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경 자
《수필문학》천료 등단,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장권한대행,
한국문인협회회원(감사역임) 한국수필문학가협회 고문,
신일교회(예장) 은퇴권사
| 리스본행 야간열차 격변기의 사회에서, ‘동지’, ‘신념’이란 용어는 특히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간직하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낱말이다. 이 세상을 살면서, 누군들 신념 없는 사람이 되고 싶겠는가. 든든한 동지와 함께라면 힘든 세상을 살아가기가 한결 수월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좋은 동지’를 갖고 싶기도 하고,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든든한 동지’이기를 바라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소용돌이치는 근현대 역사를 헤쳐 나오는 동안, 어쩌면 이 좋은 낱말들이 특정 집단의 부정적 이미지로 각인된 부분은 없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 시간을 메꾸어야 할 상황이 생겨, 시간을 보내기에 매우 적당한(?)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찾아간 영화관도, 영화도 ‘둘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는데, 제목이 어쩐지 낭만적일 것 같은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선택했다. ‘포르투갈’을 못 가서 안달이던 차에 그 목마름도 좀 덜 것 같고, ‘야간열차’가 어딘지 모르게 구미를 당기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 영화는, 평범한 남자가 평화롭게 간단한 아침을 먹던 중 무심히 창밖을 내다보다가 놀라 뛰쳐나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인 그 남자는 자살하려는 여자를 구하려다 놓치고, 그 여인의 빨간 코트를 집어 든 채, 다소 늦은 출근을 한 고등학교 교사다. 허둥대는 선생님의 이상한 모습에 어리둥절한 학생들 앞에서, 의연한 척 수업을 시작하지만, 이내 또 그 여인의 모습이 멀리 보이자 교실을 빠져나와 그 코트를 움켜쥐고 뛰기 시작한다. 그 여인 대신 얻게 된 책 한 권을 코트와 함께 들고, 그 책의 주인이었던 여인의 행적을 찾기 위해 서점을 찾아간다. 엊그제, 어느 여인이 사 갔다는 것, 출판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주는 책방 주인을 뒤로한 채 그 진원지를 찾아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 책에 나오는 사람들의 행적과 그들을 찾아 증언을 듣는 형식으로 짜인 영화는 리스본과 포르투갈 바다의 경관을 후원 삼아 볼거리도 제공하며 야릇한 긴장감을 더해 가면서 관객을 끌고 가는 데 성공한 편이다. 포르투갈의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 줄거리는 역시 젊은 학생들의 활동을 주 내용으로 하면서 그들의 애증 어린 과거를 훑어가는 형식이다. 동지를 지키기 위해 손가락이 무참히 잘린 피아니스트, 그는 깨진 꿈을 가슴 속 깊이 묻고 절망의 삶을 살다가, 이제 늙고 병들어 양로원에 수용되어 있다. 그의 조카딸이 호기심에 찬 이 방문객을 안내하다가 사랑이 싹터 끝내 주인공은 리스본발 야간열차에 몸을 싣지 못한다. 그 책의 저자는 민주화 운동의 동지 중 한 사람이고, 또 한 사람의 동지는 저자에게 애인을 뺏기자 분을 참지 못하고 그들을 떠난 후 무엇을 하고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골초가 되어 폐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살아간다. 책의 저자는 의사가 되어 자신들을 고문하고 동지들을 괴롭히는 형사 ‘리스본의 악마’가 사경에 처하자, 위기에서 목숨을 살려내는 의사의 소임을 다한다. 그 일로 동지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또 다른 면으로 힘든 세월을 살다가 지병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 오빠의 한을 가슴에 대신 묻은 여동생이 평생 자신의 내면에 박제된 오빠의 환상을 위해 책을 엮어내고 역사를 전한다. 극히 적은 부수의 한정판을 냈건만 스위스의 서점에서 그 악마의 손녀딸이 우연히 그 책을 손에 넣게 된다. 읽다가 양심의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어 강에 몸을 던지려다가 이 주인공에게 발견되어 목숨을 건진 것이다. 두 동지의 애인이었던 운동권의 전설적 여인을 경관 좋은 바닷가 별장에서 만난 주인공은 실타래를 다 풀기는 했으나, 유일하게 건강한 노년을 보내는 그를 보면서 착잡하고 묘한 기분을 안고 귀국을 결심한다. ------------------------------- -. 리스본역에서 여인의 은유적인 사랑 고백, 가지 말라는 말보다도 ‘안 가면 안 되겠느냐’는 속삭임에, 마냥 허공을 보며 서 있던 그 남자가 사랑스러우면서도 인상적이다. -.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신념이 무엇이고 동지가 무엇’인지, 그리고 ‘인생에게, 사랑은 어떤 의미와 무게를 지닌 것’인지 등의 화두를 던져주는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한 편을 뒤로하고,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마음이 형언하기 어렵게 복잡하면서, 한편 미소를 짓게 한다. -. 한세상 살아오면서 뜨거운 동지애를 느끼는 그런 동지가 되어 본 적이 있는가? 신념을 위해 목숨이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직면했던 기억이 있는가? 둘 다 아니다. 소신에 따라 앞장선 일은 많지만, 그 일로 목을 내놓아야 하는 지경까지 몰려 본 적은 없다. -. 왜, 여자라고 차별받아야 하느냐 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일에 열을 올린 것도 불꽃이라 할 수 있겠지만, 불꽃 같았던 기억은 어느 구석에도 없는 인생이었다. -. 사랑은? 그 또한 가슴을 불태워 본 기억이 없다. 독신주의를 좀 고집하다가 이내 꺾이고, 남들처럼 한 남자 만나서 애 낳고 한 가정의 중심으로 그냥 열심히 살아왔을 뿐이다. 어미로 충실하려 애썼고, 아직은 대과 없이 살아온 셈이다. 남편을 연전에 먼저 떠나보낸 후 새삼스럽게 그리움에 떠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일는지 모르지만, 남편이니 소중했고 서로 둘밖에 모르며 아웅다웅 살아왔다.(《있어 거기 내가》(오경자,2014, 교음사-수필문학사 수필선집 546)(문맥 구성 중 일부분 윤문潤文했음을 밝힙니다) ------------------------------------ 〈영화는 인생의 축도이며 한 시대의 기록〉 ‘영화映畫’는 우리 인생사의 축도縮圖이다. 영화 속에서, 바로 내가 그 주인공이 되고 거기 바로 내가 있기에, 함께 웃고 울고 한다. 이렇게 영화는 그 시대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기에, 역사의 기록자이기도 하다. 아울러 시사성과 선도적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기에(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서) 더욱 사랑받는다.(‘작가의 말’ 중에서 부분 발췌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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