본문화백과》(서문당.2000), 《일본속의 한국문화유적을 찾아서》(서문당.2003),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효형출판.2000), 《일본의 역사왜곡》(학민사.2001) *논문: 〈韓國近代詩とその詩史的背景考〉(일본 센슈우다 《인문과학연보》(1993.3), 〈75조 詩歌에 대한 考察〉(한국외대 대학원, 《일본근대문학》 회지(1996.3), 〈韓日詩歌の七五調論〉(단국대, 《일어일문학》 회지(1997.5), 〈일본 와카[和歌] 창시한 왕인박사와 한신가韓神歌〉(《現代文學》(1997.2월호), 〈일본 천황가 연구〉(《月刊朝鮮》(1998.1∼7월호 연재), 〈한일동족설 신연구〉(《新東亞》 1999.10∼12월호 연재), 〈神樂歌の韓神と園神〉(檀國日本研究學會誌, 2000.10), 〈신라 神道연구〉(《新東亞》, 2002.2월호), 〈일본 천황가의 한국신 제사와 황국사관 고찰〉(《日本學研究》(단국대일본연구소, 2002.10) |
▲《한국 현대詩 해설》(한누리미디어.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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