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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 수상록

플리머스 정착촌 탐방기 / 《한강문학》 43호 고흥 향토사학자 이상완의 해외문화 이야기④

작성자이혜경|작성시간26.06.16|조회수98 목록 댓글 0

플리머스 정착촌 탐방기
              - 메이플라워호를 탄 사람들

 

                                                                       월산  이 상 완
            https://m.blog.naver.com/swlee8585/221245467335

 

 

 

플리머스 400년전 정착촌을 탐방하다

 

▲ 프롤로그
세상은 넓다는 말도 있지만 미국 자체도 땅덩어리가 너무나 커서 또 하나의 넓은 다른 세상을 이룬다.
지난해 미국에서 5개월 체류하는 동안에 나는 주로 미국의 동부인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대부분을 머물렀다.


올해 1월 초, 작은 딸 비니닥이 초산으로 득녀를 하고, 또 뉴욕대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다 마쳐서 오는 5월 10일 학위수여식(졸업식)이 있다는 두 개의 경사가 겹쳐서, 나는 부랴부랴 서둘러 앞당겨서 지난 3월 24일에 뉴욕을 거쳐서 커네티컷 주의 수도인 하트포드에 와 있다. 
집사람은 3개월 전에 이미 와서 1월 초에 갓 난 손녀 ‘아린’이를 돌 보고 있다. 
작은 사위 ‘제이닥’이 다니는 회사, ‘UTC’가 바로 이곳 하트포드 인근인 파밍톤에 있기에 지난해에도 뉴욕에서 4개월 머문 후에 이곳 커네티컷 주에 와서 1개월가량 체류했었는데, 올해는 2개월가량 더 머물 예정이다.

이곳 하트포드는 뉴욕과 보스톤의 중간쯤의 거리에 있다. 자동차 편으로 뉴욕이나 보스톤에서 오려면 약 2시간 반쯤이 소요되는 거리에 있다.
내가 25년 전에 하와이에서 살 때, 아는 지인이 “코네티컷에 산 적이 있다”며, 그곳 얘기를 자랑삼아 들려주어서 그때부터 커네티컷의 지명을 알고 있었고, 언젠가 미국 본토에 가게 되면 꼭 “그곳에 한번 가 봐야지”했는데, 작년에 이어 두 번이나 이곳에 체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그 지인도 이곳을 말해 주면서, “코네티컷이라는 지명은 우리말과 연관이 있는 것 같다”고 했었다.
그의 말인 즉 ‘코네티컷’은 우리나라 말인 ‘고운 냇가’와 뜻이 같고 그 발음도 유사하다는 것이다. 혹, 그렇다 치자. 그러나 우연히 일치된 단어 몇가지 사례를 가지고, 우리말과 인디언 언어, 양자 사이에 필연성이 있다고 주장하거나 그렇게 단정하는 것은 너무나 억지이고 무리이다.
나는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해서인지 언어(단어)와 대상 사이에는 자의성이 있는 것이지, 결코 필연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이곳에 와서 코네티컷(Connecticut)의 어원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원래는 아메리카 인디언 한 부족의 말이었고 그 뜻은 ‘큰(긴) 강변이 있는 냇가’라고 한다.
그러니까 억지를 쓰자면 ‘큰 냇가가 코네티컷이 된 것’이라고 그 지인은 생각하나 보다.ㅋ
이곳 교민 중에도 이렇게 제법 논리적으로 억지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심정은 이해가 간다.

현재의 코넥티컷(Connecticut)은 원래 인디안 말인 ‘퀸네툭컷’ (Quinnehtukqut)에서 변음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퀸(Quin)은 우리말 ‘큰 또는 긴’이고, 네(neh)는 우리말 ‘냇’이고, 툭(tuk)은 우리말 ‘터 또는 뚝’이고, 컷(qut)은 우리말 ‘곳’이라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곳 커네티컷 주 당국의 인터넷 홈페지에도 주 명칭인 코넥티컷(Connecticut)은 원래 토착 인디안 모히간(Mohegan)의 말인 ‘quonehtacut long tidal river’, 퀸네툭컷(Quinnehtukqut)에서 유래되었으며, 그 뜻은 ‘Long River Place’(긴 강터)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마 그래서 이것을 근거로 조국애와 애국심이 투철한 교포가 ‘코네티컷’의 어원이 우리말 ‘큰 냇가 터 또는 긴 냇가 터’에서 온 것이라고, 그리고 아예 덧붙여서 ‘고운 냇가’라고 제법 현학적인 객기를 부린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아메리카 인디언의 일부는 한반도에서도 왔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아마도 그 분은 미국 아메리카 인디안들이 먼 옛날 빙하시기에 아시아 대륙에서 베링을 건너서 온 몽고족이었다는 설을 믿고, 그 몽골족 속에는 일부는 한반도에서 온 사람들이고 그들의 후손들이 이 ‘코네티컷’에 거주하게 된 것이라고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뉴욕에 살고 있는 한 교포는 뉴욕의 맨하탄(Manhattan)도 어원이 한국말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헉!
‘맨하탄 섬’이 인디안 언어로 "만나 하타(Mannahatta)"인데, 그 뜻은 ‘언덕이 많은 섬’, 또는 ‘땅이 많은 섬’(Island of many hills)이어서 우리말 “만흔타> 만흔 따> 많은 땅”과 비슷하다고 하면서, 아마도 〈맨하탄〉은 어원이 우리말일거라고 주장한다.ㅋㅋㅋ
그리고 우리말에서 <땅>은 <따 또느 타>라고도 했다고 곁들여 주장한다. 하기야 천자문에서 하늘천, 따지(地)할 때, 땅지(地) 또는 따지(地)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따>는 <땅>을 뜻한다.
그래서 맨하탄에서 <탄>은 <땅>을 의미한다는 것이다.ㅋㅋㅋ

하기야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등 나라 이름 끝에 <탄>은 <땅/ land or place>을 말한다고 어느 파키스탄 사람한테서 직접 나도 들은 적이 있다. 그래서 <파키스탄>은 <깨끗한 땅/Pure Land>이라는 말도 들은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아무튼 애국심과 조국애는 많을 수로 칭친받아야만 하지만 이런 설명을 만약에 미국인들이 들은다면 콧방귀를 날리며 배꼽잡고 크게 비웃지나 않을까 싶어 솔찬히 걱정이 된다.
어쨌든 이곳에 사는 한인 교포들에게는 하트포드를 가로 질러서 흐르는 아름다운 <코네티컷> 강 (Connecticut River)을 보면서 고국에 두고 온 고향산천을 그리다가 아마도 <고운 냇가>가 생각이 나니까 <코네티컷>이 그렇게 생각하며 그런 변음이 떠 올랐을 것이다.
그래서 <큰 냇가>나 <고운 냇가>가 <콘냇카>나 <코운냇카>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코네티컷>이 되었다고, 애국심과 조국애가 깊은 교포들 중에는 이따금 이곳을 방문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조차 자주 그렇게 우수게(?)로 주장하는 사람이 생겼을 것이다.

나는 미동부 지역인 <뉴 잉글랜드> 지역을 여행했었다. 특히 플리마스에 있는 <플리마스 정착촌>, <플리마스 바위>, 그리고 초기 개척민들의 묘지인 <베리얼 힐/Burial Hill>도 방문했었다.

플리마스를 포함해서, 미국에서 <뉴잉글랜드> 지역이라 지칭하는 곳은 지금부터 400여년 전부터 영국에서 맨 처음으로 개척지로 눈독을 드렸던 동부지역을 말한다.
그러니까 현재 동부에 있는 6개 주들이 모두 뉴잉글랜드 지역이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메인(Maine)주, 버먼트(Vermont)주, 뉴햄프셔(New Hampshire)주, 코네티컷(Connecticut)주, 매사추세츠(Massatsusets) 주, 로드아일랜드(Rhode Island)주를 말한다.

▲ 미국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역 지도

지금부터 약 400년 전인 1620년에 메이플라호를 타고 영국의 플리머스 항구를 떠나 이곳에 와서 플리머스 몽돌 바위를 딛고 처음으로 미국 땅에 상륙했던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순레자로 자처했다.
그리고 이곳을 처음에는 <뉴 플리머스/ New Plymouth>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러다가 <뉴/New>를 떼어버리고 간단히 <플리머스/Plimoth>라고 했다. 그래서 지명으로 <플리머스>는 떠나왔던 영국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게 되었다.
그런데 17세 영어는 아직 표준어나 철자가 우왕좌왕 하던 시기라 당시 정착촌 생활을 잘 기록해 두웠던 윌리엄 브래포드의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의 역사>라는 기록물에는 Plymouth가 아니고 철자가 Plimoth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플리머스는 자기 이름의 철자와는 관계없이 다만 대서양 연안인 바닷가에 평화롭게 자리잡고 있었다.

인터넷 네이비의 안내에 따라 플리마스 플랜테션(Plymoth Plantation)을 손쉽게 찾아 들어 갔다. 
정문 앞에는 수 천대가 주차할 수 있는 넓은 주차장이 있었고, 그 주변의 낮은 언덕은 아름들이 키다리 소나무 숲이 삥 둘러 서 있어 주차장은 그저 아늑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자아내며 그저 저 혼자 여유로운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일단은 주차를 해 놓고 주차장 뒷켠에 마련된 휴식 공원에서 잠시 한숨을 돌리며 휴식을 취하다가 집 사람이 마련해 온 김밥 등 간단한 음식으로 점심 겸 요기를 떼웠다.
그리고 나서 드디어 400년 전에 영국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라는 범선을 타고 이곳에 와서 정착촌으로 자리 잡았다는, 그러니까 미국이 독립되기 전에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그 유명한 "역사적 장소"에 들어가기 위해서 매표장에서 입장권을 4장 산 후에 우리나라 솟을 대문같은 게이트 안으로 들어 섰다.
나는 작년에 이 6개 주에서 절반인 매사추세츠, 로드 아일랜드, 코네티컷 3개 주는 이미 여행을 했었다. 나머지 3개 주인 메인, 버몬트, 뉴햄프셔는 앞으로 50일간 더 코네티컷에 머무는 동안에 사정이 허락하면 한 바퀴 휙하고 들려 보았으면 한다.

지난 해에는 뉴욕에서 로드 아일랜드 주에 들렸었다. 맨 먼저 뉴헤이븐(New Haven)을 가쳐서 미스틱 타운(Mystic Town)에서 그 유명하다는 '미스틱 피자'도 먹어 보았다.
바로 이곳 미스틱 항구에는 1620년에 영국 청교도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이메리카로 올 때 102명이 타고 왔다는 메이플라워호를 그대로 본 따 만든 <메이플라워 2호>가 원래 전시장이었던 플리마스 항구의 워터프론트 부두를 잠시 떠나서 이곳에 와 있다 한다.
그 배는 2020년, 메이플라호의 미국 상륙 4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에 등장했다.

<메이플라워 2호>는 복구 작업을 하기 위해서 2년 전에 미스틱 씨포트 조선소에 와서 지상에서 완전히 해체를 당한 채 지금 복구 작업이 한창이다. 늦어도 2019년에는 플리머스 제자리로 돌아가서, 400주년 기념행사 때에는 새로 단장한 모습으로 폼잡고 하객들을 맞는다고 한다.

아무튼 시간이 없어서 조선소 현장을 들리지 못하고 다만 아쉬움을 남긴 채 다음 행선지인 뉴포트로 향했다.



▲ 현재 복구 작업중인 메이플라워 2호(미스틱 씨포트 조선소)


그리고 18세기에 미국 부자들의 여름철 호화 별장지대인 뉴 포트(Newport)에서 해운왕 겸 철도왕이라고 불리웠던 당시 미국 제일 부자였던 빈더벨트 가문의 별장인 <마블 하우스/ Mable House>와
<브레이커스 별장/ Breakers>도 구경했었다.
그리고 저녁 때 쯤에는 매사추세츠 주로 들어가서 폴 리버(Fall River) 타운에 있는 하얏트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1박을 했다.
다음 날인 9월 5일에는 짐을 꾸려 오전 10시 경에 폴 리버를 출발해서 톤턴(Taunton)을 거쳐 오전 11시 경에 여행의 목적지인 플리머스(Plymouth)에 도착했다. 

플리머스(Plymouth)!
인구 약 6만명이 살고 있는 아담하고 아름답고 운치있고 정겨운 해안 도시였다.





▲ 플리머스 개척 식민지에 도착한 청교도들 모습




지금부터 약 400년 전인 1620년에 메이플라호를 타고 영국의 플리머스 항구를 떠나 이곳에 와서 플리머스 몽돌 바위를 딛고 처음으로 미국 땅에 상륙했던 청교도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순레자로 자처했다.
그리고 이곳을 처음에는 <뉴 플리머스/ New Plymouth>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들은 그러다가 <뉴/New>를 떼어버리고 간단히 <플리머스/Plimoth>라고 했다. 그래서 지명으로 <플리머스>는 떠나왔던 영국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게 되었다.
그런데 17세 영어는 아직 표준어나 철자가 우왕좌왕 하던 시기라 당시 정착촌 생활을 잘 기록해 두웠던 윌리엄 브래포드의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의 역사>라는 기록물에는
 Plymouth가 아니고 철자가 Plimoth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플리머스는 자기 이름의 철자와는 관계없이 다만 대서양 연안인 바닷가에 평화롭게 자리잡고 있었다.

인터넷 네이비의 안내에 따라 플리마스 플랜테션(Plymoth Plantation)을 손쉽게 찾아 들어 갔다. 
정문 앞에는 수 천대가 주차할 수 있는 넓은 주차장이 있었고, 그 주변의 낮은 언덕은 아름들이 키다리 소나무 숲이 삥 둘러 서 있어 주차장은 그저 아늑하고 평화로운 분위기 자아내며 그저 저 혼자 여유로운 공간을 확보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일단은 주차를 해 놓고 주차장 뒷켠에 마련된 휴식 공원에서 잠시 한숨을 돌리며 휴식을 취하다가 집 사람이 마련해 온 김밥 등 간단한 음식으로 점심 겸 요기를 떼웠다.
그리고 나서 드디어 400년 전에 영국인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호라는 범선을 타고 이곳에 와서 정착촌으로 자리 잡았다는, 그러니까 미국이 독립되기 전에 "영국의 식민지"였다는 그 유명한 "역사적 장소"에 들어가기 위해서 매표장에서 입장권을 4장 산 후에 우리나라 솟을 대문같은 게이트 안으로 들어 섰다.






▲ 플리머스 야외 역사 박물관 게이트


알고 보니 이곳은 사실상 "플리머스 야외 정착촌 역사 박물관"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 안에는 17세기 영국인 정착촌, 방문객 센터, 왐파네오그 인디안 옛마을, 공예제작실, 나예 (Nye) 곡간 등이 옛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서 함께 들어 서 있었다.
성인은 입장료가 28달라인데 나와 집 사람은 60세 이상이어서 경노 대우를 받아 각각 26 달라를, 작은 딸 커플은 각각 28달라를 지불했다.
약간 비싸다는 생각도 일순 들었지만 애써 그런 생각을 얼른 지우고 마음 편하게 구경이나 잘하고 이 참에 미국의 초기 식민지 시대에 대한 산 역사 공부나 나름대로 잘 챙겨보고, 그간 읽었던 미국 역사책에 대한 생각들이라도 일부나마 나름대로 정리해 보고자 미음 먹었다.

드디어 "플리머스 야외 정착촌 역사 박물관"의 한국식 솟을 대문을 방불케 하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 섰다.
주차장과 게이트는 정착촌 뒷쪽의 낮은 언덕 위에 마련되어 있어서
게이트를 들어서자 눈 아래 단박에 정착지 일대가 쏙 들어 왔고 곧장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숲속 길이 훤하게 뚫여 있었다.
그 길을 계속 따라계속 가니 붉은 색 기와 자붕을 이고 있는 현대식 건물이 쌩뚱맞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 플리머스 개척 식민지에 도착한 청교도들 모습


바로 이곳이 방문객 센터(Visitor Center)란다.
안내판을 자세히 보니 정식 명창은〈헨리 혼블로어 뱡문객 센터(Henry Hornblower Visitor Center)〉라고 한다.
그런데 우우웽! 헨리 혼블로어? 이 사람은 누구지? 혼블로어(Horn + blower)라면 옛날 영국에서 장원제도가 한창일 때 농장에 일하러 가자고 일꾼들을 뿔 고동(Horn)을 불었던 사람(Blower)을 말하며 그런 사람이 자기 성을 아예 ‘뿔고동 피리 부는 가문’으로 삼고 싶어 아예 성을 혼불로어(Hornblower)했다는 설화가 있는데, 바로 그런 가문의 후손과 이 <플리머스 프랜테이션>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나에겐 낯선 이름이라 안내 요원에게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친절하게 이렇게 잘 설명해 주었다.

▲ 헨리 혼블로어(Henry Hornblower)
그는 이곳 플리머스에서 64Km 떨어진 보스톤에사 1917년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는 특히 여름철에 이곳에서 매년 여름철을 보냈다고 한다. 
그 소년의 이름이 헨리(Henry)이고 성이 바로 혼블로어(Hornblower)였다.
이 소년의 집안 사정이 부유해서 그는 매년 이곳에 여름 별장이 살다시피 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무척 좋아했고, 지적 호기심도 매우 강했다고 한다. 
특히 플리머스에 얽혀 있는 옛 식민지 시절의 필그림 조상들의 스토리에 관심이 많아서 그는 마침내 1941년에 하바드 대학에 입학해서 미국 역사와 고고학을 전공하기까지 했다.

하바드를 졸업하고 한 때는 가업을 이어 주식거래 중계업을 하다가 도중에 잠깐 쉬고 플리머스 지역 일대의 유적지와 유물들을 탐색하는 작업에 앞장 서서 뛰어 들었다.
그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귀국했을 때 부자인 아버지를 설득하여 무려 2만 달라를 기증받아 옛 정착촌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삼아 1947년 30세가 되던 해부터 친지와 사업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플리머스 유적지 복원사업을 하는 플리머스 협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흔적이 점차 사라저가는 플리머스 식민지 시대의 정착촌을 1620년대의 모습으로 그대로 재현시키겠다는 복원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꿈은 어떻게 하면 1620년대 플리머스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 왔던 필그림 조상들의 정착촌 모습을 그대로 재현시켜서 미국 후손들에게 어떻게 하면 실감나게 잘 여 줄 수 있을까를 늘 고심하였다.
그는 특히 필그림(청교도) 조상들의 용감스러운 개척정신과 당시 이웃인 인디안들과 초기 50여년간 서로돕고 잘 어울려 살던 평회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곳이 첫 ‘추수감사절의 탄생지’라는 것도 미국인들에게 그리고 후손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드디어 41세가 되었던 1958년에 그의 꿈은 실현되기 시작했다. 우선 플리머스 항구의 해변가에 정착촌 오두막집 두 채를 지었고 그 옆에는 방위용 요새도 건설했다. 그리고 1957년에는 복제된 메이플라워 2호도 건설계획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1959년에는 1627년 당시의 정착촌 모습을 거의 100퍼센트 재현시키는 <17세기 영국인 정착촌 마을>을 건설했다.
그리고 1973년에는 정착촌 근처에 아메리카 원주의 옛 마을 터에 왐파노아그 원주민 촌도 실감나게 건설하였다.
이처럼 헨리 헌블로어는 <17세기 식민지 정착촌> 복원사업에 열중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심장마비로 타계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67세였고 때는 1985년이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던 사람들은 타계 2주년을 맞아 그를 추모하기 위해 기념관을 지어 헌정했다.. 바로 그 때의 건축물이 우리 일행을 맞아 준 <방문객 센터>이다.
바로 이 센터의 원명(Henry Hornblower Visitor Center)이 <헨리 혼블로어 방문객 센터>이기도 하다.
조상이 비록 영국에서는 일꾼들을 불러 모으는 하찮은 고동뿔 부는 사람이었지만, 아마도 영국에서 개척 이민으로 왔고 그의 후손인 헨리는 자기 조상이 미국에 처음 와서 살았던 흔적을 복원시켰던 효자 후손이었나 보다. 아니 현 미국인들에게도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준 애국자요 문화 애호가 였었다.

이 방문객 센타 안에는 바로 박물관 숍도 있고 영화관도 있고, 간이 식당도 있다. 일부 그룹이나 단체가 세미나를 하거나 연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간단히 결혼식을 올릴 수 있는 예식장도 있다.
방문객 센터안에는 모형 메이플라워가 당시 탑승한 사람들의 복장, 옷장, 탁자, 생선잡이 갈대덫, 칫솔 등 유품들과 함께 마치 소형 박물관 처럼 가지런히 정돈된 채 잘 꾸며저 있었다.


▲ 인디안 왐파노아그 족의 웨투 집


우리 일행은 방문객 센타를 나왔다. 곧장 아치형의 숲을 이루는 길을 따라가니 인디안 원주민 촌인 왐파노아그(Wampanoag) 족의 복원된 마을이 나타났다.
참나무 껍질과 갈대 줄기로 만들어진 회색빛의 오두막 집들이 마치 북극지방의 얼음집인 이글루(igloo)처럼 보였다. 인디안들은 이런 집을 웨투(wetu)라고 부른다고 했다.

아마도 왐파노아족의 조상들이 먼 옛날 아시아 대륙에서 살다가 빙하시대를 맞아 베링해협을 넘어서 아메리카로 이동해 오는 동안에 어떤 떄는 이글로 얼음집에서도 살다가, 더 남하하여 플리머스 지역에 와서는 갈대를 이용하여 이글로 비슷하게 집을 지은 것이 웨투 오두막집으로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 인디안 왐파노아그 족의 집 내부 모습


인디안 촌에는 이런 여러 채의 오두막 집들이 여기저기 옥수수밭이나 채전밭 속에 박혀 있었다.
일부 오두막 집에는 원주민 복장을 한 사람들이 17세기에 실제 생활하고 있던 모습대로 연기를 하며 재현시키고 있었다.
집 문 밖에서도 원주민 아낙네들이 채전을 가꾸기도 하고 빨래한 옷들을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걸어서 말리기도 했다.
어떤 오두막 웨투 집에서는 원두막 중앙 안에 땔감으로 불을 피우며 그 위에 작은 가마솥이나 큰 냄비 같은 것을 중간에 세로로 매달린 걸이에 걸어서 요리를 하고 있었다.



▲ 통나무배를 만드는 모습


집안 면적은 작은 것은 우리나라 시골의 단칸방이나 두 칸쯤의 초가집 정도였다. 집안에는 간이 침대 위에 사슴 가죽이나 들소 가죽 등 동물 가죽으로 만든 침대 시트나 이불처럼 사용되는 가죽들이 덮혀있었다.

왐파노아그 원주민 마을은 ‘일강 언덕’(Eel River bank), 그러니까 "뱀장어 강 뚝"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처럼 17세기에 바다 연안과 강이 만나는 곳에 살았기에 왐파노아그 족은 농작물 재배와 수렵채취를 함께 할 수 있었다.
일강 강뚝 주변에서는 통나무배인 카누가 전시되어 있었다. 또 실제로 통나무를 가지고 카누를 만드는 작업을 재현하고 있었다.
마침 연기를 하고 있는 원주민 후손은 그 배는 인디안 말로 미슌(mishoon)이라고 불렀다. 
그는 통나무에 속을 쉽게 파내기 위해서 일부는 연장으로 속을 파 내다가 불을 짓피워서 나무 속을 일부를 태워서 깎아 낸다고 했다.

왐파노아그 마을에서 일하는 인디안 후손인 직원들은 당시의 원주민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연기 훈련인 롤 풀레이(roll play)를 연수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관광객이나 방문객이 질문을 하면 1620년대의 견해와 생각으로 대답을 해 준다고 한다.
이런 롤 플레이어(Roll Player)가 있는 "야외 역사 박물관"의 운영방법은 바로 플리마스 정착촌을 복원시켰던 설립자, 헨리 혼블로어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이런 아이디어는 우리나라 용인에 있는 한국 민속촌에서도 도입을 해서 보다 실감나게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옛모습을 알려주는데 활용되었으면 하는 생각도 일순 들었다.
그런데 1620년대 이곳 인디안 원주민들은 자기들 토착언어 밖에 몰랐기 때문에 이곳 연기자들에게 직접 영어로 물으면 대답하지 않고 따로 훈련을 받은 문화해설사 직원이 통역을 하여 의사를 교환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그룹이나 학생들이 단체로 올 때 사전 예약을 해야만 된다. 그라나 자유 여행인 경우는 영어로 물으면 영어로 간단히 대답을 해 주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에 인디안 원주민 마을 찾아 오는 관광객들 중에는 인디안 복장에 인디안의 깃털 모자 차림까지 하고 오기 때문에 자기들이 연기를 할 분위기를 훼손시켜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그들이 자기들의 옛 조상을 희화꺼리로 삼는 것도 매우 불쾌하며, 아울러 자기들이 옛 모습을 재현하려는 연기에도 찬 물을 끼얹는 것 갔다고 했다. 그래서 제발 이곳에 올 때는 인디안 흉내를 내지 말고 진지하게 자기들의 모습을 이해하여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1620년에 영국인들이 이곳으로 오기 전에 2〜3년 동안에 전염병이 이 마을에 창궐해서 마을 전체 인구인 무려 2천여명나 되는 원주민들이 몽땅 몰살하였다고 한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 ‘스콴토’(Squanto)라는 이름을 가진 한 사람만이 유럽 어부들에게 납치를 당하여 유럽으로 갔기에 구사일생으로 살아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영국인들이 왔을 때는 옛 마을 터에는 매장조차 못 한 채 죽은 사람들의 뼈들이 여기 저기에 수북하게 무수히 산재되어 있었다고 한다.


▲ 인디안 왐파노아그 족의 집 내부모습


그러나 그들이 죽기 전에 살았던 모습을 인디언 원주민의 마을 터는 잘 복원해 두웠다. 
우리 일행은 왐파노아그 족의 오두막 집을 몇군데 들어가 구경해 보았다.
집안 바닥은 대부분 단단하게 고른 흙바닥이었고, 원두막 지붕 꼭대기는 우산 둘래 크기의 원형으로 뻥 뚫여 있었다.
그런데 그 구멍은 집안을 밝게 하는 채광 역할도 한 몫을 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집안에서 생긴 연기가 잘 배출되도록 고려하여 그렇게 지은 유리없는 천정 창문 쯤으로 보였다.
그러나 아마도 비 오는 날이나 차가운 바람이 세게 부는 겨울철에는 비와 추위를 막기 위해서, 참나무 껍질이나 갈대 이엉으로 그 구멍을 덮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왐파노아그 족들을 대신하여 대역으로 나온 대역자 후손들은 농작물 재배, 고기잡이, 짐승사냥, 약초채집, 식용 열매 과일 채취, 갈대 멍석 만들기, 요리하기, 게임놀이 등 당시의 모습대로 일부나마 재현, 아니 연기를 보여 주기도 했다.



17세기 영국인 청교도 정착촌 -  플리머스 플랜테이션(Plimoth Plantation)



우리 일행은 왐파노아그 인디안 원주민의 옛 마을을 구경하고 인근에 복원되어 있는 17세기 영국인 정착촌인 이른바 <플리머스 플랜테이션/ Plimoth Plantation>으로 들어 갔다.
그런데 미북동부 지역인 뉴 잉글랜드 지역에서, 플리머스가 맨 처음 영국 정착민이 와서 식민지 마을을 만든 곳이다.

그런데 이 정착촌을 왜 프랜테이션(Plantation)이라고 지명 이름 끝에 붙였을까? 영어를 좀 아는 사람이라면 플랜트(Plant)라는 영어 단어는 <식물 또는 나물을 심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명사와 동사로 함께 쓰이기 때문에 또 하나의 명사인 프랜테이션(plantation)은혹시 나무 심기 또는 식목(植木)과 관련이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 17세기 영국인 정착촌 모습


그런데 생뚱맞게도 종교탄압을 받던 사람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수만리의 바닷길을 헤쳐서 낯설고 물설은 아메리카 인디안의 땅까지 왔는데, 그들은 나무를 심기 위해서 온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더구나 그 당시 플리머스 지역에는 나무 숲이 너무나 울창했을 터인데,그러면 왜 플리머스 뒤에 플랜테이션(plantation)을 붙였을까? 원래 이 플랜테이션은 식민지시대의 경제적 용어로도 쓰였다. 산업화 시대가 대면서 대량의 종이 생산과 건축용 목재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일어난 때가 있었다. 아열대 지방에 있는 밀림지역의 야생 나무에서

이를 충당하기에는 비경제적 요소가 많았다 한다.
그래서 잡목이 섞인 밀림지대를 아얘 깨끗이 벌채를 하거나 개간을 하여 질 좋은 나무를 심어 육림하는 것이 더욱 경제적이었다.
그래서 이런 대농장 형태로 특수 식물을 재배하거나 육림하는 산업을 플랜테이션 산업이라고 했다.
영국과 네델란드는 특히 16세기 말과 17세기에 남아시아 지역에 플랜테이션 산업에 서로 경쟁을 하였다. 후추, 계피, 오일 팜 등 향료식물은 야생상태에서 원료를 채취하는 것보다도 대농토에 좋은 품종을 골라 심어서 대량으로 재배하고 생산하는 것이 더욱 이익이 남는 산업이었다.
또한 목화 담배 커피 고무나무 사탕수수 등도 마친가지였다. 야생에 있는 작물들을 새로 개간된 농토를 만들어 다량으로 재배하고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이 당시 식민지 시대에는 크게 유행했던 산업이었다.
아메리카 대륙도 마찬가기였다. 담배 목화는 플랜테이션 산업이었다. 그래서 이처럼 크게 돈을 벌 수 있는 농작물을 대량으로 심고 대량으로 생산하는 대규모 농장을 <플랜테션이>이라고 말한다.
요즈음까지도 하와이에서는 바나나 또는 사탕수수 대농장을 "플랜테이션"이라고 한다. 식민지 시대에 식민지는 일종의 플랜테이션의 기지였던 것이다.
이런 플랜테이션 산업 뒤에는 흔히 큰 이윤을 노리는 자본가들이나 또는 주식회사가 있었다.

사실상 1620년에 메이플라워호를 임대하고, 개척민들이 미국에 도착해서 플랜테이션을 만들고 담배나 사탕수수 목화 등을 대량으로 심어서 싼 원료를 영국에 보내면 이를 가공해서 상품화하면 크게 돈을 벌 수 있었다.
사실상 메이플라워를 탔던 청교도들과 일부 이방인들도 일단은 수속 비용과 탑승료는 외상이었으며 향후 플랜테이션에서 노동이나 생산물로 대가를 갚도록 계약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메이플라워호를 대서양에 띄워서 아메리카로 보낸 비용을 모두 감당했던 것은 플리머스 주식회사였다.
이런 주식회사는 1〜2년 단기간에 이익을 기대하지 않았다. 나무를 플랜테이션에 심어서 재배하는 데는 20여년이나 한 세대를 기달려야 좋은 목재를 얻을 수 있듯이 이런 주식회사들로 개척민들을 신세계인 아메리카에 보낼 때에는 그들을 아메리카에 나무를 심는 심정으로 그들이 정착될 때까지 심어놓고 기달리는 장기적 계획으로 보냈다.

말하지면 메이플라워호를 아메리카에 보내는 일은 플리머스에 사람을 심는 사업으로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말하자면 사람을 심는 땅이란 뜻인 "식민지"로 보냈던 것이다. 
플리머스에 플랜테이션에 102명의 사람을 심기 위해서 메이플라워호를 대서양에 띄워서 아메리카에 보냈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들이 정착지를 왜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이라고 불렀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다소 풀리게 된다.


▲ 17세기 영국인 정착촌 모습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17세기에 모습으로 복원된 정착촌 안의 중앙 대로를 들어 선다. 
정착촌에는 30여채가 안되어 보이는 작은 마을을 나무 울타리가 다이야몬드 형으로 애워 싸고 있었다.
우리나라 농촌 마을이나 강원도 산골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부락처럽 보여서 그 규모가 작은 데에 처음에는 나는 당황스럽고 다소 민망스러웠다.
플리머스라는 지명에 대농장을 뜻하는 <프랜테이션>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이렇게 규모가 작을 수가! 이름 값을 못하고 있네! 
그러나 이 식민지 정착촌은 1623년의 모습을 고증을 통해서 복원시켰다고 하는 말을 듣고서야 이해가 금새 갔다.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이곳에 왔을 때가 1620년 겨울이었으니까, 그것도 102명의 청교도와 일부 이방인이 첫 겨울을 다 보내기도 전에 절반이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혹한에 못이겨 죽었다고 하나 살아 남은 자들 50여명이 정착하기 위해서 집들을 지었으니 30여채도 많은 편이 아닌가!
아, 그래서 인디안 엣 마을 터에서 이곳으로 안내하는 길로 접해 들어 오자 마자 안내판에 <17세기 영국인 마을/ The 17 Century English Village>이라는 안내판을 보았던 것이 생각났다.

당초 정착민들을 주선해서 보냈던 플리머스 주식회사에서는 장차 계획으로 이곳에 <산업 플랜테이션>을 만들어서 담배나 사탕수수 또는 목화 등을 대량을 재배하여 이 원료들을 영국으로 수입하여 이를 가공처리하여 상품으로 만들고, 이를 본국과 유럽 여러나라에 팔아서 이윤을 크게 남기려는 속셈을 가지고 그렇게 불리어 지기를 바랬을 것이다. 

그래서 현재는 <플리머스 플랜테이션>하면 광의로 해석하려고 한다. 17세기 영국인 정착촌, 왐파나오그 인디안 원시촌, 헨리 혼블로워 방문객센터, 공예품 전시관, 여기에다 복제된 메이플라워 2호가 있는 워터프론트 그리고 플리머스 록(Plymouth Rock)의 대리석 비각, 베리얼 힐 묘지, 플리머스 박물관까지 싸잡아서 부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은 당초의 플랜테션 꿈이 실현되기 전에 이웃 메사추세츠 식민지에 합병을 당하여 그 꿈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다. 다만 이제는 빛 바랜 이름만 남아서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플랜테이션> 이라는 말 속에는 초기 자본주의가 요망했던 과대한 이윤 추구라는 욕심과 17세기 영국 당국의 영토확장이라는 식민지의 야무진 야망이 서려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지금처럼 차라리 살아있는 "미국 역사 초기의 역사 박물관"이라 소개받는 것이 더 큰 감흥을 준다.
현재에는 이렇게 자리 매김하면서 <플리머스 플랜테이션 정착촌>을 솔직히 관광객들이나 미국의 후세들에게 <17세기 영국인 마을>로 이해시키고, 이 마을 사람들이 지녔던 신앙의 자유, 모험심과 개척정신, 메이플라워 협약을 통한 민주주의 실천의지, 이웃 원주민과의 화해 정신이 오늘날 미국을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선봉자로 만드는데 기초와 기틀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고 있다.

아무튼 현재의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은 플리머스 항구 가까이에 건설되어 초기 개척민들의 정착된 모습을 재현시켜 주는 곳이다.



▲ 옆에서 보면 한글 <쇼>자처럼 보이는 정착촌 목조 하우스


그런대로 식민지 시대의 플리머스 풍경과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대부분의 정착촌 집들은 두 칸짜리 목조건물들이다. 옆에서 보면 지붕과 벽 모습이 우리나라 한글을 <쇼>자와 비슷하게 보였다.
집집 마다에는 채전밭이 있었다. 문화해설가가 키친 가든(Kitchen garden)이라고 집안 뒷터를 가르키며 설명해 주었다.
나는 단박 어렸을 때에 고향집 부엌 앞에 있는 채전밭이 생각나서 쉽게 이해가 되었다. 채전밭에는 옥수수, 호박, 고추등 채소가 보였고 이름를 허브같은 약초도 보였다.
채전밭 주변과 앞 도보에는 흰 깃털과 검은 깃털 얼룩달룩한 여러 마리의 닭들이 방치되어 자유롭게 모이를 찾고 있었다.
아! 그렇지!
저 얼룩달룩한 닭이 바로 <플리머스>라고 내가 시골 고흥중학교에 다닐 때 농업 교과시간이 닭의 품종과 원산지를 배웠던 생각이 났다. 그 당시 농업 선생은 전남농대를 나온 권재선 선생이었다. 흔히 우리는 그 선생 뒷전에서는 <권팔이>선생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그는 농업 시험문제에 주관식으로 주로 출제를 했다.
가축의 종류와 원산지를 쓰라고 시험 문제로 자주 출제를 했었다. 닭의 종류에는 달걀을 1년에 280개나 생산하는 이태리가 원산지인 레그혼이 있고 육질이 많고 병에 강한 닭에는 미국이 원산지인 플리머스와 로드가 있다고 했다.
돼지에는 원산지가 영국인 요크셔와 버크셔가 있고, 소에는 우유를 다량 생산해 주는 네델란드가 원산지인 홀슈타인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아랍종"이라는 말은 원산지가 아라비아 반도라고 했다.

닭들을 한참 구경하다가 나는 미국이 원산지인 개량종 <플리머스>는 혹시 원산지가 미국 중에서도 이름 그대로 이곳 <플리머스>가 아닐까 싶어 문화해설사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는 애매하게 아마도(Maybe)라고 말했다가, 다시 분명한 것은 메사추세추가 원산지라고 했다. 그리고 그 닭의 종류 이름은 <플리머스 록>이라 했다.
메사추세츠에서는 메이플라워를 타고 온 조상들이 맨 처음 밟았다는 돌을 <플리머스 록/Plymouth Rock)이라 불렀는데 그 바위가 유명하니까 신품종인 닭에다가 그 이름을 붙인 것이라고 덧붙여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정착촌에는 니예 반(Nye Barn)이라는 창고 겸 축사가 있었다. 이 축사에서는 양, 염소, 소, 닭 등의 가축을 개량하여 좋은 품종을 만들려고 육종(breeding)을 했던 곳이라 했다.
왜냐하면 특히 아메리카 토종인 닭들은 알도 적게 낳고 몸체도 적었다. 아마도 플리마스 정착민들이나 또는 플리머스에 살고 있던 후손들이 닭의 육종에 성공하여 자기네 지역을 자랑하려고 그 품종의 이름에 <플리머스 록>이라고 명명한 것은 아닐런지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러고 보니 <로드>라고 하는 붉으스래한 깃털을 가진 닭은 플리마스 남쪽에 있는 <로드 아일랜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이것도 문화해설사에게 물었더니 역시 대답은 아마도(Maybe)였다.

내가 중학교를 다니던 전남 고흥 지역에서는 토종인 조선닭은 달걀을 많이 낳지 않는다고 하여 대부분의 양계장이나 농가에서는 레그혼, 플리머스, 로드, 이 세기지 닭을 사육했다. 아마도 6.25 이후에 미군이나 미당국의 원조 프로젝트에 의해서 그 품종들이 국내에 반입되지 않았을까! 



▲ 플리머스 록 
    (원산지: 메사추새츠) 
▲ 로드 아일랜드 레드
    (원산지: 미국 로드 아일랜드)

그런데 그 때 시골 사람들은 ‘레그혼’을 ‘내공’으로, ‘플리머스’는 ‘뿌리마수’로, ‘로드’는 ‘로도’로 불렀다.


나는 순간 그 시절에 들었던 한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1950년대 어느 장날 농가에서 레그혼 닭을 키우며 달걀을 모아 바구니에 가득 담고 머리에 이고, 달걀을 팔려고 고흥읍 장터로 오는 한 농촌 아줌마가 있었다. 그 아줌마는 장터로 가는 길에 읍 시가지를 지나면서 달걀 하나라도 더 빨리 팔고 집에 가려고 이렇게 외치고 지나갔다.

"내공알 사주시요! 언릉 내공알 사주시요!"
이 말을 듣고 장난기가 동한 한 가게집 남자 주인이 이렇게 물었다.
"그 공알 얼마요?"
"30환이요!" (당시 화폐는 단위가 환)
"당신 공알이 그렇게 싸부요?"
하고 낄낄 웃으니까 그 때서야 그 농가 아줌마는 그 말이 너무 심한 농담인 것을 알아 차리거 이런 욕을 던지고 장터로 도망쳤다고 한다
"빙하고 자빠졌네! 이녁 붕알이나 잘 파시오. 내 거시기가 아니고 내공알이랑깨! 염뱅하고 내 거시기로 요상하게 알아들어뿌네 이잉"

고흥에서 붕알은 남자 거시기를, 공알은 여자의 거시기(?)를 지칭하는 사투리였다. 지금 같으면 그 농가 아줌마는 그 남자를 성희롱으로 몰아 세워 미투(Me too)운동에 까발릴 사건이 될 수도 있었다.

지금 플리머스에 와서 플리스마스 록이라는 닭으로 보고 있으니까 <레그혼 알>을 촌 아줌마가 <내공알>로 알아 듣고 배워서 그런 에페소드가 생겼던 일이 생각나서 괜히 나 혼자 속으로 웃음을 죽였다.
우리 일행은 닭 구경에서 눈을 돌려 정착촌 집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두 칸 짜리 규모의 집이었다. 집 문 쪽 한 칸은 부엌 겸 주방이었고, 그 뒷 칸은 침실이었다. 침실에는 나무로 만든 간단한 침상이 있었고 침상 주위에는 천으로 된 휘장이 커틴 구실을 하고 있었다.


▲ 붉은 휘장 커틴을 친 침상(프라이버시 보호)

아마도 침실 한 칸에서 휘장을 치고 자녀들과 함께 잤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모의 프라이버시를 이 붉은 휘장이 옛날 그 시절에 보호해주었노라고 뽐내는 것처럼 보였다.

부엌 칸에는 중앙에 화로 터가 있고 그곳에서 땔감을 피워 냄비나 솥을 화로터 위에 가로 지르고 있는, 걸어서 음식을 요리하고 있었다.
살림살이 가구로 식탁, 의자, 옷장 등도 있고, 부엌 벽에는 식기류 냄비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우리나라 1960년대 농촌의 부엌 살람보다 좀 낫게 보였다.
도로변에 있는 집들은 문이 모두 개방돼있고, 집안에는 17세기 영국사람들이 입었던 복장을 그대로 한 대역들이 실감나게 살림살이하는 모습을 연기로 보여 주었다. 
집안이나 텃밭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앞서 인디안 촌에서 처럼일정한 기간 대역 교육을 받고 1620년대에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그대로 역할 분담을 해서 연기를 한다고 했다.
자기들은 17세기 플리머스 정착촌에 살았던 사람들의 롤 플레이어(roll player)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그들은 플리머스 개척시절처럼 실제 당시의 주민처럼 행동하고 질문에 그렇게 응답해 주었다.
그들은 개척시대에 겪었던 생활 이야기를 당시에 실제 겼었던 사람들 이상으로 해주었다.


▲ 1620년대 정착촌 주민들 역활을 하는 연기하는 지역 주민들



그들은 각자가 맡은 특별한 이야기를 말해주었고, 일부는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실명으로 자기를 소개했다.

그리고 식민지 시대에 살았던 이야기를 그 당시의 입장에서 실감나게 말해 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타임머신을 타고 400년 전의 과거로 되돌아간 것같은 착각과 환상에 사로잡히게 했다.
개척초기에 겪었던 배고품, 추위, 아는 사림들이 죽아가는 이야기를
눈물을 흘리면서 리얼하게 연기를 하기도 했다.
그들의 신앙심, 개척정신, 자연과의 투쟁, 모험담을 듣고 있노라면
존경심마저 솟아났다.
이러한 롤 플레이는 이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의 이이디어를 내고, 실제 복원사업을 주도했던 헨리 혼블로어의 계획대로라고 했다.
이처럼 자연역사 박물관을 통하여 관광객들이나 현재의 미국인들이나 후손들에게 17세기에 개척 이민을 왔던 필그림 선조들을 꿈과 정신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보람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이 정착촌의 맨 윗쪽에는 2층 규모의 큰 집이 있었다. 그 집은 맨 처음 건축한 공동 하우스였다고 한다. 처음에 여기에서 모두가 합숙을 했고, 차자 여러 체의 개인 주택을 지어 나갔다고 한다.
개인 주택을 다 짓고 나서 이 큰집은 주일에는 교회로 사용되었고, 마을 문제가 있을 때는 일종의 마을 회관으로, 그리고 혹시도 모를 이웃 인디안들이 습격을 해 오면 마을 방위용 요새로 사용했다고 한다.
실제, 2층에는 6대의 대포가 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포는 정착촌 대로를 향하여 플리머스 항구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을 전체가 한 눈에 들어 왔다. 바로 이곳 이층은 외부 적이나 인디안들이 접근해 올 경우에 경계와 감시용 망대의 구실도 했다.






▲ 플리머스 정착촌 공동하우스(대포 6대 거치)

 

그리고 2층에서 대포를 쏘았을 때에 오발탄이 마을에 떨아질 경우에 피해를 막기 위해서 마을 중앙에 대로를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였다.

큰집 2층에서 바라보니 정착촌은 앞서 말한 대로 나무 울타리가 다이야먼드 모양으로 마을을 성벽처럼 삥 둘러싸며 보호하고 있었다.


▲ 17세기 영국인 정착촌의 모습을 그린 그림



그리고 그 울타리에는 아래 정착촌의 그림처럼 전면과 좌우에 3개의 출입문이 있어서 마을 밖 농사일이니, 공격을 받아 피난시에는 급히 출입이 용이하도록 고려하여 만든 것으로 보였다.

위의 그림은 1623년 때의 정착촌 모습을 훗날에 누군가가 상상하여 그린 그림이다.
아마도 그 해에 이곳을 방문했다는 엠마누엘 알담(Emmanuel Altham)이 그 당시 기록해 둔 정황을 읽고, 누군가가 참고하여 그린 모양이다.
그는 당시의 정착촌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정착촌은 해변가 가까운 곳에 있는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잘 자리잡고 있다. 가만히 보니 정착촌에는 약 20여채의 집들이 있다. 그 중 4~5채는 제법 폼나게 지어진 집들이다. 나머지는 앞으로 더 손질을 하면 좋은 집들이 될 것이다. 이 정착촌 가운데는 제법 큰 도로가 만들어저 있다. 도로 맨 윗쪽 언덕에는 요새를 방붕케 하는 2층으로 된 큰 집이 있다. 그 집안에는 여섯 대의 대포가 거치되어 있다. 
정착촌 둘래에는 나무기둥과 판자로 된 울타리 벽이 둘러처저 있다.
그리고 그 울타리에는 3개의 문이 있어 외부와의 통로가 되고 있다."

정착촌을 이것 저것 구경하며 돌다보니 벌써 두 시간 정도가 흘러 갔다. 정착촌을 되돌아 나오는 게이트에 있는 안내하던 문화해설원이 플리머스 항구의 해변가에 있는 플리머스 바윗돌(Plymouth Rock)을 꼭 보고 가라고 한다.
주차장에서 차를 빼서 스쿨 스트리트를 나와 해변가를 차를 향하니 라이덴 거리가 나오고 곧 큰 도로인 메인 거리가 나온다. 
오른 쪽에는 해변이 보이고 차창으로 차도와 해변 사이에는 아름답게 잘 가꾸어진 정원의 나무들이 뒷 배경을 한 푸른 바다와 앙상불을 이루며 나무 사이사이에 보이는 하얀 배들의 지나가는 모습이
한폭의 영화 장면처럼 보인다.
사위인 제이닥이 차를 최대한 저속으로 드라브를 하며 파킹 장소를 물색하는 동안 우리는 그저 "아~~멋있다!" 하는 경탄을 연발하며 플리머스 해안 정경을 즐긴다.
주차장 스페이스를 찾아서 시동을 끄자 우리는 해안가가 보이는 정원으로 내렸다.
바로 100미터 전방에 있는 차도와 해안 정원의 경계선 지점에 왠 그리스의 작은 신전을 연상케 하는 하얀 돌기등이 작은 지붕을 사방으로 받치며 서 있는 건축물이 보였다.
그 건축물 주변에는 구경꾼들이 내부가 전혀 드러나 보이지 않을만큰 웅성웅성하며 서너 겹으로 둘러 싸고 안쪽을 보고 있다.
"아~!그렇지! 저게 바로 그 유명한 전설적인 바위돌, 플리머스 록(Plymouth Rock)일꺼야~!"
나의 예측은 들어 맞았다. 바로 플리머스 록이였다. 작은 신전 같은, 아니 우리나라 비각같은 건축물 속에는 지하로 1층 깊이로 빵 뚫여서 바다 모래 바닥까지 드러내 보이는 곳에 지하 공간이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모래 공간 가운데는 달걀 모양의 타원형인 바윗돌이 모래에 하반신이 묻은 채 상반신만 누드로 노출시키고 있었다.
두 동강이 났는지 시멘트로 붙여 놓은 흔적이 미치 제왕절개 수술을 한 여인의 하복부에 수술하고 난 뒤에 꿰맨 흔적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수술했던 해를 표시한 것처럼 누군가가 1620이라는
숫자를 새겨 두웠다.
알고보니 이 돌은 1620년에 메이플라워 배를 타고 왔던 사람들이 이곳 플리머스 해변에 도착했을 때 처음으로 상륙할 때 디딤돌처럼 밟았다는 기념비적인 돌~~! 바로 그 유명한 <플리머스 바위>였다.
숫자 1620은 바로 그 바윗돌을 처음으로 밟았던 던 해를 묘비에 새겨놓았다. 마치 비석에 갈명처럼 기념비적인 의미를 표상하고 있었다. 
이 돌을 영어로는 플리머스 록(Plymouth Rock) 라고 하는데, 록(Rock)은 일반적으로 바위나 돌맹이를 말한다. 그러나 이 바윗돌은 파도에 깍기어서 사실상 면이 반질반질한 사실상 미끄러운 몽돌바위(boulder)였다.
그런데 사람들은 몽돌바위를 뜻히는 보울더(Boukder) 보다 자주 사용되는 록(Rock)을 붙여 그저 플리머스 록(Plymouth Rock)으로 부른다고 한다.





▲1620년 메이플라워 청교도들이 상륙할 때 밟았다는 디딤돌 플리머스 록


▲ 플리머스 록의 비각

그런데 이 돌이 정말로. 그 당시에 처음으로 밟았던 "진짜 돌바위냐"에 대해서 왈가불가하며 말들이 많은 모양이다. 

플리머스의 락(바윗돌)이 미국 역시의 시작을 알리는 신비스러운 바윗돌처럼 생각되어 몇가지 구전으로 전해오는 전설같은 스토리가 있어 이왕이면 실감있게 나는 이렇게 반쯤 장난삼아 대화체로 엮어 정리해 본다.

때는 1741년이었다. 플리머스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아직 접안 시설이 잘 되지 있지 않은 플리머스 항구에 여러 배가 쉽게 접안하고 정박할 수 있는 부두를 새로 만들기로 결정을 했다.
이제 곧 건설공사가 시작되려고 하는데 플리머스 교회의 장로인 토마스 파운스(Thomas Faunce)로부터 긴급 청원이 들어 왔다.
부두 공사를 하게되면 121년 전에 선조들이 메이플라워호에서 상륙할 때 디딤돌로 밟았던 바윗돌이 공사로 인해서 묻히거나 훼손이 될 수 있으니 공사 시작하기 전에 역사적인 그 바위와 작별을 고하는 특별 예배를 보게 해달라고 청원을 해 왔다. 그래서 부두 건설공사를 맡은 한 간부가 그 장로를 찾아가 그 이유를 물었다.

"장로님, 왜 그 돌이 그렇게 중요하나요? 그리고 선조들이 밟고 이곳에 들어 왔다는 어떤 증거가 있나요. 우리는 금시초문입니다" 
이렇게 의아해 하며 물었더니 그 노인은 이렇게 말해 주었다.

"여보시오 젊은이. 나는 지금 나이는 94세지만 기억력 하나는 좋소이다. 암튼 부두 작업을 잠시 중단하시오. 나는 토마스 파운스라고 하는 교회 장로요. 지금 당신네들이 새로 부두 공사를 한다는데, 지금 그 부두 자리에 큰 암석이 하나 있소. 그 암석은 지금부터 121년 전에 우리 선조들이 메이플라워 배를 타고 그 부두에 왔을 때 그 바위를 디딤돌로 밟고 상륙을 했단 말이요. 이렇게 역사적으로 기념물이 되는 바위인데 그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무심하게 묻혀버린다면 쓰겠소?"
"그럼 장로님 어떻게 하면 좋지요?"
"난 울 아부지한테 들었소. 어렸을 적에 부두 뒷산에 올라 가 있을 때 우리 아부지께서 그 바위를 가르키며 그런 얘기를 해 주었단말아요. 그리고 메이플라워 배를 타고 온 선조들의 후손들이 7〜8명이 지금도 살아 있는데, 그 분들도 역시 그 말을 들었다는 얘기를 해 주었소이다"
"그런데 혹시 장로님 부친도 메이플라워 배를 타고 오신 분인가요?"
"아니요, 우리 아버지는 그 배 보다 2년 후인 1623년에 여기에 왔소. 그렇지만 그 때 먼저 오신 분들이 바닷가에 나오면 그 바위를 보고 첫 디딤돌이라는 얘기를 여러 번 해주어서 알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난 어렸을 때 동네 아이들에게 그 바위를 자랑스러워 하며 함께 그 위에서 놀곤 했지요"
"네, 그랬군요! 그러니까 그 바위를 어떻게 하면 좋지요? 새로 부두를 만들려면 바로 그 위에다 부두를 만들 계획인데요?"
"좋소! 마을 광장에다 옮겨 놓으면 기념물이 되어 좋겠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요, 그건 어려운 일이니까, 나는 장로이니까 조상과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또 그 바위와 영원히 작별을 했으면 하오, 파묻히기 전에 작별 예배나 기도를 드릴 기회를 주시오“

이런 청원을 받고 공사 책임자는 공사를 앞둔 며칠 전에 노인을 그 바위가 있는 부둣가로 모셨다. 그리고 작별의 기도를 할 기회를 주었다.
교회에서는 특별 찬송단을 보내주었다. 그날 파운스 장로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돌을 보존하지 못하고 묻히게 되는 일을 하나님께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간절하게 영원한 작별의 인사를 담은 기도를 하면서 그 바위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으면서 땅에 묻혀 헤여지는 것을 애석해 했다.
파운스 장로가 기도를 끝내며 동참한 찬송단과 함깨 마지박으로 찬송가를 불렀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부두 공사에 참여한 일꾼들과 주민들은 크게 감동하여 이런 사실을 곧장 식민지 당국에 호소하였고, 그 바윗돌은 땅에 묻히지 않고 플리머스 타운 광장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역사적인 <플리머스 록>의 전설이 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오늘날, 이 돌을 구경하기 위해서 플리머스를 찾아 오는 관광객이 백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현재 이 ‘플리머스 록’은 플리머스 해변가에 로마의 건축양식인 도리아식의 하얀 돌기둥 14개가 석조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카노피(Canopy) 스타일의 건축물 안에 잘 안치되어 있다.
이 카노피 스타일의 건축물은 역사적 인물이나 명문 가문의 조상들의 공적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우고 이 비석을 보호하기 위하여 집을 짓는데, 우리는 그것을 비각이라고 한다. 이 카노피도 <플리머스 록>을 보호하고, 아울러 성스럽게 보이기 위한 건물이다.

카누피에 가까이 가보니 내부는 해수면 까지 지하 1층 깊이에 있는 빈 공간이고 바닥에 모래가 깔려 있고 그 모래 위에 바윗돌이 안치되어 있었다. 달걀 모양의 타원형인데 규모는 모래 속에 하반부 돌은 6톤가량이 묻혀 있고 상반부에 보이는 돌은 4톤 정도의 무게가 나간다고 한다.
그런데 그 길이는 크게 보아서 약 2미터 쯤으로 보이는데, 이 돌은
화강암으로 파도에 깎여서 내 눈에는 큰 몽돌처럼 보였다. 그래서인지 미국인들도 이 바윗돌을 막연히 바위(rock)로 보지 않고 하나의 몽돌(boulder)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원래 이 바윗돌은 표면이 지금보다 더 반질반질했다는데, 18〜19세기 경 구경꾼들 중 기념품 수집가들이 나타나, 정으로 또는 망치로 마구 조각을 내서 기념품으로 삼겠다고 너도나도 찍어내고 따내 갔기 때문에 표면이 지금처럼 저렇게 약간 울퉁불퉁 매끄럽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플리머스 협회에서는 돈을 주고 쪼각 돌도 사들여 박물관에서 역설적으로 전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 플리머스 록은 우여곡절을 겪어서 원래 크기 보다 반 쯤 작다고 한다. 

이제 그 우여곡절의 사연을 들어보니 다음과 같다.
1620년에 플리머스에 온 개척자들이 상륙 당시 처음 밟은 디딤돌이 플리머스 록이다. 이 돌은 그동안 구전으로 전해왔었다. 그것도, 121년이 지난 1741년에 한 노인이 자기 아버지한테 들었노라고 주장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플리머스 록(Plymouth rock)이 문자로 인쇄되어 알려지게 된 것은 1774년부터이다. 
이 때는 플리머스 식민지에서도 영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을 하자는 운동이 일기 시작하던 때였다. 플리머스 주민들은 타지역에 비해서 신앙의 자유와 시민의 자유에 대한 의식이 매우 강한 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플리머스 바윗돌>이 바로 자신들의 독립정신을
일깨워 줄 수 있는 상징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바위를 자유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 플리머스 타운의 광장으로 옮기고자고 했다. 그래서 다수의 주민들과 멍에를 쓴 숫소 20마리가 동원되어 바닷가 모래에 푹 박힌 바위를 파내서 도로 위 로 끄집어 올리기 위해서 무려 20 마리의 숫소들이 동원되어 이용되었다. 그리고 그 바위를 큰 수레에 싣고 광장으로 옮겼다. 
그런 과정에서 그 바위를 바닷가에서 끌어내다가 쪼개져서 상반부인 반토막만 올려젔다. 그리고 겨우 끌어 올렸던 그 반쪽도 운반 도중에 또 두 개로 깨졌다. 결국 본래의 크기에서 30퍼센트 정도의 돌로 작아진 채 타운 광장에 전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부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애국자들은 바위가 깨진 것은 영국이 쪼개진다는 것으로, 앞으로 미국이 독립이 된다는 길조의 징조라고 하면서 모두가 좋게 생각하였다.

당시 미국의 독립을 원하하고 있던 지역 애국자들은 이런 미신이라도 스스로에게 확신시켜 대영 투쟁심을 길러주는 상징물로써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가 아니면 죽음!"이라고 쓴 깃발을 나부끼며, 플리머스 타운 광장에 있는 <자유 국기대> 앞에 옮겨서 전시를 한 것이다.
그런데 광장에 전시된 바윗돌은 미국 독립을 원하는 하나님의 계시가 들어 있는 돌이라는 카더라식 뉴스가 인근에 퍼저 나갔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유명세를 타면 기념품으로 수집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광장에 전시된 돌에서 일부 조그마한 조각이라도 쪼아내 가져가려고 망치나 끌 등을 가지고 와서 훼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필그림 협회가 주관하여 1834년 7월 4일, 미국 독립기념일에 이 바윗돌은 아예 <필그림 홀 박물관> 안으로 다시 옮겼다. 그리고 그것도 못 믿어워 그 바윗돌 주변에 철책을 세워 부당한 훼손을 막아냈다.

아무튼 이 바윗돌은 미국이 독립을 선언 하기 전까지는 구전으로만 알려지고 있었는데 1834년부터는 종이에 인쇄가 되어 <플리머스 록>이라는 이름으로 미국 전역에 알려지고 인식되기 시작했다.
1859년에는 <필그림 홀 박물관>에 안치된 <플리머스 록>을 역사적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서 하반부 돌이 이직 남아 있는 원래의 자리인 워터 프론트로 다시 옮겼다. 그리고 그 때에 두 동강이 된 바윗돌들을 세멘트로 붙여서 합체하여 놓았다. 그리고 바윗돌 위에 로마의 신전처럼 멋진 도리아식 하얀 돌기둥을 전면과 후면에 각각 5개, 측면에 각각 2개씩 총 14개를 세우고, 그 위에 하얀 돌 지붕을 씌워서 마치 그리스의 신전을 방불케 하는 카노피(Canopy) 형태의 성소(聖所)가 만들어 젔다. 그리고 그 안에 플리머스 록이 성석(聖石)처럼 대접을 받으며 잘 안치되었다.
▲ 플리머스 락 카노피와 한국 비각 비교 사진

카노피란 우리나라에서는 비석(碑石)을 보호라기 위해서 지은 집을 비각(碑閣)이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플리머스 락은 한국판 비각(碑閣) 속에서 성석(聖石)의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스노피에 가까히 접근해서 안을 들여다 보니 1880년에 플리머스 락 표면에 파 새겼다는 1620이란 숫자가 별나게 내눈에 쑥 들어왔다.
이는 1620년 전의 첫 상륙 디딤돌이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한 표시였다.
1920년에는 이 돌이 첫 디딤돌이 된지 300주년이어서 일대 연안을 일대 개보수 공사를 했다.
옛부두는 철거되었고 워터프론트도 재설계하여 연안 일대의 해안선이 새롭게 건설되고 단장되었다.
그 공사를 위해서 플리머스 락도 잠시 위치를 인근으로 자리를 옯겼다가 공사가 끝난 뒤에 다시 제 자리에 안치되었다. 이 때 새 카누피가 더 크게 재 건축되었다.

▲ 플리머스 바윗돌 카노피(canopy) 측면 모습


플리머스 락! 첫 디딤돌로서 역사적 기록의 팩트가 있건 없건 간에 미국인에게는 초기 개척민들의 신앙의 자유, 개척정신, 이웃과의 화합을 상징하는 역사적 상징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일행은 플리머스 카노피가 측면으로 마주 보이는 해변가 잔디 위에 비닐로 된 멍석을 깔고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름들이 큰 나무가 초 가을의 따가운 양광을 파라솔처럼 막아 주어서 시원한 그늘을 제공해 주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한 동안 푹 쉬었다.
집 시람과 딸은 양팔 두 다리를 자유롭게 펴고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해풍을 맞으며 그림자가 드리워진 녹색 잔디 위에 그 대로 큰 대자(大)를 쓰고 누워서 오수를 즐기기도 했다.
옥색 하늘에는 흰구름이 몇 조각 떠 있었다. 우리 일행이 쉬고 있는 워터프론트 부두에는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복제된 메이플라워 2호의 전시장이 있었는데 그 배를 구경을 못 해서 아쉬웠다.
2020년 메이플라워가 이 항구를 도착한지 400주년이 되는 해라 그 행사를 위해서 다시 배를 해체하여 재복원하고 새로 단장하여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이미 앞서 말했듯이 지금은 미스틱 씨포트 조선소에 가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일행이 낮잠을 즐기는 동안 일단 풍광이 아름다운 플리머스 항구와 플리머스 만에 정박해 있는 수 많은 보트들과 또 들락날락 하는 여러 하얀 선박들이 이동하면서 어울려 자아내는 모습을 감상하면서, 언젠가 임신중인 둘째 딸의 <까칠이>가 태어나서 제대로 철이 들었을 때 다시 나랑 이곳에 함께 여행을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아마도 15년 쯤 후의 일일 것이다. 그런데 내 나이가 얼마라고? 
그 때까지 살아있으려나? 그 때 내 나이는 90대 초반이어서 함께 손녀와 여행을 할 수 있을지는 영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그 때에 내 첫 손녀인 <까칠이>가 성장해서 이 글을 읽어 주었으면 하고 이 글을 이렇게 기록으로 남기려는 심정으로 작은 수첩 노트에 미주알고주알 글을 써대고 있다.

이제 메모도 끝나고 아마존 온라인 쇼핑 몰을 통해서 구매해 온 윌리엄 브래드포드가 쓴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의 역사》 책을 핸드캐리 가방에서 꺼내어 어려운 단어는 지나가고 대충대충 읽어본다.

17세기인 1620년에 이곳에 메이플라워 배를 타고 와서 겪어야 했던 초기 영국 개척자들의 고난의 행진을 역역히 기록한 것을 현지에 와서 읽으니 감개가 무량하다.
아! 차제에 마지막 여행 코스로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묘가 있다는 베리얼 힐 묘지를 둘러보고 가자는 생각이 떠올랐다.
당시 플리머스의 지도자였던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
만약 그가 당시의 정착촌 생활과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오기까지의 경위를 소상히 기록해 두지 않았다면 미국의 초기 역사는 깜깜이 역사였을 것이다. 

이어서, 인근에 있는 베리얼 힐 묘지(Burial Hill Cemetery)로 갔다. 이 묘지 자리에는 원래 정착촌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 일행이 구경했던 <17세기 영국인 정착촌>은 1957년에 헨리 혼블로러(Henry Hornblower)가 복원시켜 놓은 <야외 역사 박물관용 정착촌>이었다.
스쿨 스트리트로 들어서자 <베리얼 힐 묘지>가 금새 나왔다.
묘지 좌우는 좌청룡 우백호 식으로 양 언덕이 둘러싸인 나무 숲 속에서 원형의 넓은 잔디 위에 명당의 분위기를 풍기며 수 많은 묘석들이 여기저기 서로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서 있었다.

이 묘석 저 묘석 둘러보다가 드디어 정착촌의 지도자였으며, 플리머스 지사를 다년간 역임했던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묘지를 찾아냈다.
그 묘지의 묘석은 9월 초 초가을의 석양을 받아 동쪽으로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며 황혼녘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묘석에는 "열성적인 청교도였으며 신실했던 기독교 신자로 1621년 4월부터 1657년까지, 플리머스 지사였던 윌리엄 브래드포드가 휴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윌리엄 브래드포드(1590~1657)는 과연 누구인가?
인터넷에서 플리머스 정착촌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하면 대부분 그가 쓴 책을 근거로 설명을 하거나 근거를 댈 때 흔히 그의 이름과 저서인 《Of the Plymouth Plantation》이 언급되었다. 그래서 차제에 그가 쓴 책을 2주간 읽고 있는 중이다.
▲ 베리얼 힐 묘지에 있는 윌리엄 브래드포드 묘지석


▲ 윌리엄 브래드포드와 그의 저서 《Of Plymouth Plantation》



이 책은 17세기, 사실상 중세 영어로 쓰여져 있어서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고 읽으면 혼란스러운 철자법 때문에 헷갈리게 하는 부분이 여기저기 많았다.
예를 들자면 here(여기)를 hear로, indian(인디안)을 indean으로,
you(너)를 ye로, hot(덥다)를 hott로, two(2)를 tow로, do(하다)를 doe로, peace(평화)를 peece로, small(작은)을 smale로, heart(심장)을 harte로, angry(화가난)을 angrie로〜 등등 이었다.
영어는, 사무엘 존슨 박사(Dr, Samuel Johnson)가 1755년에 ‘영어사전’을 편찬, 발간되기 전이라서 특히 각 단어에 대한 철자는 물론, 같은 뜻의 단어라도 사람에 따라, 혹은 지역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사용 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알기로는 존슨 박사가 사전을 만들어 놓은 후에는 비로서 영어단어의 철자에 대한 논란이 크게 줄어 들었다.
서로가 자기가 애용하는 단어가 표준어라고 주장했다가 존슨박사의 사전을 들이대면, 그 때서야 진짜 표준어가 판가름이 났다.


▲ 윌리엄 브래드포드 저서

이처럼 모두가 정확한 철자는 존슨박사의 사전을 의존하여 이를 표준어로 삼았다.

그런데 윌리엄 브래드포드가 1651년에 그 책을 다 썼을 때에는 존슨 박사의 사전이 나오기 전인 약 100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그도 헷갈리는 단어는 주로 ‘셰익스피어’나 ‘밀톤’이 쓴 단어를 표준으로 하여 많이 썼다고 했다.
아무튼 나는 그가 쓴 책인 《플리머스 플랜테이션의 역사》를 참고로 하여 그간 정리되었던 생각들을 써서 나의 손녀인 <까칠이>가 혹 미국에서 성장하거나 공부를 할 때 한글도 배우고, 아니면 한글 배우기용으로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지금도 이렇게 쓰고 있고, 또 앞으로도 좀 더 써 보려고 한다.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는 영국 요크셔 출신이다.
그는 큰 농장을 소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한 살 때 부친이 사망했다. 설상가상으로 4세 때, 어머니가 재혼을 하였다.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외할아버지가 양육을 맡았다. 그런데 6세 때 외할아버지 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렇게 되자 재혼을 했던 어머니가 다시 양육을 맡아 계부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런데 1년후에 어머니마저 병사했다. 그야말로 그는 천애고아가 되고 말았다.   
그때부터 삼촌이 양육을 맡았지만, 성격이 고약한 삼촌은 인정머리  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조카인 윌리엄을 혹독하게 일을 시켰다. 몸이 아파도 제대로 치료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윌리엄은 중병에 걸리게 되었고, 이제는 삼촌이 일을 시켜도 더 이상 노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의 와중 속에서도 독서에 열중했다. 성경은 매일 읽었고 그리스나 로마의 고전 책들도 수 없이 많이 읽었다. 그는 지적 호기심이 남달리 컸기 때문이다. 
▲ Dr, Samuel Johnson 
그는 12세였을 때 리챠드 클립톤(Richard Clifton)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16km나 떨어진 교회를 다녔다. 그 목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관행을 비난하고 영국 국교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앞장 선 청교도 목사였다. 그래서 그도 어려서부터 청교도 어린이가 되었다.
당시 영국은 제임스 1세 왕이 청교도를 박해하며 통치를 하던 때였다. 

한편 같은 청교도였던 존 로빈슨(John Robinson) 목사의 설교에도 귀를 기울렸다. 존 목사는 "영국 교회는 희망이 없다"며,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윌리엄 소년은 크게 감동했다. 
존 로빈슨은  종교개혁에 앞장섰던 목사였다. 그는 스쿠루비(scrooby) 마을에 있는 자신의 집에 매일 50여명의 교인을 모아놓고, 카톨릭식의 절차를 무시하고 칼빈주의를 받아들인, 개혁된 간략한 방식으로 비밀예배를 올렸다. 윌리엄도 항상 그 회중 속에 있었다. 
그런데 1607년에 비밀 교회가 탄로가 났다. 스쿠루비 마을 집회에 참석한 다수의 교인들이 체포되거나 투옥을 당하여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다행히 붙잡히지 않았던 교인이나 구속에서 풀린 교인들은 합세하여 아예 조국인 영국을 탈출하여 네델란드로 종교적 망명을 계획했다. 이 계획에 물론 윌리엄도 참여했다.

당시 네델란드는 종교개혁이 된 개신교 국가여서 비교적 종교적 자유가 허용된 곳이었다. 그러나 밀항을 약속한 선장이 변심하여 출항일에 당국에 밀고를 해버렸다. 그래서 일단은 모두가 구속되었다가 풀려났지만, 다음 해인 1608년 8월에 다시 스크루비 청교도들은 소수로 나누어 탈출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탈출에 성공하여 네델란드의 암스텔담에 도착하였다. 이 때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나이가 16세였다.
그 다음해 4월 경에 소도시인 라이덴으로 옮겨서, 그곳에 있을 때 윌리엄은 브루스터(Brewster)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며 기거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도 작은 희망이 생겼다. 1611년에 21세가 되었는데 생각하지도 않았던 영국에 두고 온 재산 소유권에 대한 판결에서 승소가 확정되어 큰 유산이 생겼다. 그래서 더부살이도 청산하고 이제는 집을 한 채 사서 자기 소유의 집에서 떳떳하게 생활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라이덴에서 면직물 공장을 차려서 제법 몫돈을 모으기도 했다. 
게다가 암스텔담에서 어느 영국계 부자집의 딸인 도로시 메이(Dorothy May)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이제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되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21세였다. 게다가 결혼 후 4년만에는 득남까지 했다. 그러나 이제는 네델란드를 떠나 신천지인 아메리카로 떠날 준비를 했다. 부인인 도로시는 약간 떨떠름한 표정으로 응했지만, 먼저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살던 집을 매각 처분했다. 이때가 바로 메이플라워호를 탑승하기 1년 전인 1619년이었다.

네델란드로 이주 해 있던 영국인 교도들이 다시 아메리카로 개척 이민을 가기로 한 주된 이유는 종교의 자유와 고국에 대한 애향심이었다.
네델란드에 와서 종교의 자유는 비록 누리고 있었으나 늘 불안한 상태였다. 자기들이 떠나온 고향인 스크루비(Scrooby)에서는 1617년에 비밀집회가 탄로나 수 많은 사람이 구속되고 수배를 당하였다. 이 때 일부 집회 지도자들은 수배를 당하자 그들도 네델란드 라이덴으로 피신을 해 와 있었는데, 영국 당국에서 이곳에 밀정을 보내어 은밀히 체포해 가려고 한다는 소문이 횡행했다. 그래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완벽한 자유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이 10여년 전에 영국 고향을 떠나왔는데 자녀들의 교육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들 자녀들은 영어보다 현지어인 네델란드 말을 더 선호하고 신앙생활도 부모들 처럼 신실하게 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향에 대한 전통이나 문화적인 것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자기네 식으로 예배를 볼 수 있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고 자기들을 두고 온 고향의 전통과 문화를 자녀들에게 계승시켜 나가기에 좋은 곳을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곳이 신세계로 알려진 북 아메리카 지역이었다.
그들은 그곳에 가서 새로운 영국, 그러니까 진정한 신앙이 중심이 된 ‘뉴 잉글랜드’(New England)를 만들어 잘 살아보자는 생각이 바로 메이플라워 배를 탑승하게 된 동기였다.

바로 그 때 영국 런던에서는 돈 많은 사람들이 주식회사를 만들어 신대륙인 아메리카에 이민사업을 추진 중이었다.
당시 영국 왕은 미국 동북부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확보하고 이런 주식회사들에게 식민지를 허용하는 특허장을 발급하고 있었다.
당시 사실상 남 아메리카는 스페인이나 포르투칼이 자기네 식민지라고 영유권을 주장해 놓고 식민지 장사를 하던 때였다.
이에 비해 북 아메리카는 무주공산이어서 영국이 먼저 이곳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영국 왕실에서는 어떤 의미에서 식민지 개척이란 명분으로 땅 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스패인과 포르투칼은 남미 지역에서 말만 식민지였지 사람들이 이민을 가서 살수 있는 정착촌을 개척하려 하지 않고, 현지에 있는 돈이 되는 금이나 은으로 된 물건을 사실상 약탈해 와서 자국과 유럽에 팔아서 일확천금을 벌려고 하거나 아니면 유럽상품을 싣고 가서 현지 원주민들에게 왕창 바가지를 씌워 비싸게 팔아서 이윤이 많은 장사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영국은 영토확장이란 한 수 높은 장기적 관점에서 자국민을 이민을 보내서 아예 그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영구히 정착시키려는 식민지 정책을 썼다.
그러면서도 통치하기에 골치를 아프게 하는 종교인들이나 범죄자들을 모두 몽땅 이민을 시켜버리고 좀 더 국내 통치를 편안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네델란드에 와 있었던 청교들이 미개척지인 아메리카로 개척 이민를 가는 일은 누님도 좋고 매부도 좋고, 서로가 좋은 일이었다. 말하자면 요새 말로 윈윈(Win-win)사업이었다.

존 카버(John Carver)와 로버트 쿠시맨(Robert Cushman)이 앞장서서 3년간 교섭 끝에 1620년에 버지니아 지역의 일부 특정 지역에 식민지를 개척할 수 있는 특허장을 영국 왕으로부터 받았다.
당초 출항 계획은 네델란드 라이덴에서 청교도 가족 50여명을 태운
스피드웰(Speedwell)이라는 범선이 델프스헤븐(Delfshaven) 항구를 출발해서 영국 플리머스에 있는 메이플라워 범선과 합류하여 아메리카 버지니아 지역을 향하여 출항할 계획이었다.
특히 두 척의 배는 신세계인 북아메리카 버지니아 지역 중에서도, 허드슨 강의 입구에 있는 북쪽 지역을 식민지 대상지역으로 특허를 받았고 그곳으로 출항 계획이 잡혀있었다.
스피드웰 범선이 네델란드 라이덴을 떠날 때 일부 이산 가족도 생겼다. 노약자나 어린이들은 다음 이민선에 오기로 했다. 그때까지 그들은 존 로빈슨 목사가 돌보기로 했다.

스피드웰이 떠나던 날 항구에는 윌리엄 브래드포드의 아들 존도 병약해서 부모와 함께 떠날 수가 없었다.
장시간 대서양을 횡단하는 뱃길에는 건강이 우려되어 외조부에게 맡겨야만 했다.
 
라이덴에서 출항하던 그날, 세살인 어린 존은 "아빠, 엄마, 같이 갈래. 날 버리지 마세요", 하고 울부짖으며 작별을 서러워 했다.
부두에서 작별을 하던 사람들이나 배에 탑승한 사람들이나 모두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인 ‘도로시’는 눈물을 꾹 참고 이렇게 소리쳤다.
“오! 마이 베이비! 내 아들 죤아! 울면 안 돼! 하나님이 널 우리에게 곧 데리고 올꺼야!”
그런데 메이플라워호가 플리머스에 도착한 후에는 부인을 배에 두고 남편인 브래드포드가 탐색대원들과 먼저 상륙했었다. 
막상 정착촌 자리를 탐색하고 배로 돌아 와 보니 부인이 사망했다는 비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인인 도로시는 암스텔담 대부호의 딸이어서 2달간의 고된 항해 중에 지쳐있었다. 더욱이 4살짜리 아들을 두고 온 죄책감에 괴로워 하였는데, 홀로 갑판에 나갔다가 우울증으로 인하여 바다에 투신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배에 있던 사람들은 갑판에서 갑자기 들이 닥친 파도에 휩싸여 발생한 사건이라고 하면서 애써 진상을 말하지 않았다.
모든 일을 꼼꼼하게 기록했던 브래드포드는 부인 사망 사건을 아무말 없이 1620년 12월 7일 부인이 사망했다고 그저 단순히 기록하고 있어 더욱 후세 사람들에게 그런 추정을 하게 한다.

아무튼 브래드퍼드 부부는 아들과 이별을 하고 영국 플리머스 항에서 스피드웰 범선은 기다리고 있던 메이플라워 범선과 조우하였다.
드디어 두 배는 도로씨의 앞으로의 운명을 모른 채 신세계를 향하여 출항하였다.
그런데 막상 출항하여 대서양을 향하는데 얼마 못 가서 <스피드웰> 범선에 고장이 생겼다. 이름 처럼 스피드가 쾌속이 아니라 더디 가는 굼뱅이 신세의 배가 되었다. 그리고 게다가 배에 물이 침수되기 시작해서 두 척의 배가 일단 회항을 해야만 했다. 그 배는 이름만 쾌속한다는 <스피드웰>이었지, 알고보니 더디 가는, 아니 고장난 <스피드배드.Speedbad>였다!
그러나 수리가 빨리 되지 못해서 메이플라워 단독으로 떠나기로 했다. 그래서 스피드웰에 탔던 사람들 모두 메이플라워 배로 옮겨탔다. 이 때문에 배안은 그야말로 초만원이 되었다.
이렇게 되지 일부 탑승객 중에는 준비를 보다 철저히 해야되는데, 청교도들이 이성을 잃고 너무 서둘렀다고 청교도가 아닌 일부 이방인들은 불평과 함께 후회도 쏟아냈다.
아마 이때 브래드포드의 부인인 도로시도 이 때 두고 온 아들 때문에 속으로 후회가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대부분 청교도들인 탑승자들은 자기들 앞길은 하나님이 이미 예비해 두웠고 지금 자기들이 떠나는 것은 단순한 이민이 아니라 하나님과 성경의 말씀을 더욱 잘 믿고 하나님이 계시는 천국으로 가기 위해 성지인 신세계를 경유해야 하는 일종이 순례길로 생각했다.
특히 그들이 라이덴을 떠날 때 마지막 예배에서 로빈슨 목사가 성경 히브리서 11장 13절을 말하며 떠나는 길에 축도를 해주었다.
아마도 이 축도에 감명을 받은 청교도들은 순례자와 같은 사명감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특히 로빈슨 목사는 그 히브리서의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아메리카를 향하여 먼저 떠나는 청교도들에게 용기와 믿음을 주기위해서 그들을 ‘필그림들’(Pilgrims: 순례자)로 비유하여 말하며, 용기를 갖고 떠나도록 축도를 해주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신세계는 종교적으로 오염이 될 것이 없는 곳이므로 가나안 땅과 같이 신이 점지해준 성지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만일 성지가 아니더라도 자기들이 신앙공동체가 되어 굳은 믿음으로 성지를 만들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일부 청교도는 순례길에 죽어도 곧장 천국이나 하나님께 직행으로 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거친 파도도 두려울 게 없다고 믿었다. 아울러 순례길이니까 하나님의 보호가 필히 계실거라 믿었다. 
그리고 자기들은 종교적으로 부패나 오염이 없는 순수한 순례자라고 자처하며 <일단 빨리 신세계로 떠나고 보자> 하며 서둘러 재촉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감성적 출발(emotional Departue) 준비라고 하면서 더 준비를 잘 하자는 측도 있었다.
이렇게 옥신각신 하다보니 신세계를 향한 출항이 생각보다 훨씬 지연되었다.
일부 이방인들은 신세계를 포기했다. 따라서 런던의 상인들이 만든
<머천트 어드벤쳐>회사에서 50명을 다시 채우려고 애를 먹었다.
개척 이민자들은 청교도와 비청교도 합하여 총 수가 모두 102명이었고, 추가로 선원들의 숫자는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약 30명 쯤으로 추정되어 결국, 총 탑승자는 130여명이었다.
이 탑승자 수는 선폭이 겨우 30미터 정도의 배에 무리였다. 메이플라워 범선의 수용능력을 볼 때 너무 초과된 탑승 인원이었다.

메이플라워호가 영국의 플리머스 항구를 출항한 것은 1620년 9월 6일이었다. 배 안은 화물과 탑승자들로 입추의 여지가 없이 만원이었다.
어쨌든 한 달 동안은 그런대로 순항했다. 그러나 두 달 째 접어 들면서 돌풍을 자주 만났다. 배는 돌풍에 휘청거렸다. 배가 심하게 흔들리며 배 안으로 파도가 넘쳐 들어 왔다. 탑승자들 대부분이 파도에 흠퍽 옷이 젖었다. 상당수는 배멀리에 시달렸다. 
이 때 고얀 젊은 선원이 멀미를 하며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고 못 참겠다는 듯이 욕설을 퍼 부었다.

"젠장! 앞으로 한달 더 가야하는데, 그렇게 못 견디면 되겠소? 하나님을 믿고 배를 탄 사람들이, 그렇게도 멀미를 참지 못하면, 남에게 피해 주지 말고 일찍 죽는게 났겠소. 죽으면, 내가 수장을 책임질터이니 수고비나 듬뿍 많이주고〜 잘 가시요"
이런 못 된 소리를 듣자 일부 탑승자들은 그 선원을 보고 소리쳤다.
"이 나쁜 놈아! 그런 말을 함부로 하다니! 오, 주여! 저 무례한 자를 벌하소서, 아멘!"
그런데 며칠 후 그 젊은 선원은 갑자기 발병하여 앓다가 죽었다.
모두가 한 마디 씩 했다.
"하나님께서 그 자에게 벌을 주셨도다!"

메이플라워호는 어려운 항해 끝에 드디어 9월 19일에 플리머스 만 앞에 있는 케이프 코드(Cape Cod)에 도착했다.
그러니까 영국을 떠난지 약 10주, 정확하게 말하자면 65일 만에 북 아메리카 연안에 도착한 것이다.
당초 식민지 특허를 받은 지역은 버지니아 지역으로 허드슨강 북쪽에 있는 땅이었다. 당시 버지니아는 현재의 버지니아 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을 지칭했다.
버지니아는 엘리자베스 여왕 때 최초로 이 지역을 영국의 식민지로 삼았던 곳이다. 그 당시 여왕이 처녀여서 여왕에게 헌정하는 충정에서, 첫 식민지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 지명이 버지니아가 되었다.
그 지명은 <처녀>를 뜻하는 영어 버진(Virgin)이라는 단어에다 통상 인명이나 지명 끝에 붙는 아(a)를 추가하여 버지니아(Virginia) 라고
명명된 것이다.
당초 특허를 받은 버지니아 지역을 찾기 위해서 메이플라워호는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7〜8일간을 더 내려갔다.
그러나 심한 겨울 바람에 버지니아를 찾지 못하고, 뱃머리를 돌려서 케이프 코드에 있는 프린스타운 항구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그곳에서 11월 11일부터 열흘간, 드디어 닻을 내리고 메이플라워호는 정박했다.

바로 이 때부터 미국 동부지역은 뉴잉글랜드라는 식민지를 만들게 된다. 이곳에서 첫 식민지로 정착한 곳이 바로 플리머스이다.
이 장소가 또한 미국 역사에서, 첫 페이지에 기록되는 역사적인 장소로 등장한다. 물론 영국 입장에서는 버지니아의 제임스타운이 첫 식민지였지만 그 결과는 실패였다.
본격적으로 식민지에 정착의 깃발을 꽂은 곳은 바로 <플리머스 정착촌>이었다. 그래서 미국사람들은 자기네 역사를 말할 때 플리머스는 미국역사에서 <정신적 고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플리머스 식민지, 이제 다시 그간 언급했던 플리머스 정착촌의 전후 사정을 다시 쉽게 정리해 보며 지나 가겠다.

메이플라워를 탔던 영국인 청교도들이 아메리카로 갈 생각을 한 첫 번 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 전에 프랑스에서도 순례자를 자처하는 개혁 신교도들이 있었다.
그들은 영국 청교도들 보다도 이미 55년 전에 종교의 자유를 찾아서 아메리카로 떠나 왔던 프랑스 정착민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들은 아메리카에 와서 정착촌을 결코 이루지를 못 했다.
자기들이 도착한 곳에는 이미 스페인 사람들이 죽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프랑스인들이 <포트 케롤라인>이라는 한 정착촌을 잠시 세웠던 루터주의의 개신교들이었다.
그들은 이제 카톨릭이 판을 치고 개신교를 탄압하고 있는 유럽에서 멀리 떠나왔거니 했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개신교도의 신앙촌을 만들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바로 카톨릭교를 국교로 삼고 개신교를 증오하던 스페인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곳에 주둔하고 있던 스패인 군대들이
프랑스 개신교도들을 하룻 밤에 몰려 와서 모두를 몰살 시켜버렸다.
그들이 내뱉는 이유는 바로 이 한마디 였다.
“너희는 루터를 따르는 개신교놈들이야!”

스페인 군대들은 프랑스 개신교들이 살고 있는 정착촌의 담벽에 사디리를 걸치고 넘어 들어 와 야간 급습을 감행했다. 그리고 침실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잔인하게 살해했다. 이 때 프랑스에서 온 개척민들이 무려 132명이 학살을 당하고 만다.
이런 일이 있은 후 프랑스는 당분간 아메리카 식민지 사업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다시 메이플라워에 탔던 특이한 탑승객들인 어린애 4명 이야기를 잠깐 언급해 보고 지나 가겠다.
메이플라워호가 영국을 떠나기 전에 부인에게 침을 뱉고 자기 자식들을 메이플라워에 태워서 멀리 보낸 비정한 아버지의 이야기도 있다.

메이플러워에 탔던 탑승자 명단에는 좀 드문 성인 모어(More)라는 성이 있다. 그래서 모어 자식들(The More Children)이라고 적혀있다.
메이플라워에는 당초 102명 중에서 탑승자들의 자녀들인 어린애들이 무려 32명이나 동승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 이 어린이들 4명은 동반한 부모가 없었다. 사연인 즉 이러했다. 
4명의 어린이는 모두 부모가 없이 메이플라워호에 태워졌다. 이들은 아메리카로 가는 9세 이하의 어린 나이였다. 
이 애들의 부모는 사무엘(Samuel)과 캐서린(Katherine)이었다. 부인 캐서린은 모어의 자식들이라고 해도 의처증이 있는 남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부인이 그저 남자 친구 사이라 해도 그 놈의 자식들이라고 의심을 했다. 왜냐하면 얘들이 커 갈수록 자기를 닮지 않고 그 자를 꼭 빼다 박은 듯이 닮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아라는 자는 자기 부인과 이혼을 했다.

그런데 당시 영국 법에는 자녀는 남편이 양육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는 부인이 미워서 악의를 품고 애들을 청교도들에게 맡겨서 메이플라워에 태워버린 것이다. 물론 메이플라워 운임요금인 배 삯은 그들의 아버지인 그가 지불했었다. 

그 4명의 어린애들은 65일의 항해기간은 잘 견디고 플리머스에 잘 도착했으나 첫 겨울을 못 보내고 한 명은 먼저 죽었다.
그 후 두 명도 죽었고 마지막 한 명이 살아남아서 쌀렘 지역에 정착해서 살다가 죽었다.
그런데 그는 분명히 아버지의 나쁜 혈통을 받았는지, 말년에 남의 부인과 불륜을 저질러서 유죄판결을 받고 처형을 당해 죽었던 것이다.

메이플라워호는 모두 청교도들만 탄 배가 아니었다.
사실상 메이플라워를 탔던 102명 중에서 순수 청교도인들은 과반수를 넘지 않았다. 60명은 영국 국교도(Anglicans)들이었다.
그러나 메이플라워호를 렌트했기 때문에 비용을 덜기 위해서 그들이 함께 가겠다는 것을 막지를 못 했다. 배를 두 척이나 임대를 해서 2개월 이상 항해를 하여 신세계인 아메리카로 가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다.
물론 정착촌을 형성할 때가지 필요한 준비물을 마련하자면 비용도 많이 들었다. 투자자들도 필요했고 식민지에 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모집하는 것도 필요했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자기들의 아메리카로 가는 목적만은 뚜렷하게
구별하고 싶었다. 그들은 비청교도들을 이방인(Strangers)이라 칭하고 자신들은 순례자(Pilgrims)나 성자들(Saints)라고 자처하고 싶어 했다.

영국 플리머스 항구에서 두 척의 배가 신천지, 아메리카를 향해서 출발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항구를 벗어나기도 전에 한 척의 배인 <스피드웰> 호가 고장이 났다. 게다가 배에 틈이 생겨 물이 선실로 흘러들어 왔다. 그래서 두 배는 일단 회선했다가 <스피드웰>호는 수리가 제 때에 될 수가 없어서 메이플라워 한 척만이 단독으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되자 <스피드웰>에 탔던 탑승자들이 우루루 메이플라워로 합류를 하여 총 102명이 탑승하게 되어 메이플라워 호의 선실은 그야말로 초만원 상태가 되고 말았다.
메이플라워의 길이는 겨우 30미터이고 선적 용량은 160톤 규모의 크기여서 선실의 크기도 작은 교실 두 개를 겨우 합해 놓은 정도였다.
우리나라 세월호가 길이가 약 150미터이고, 선적 용량이 약 6800톤이라고 하니, 이를 비교해보면 얼마나 비좁고 작은 배였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메이플라워호가 플리머스에 도착했을 때 살아남은 청교도는 단지 32명이었다. 약 70명이 비청교도들이었다.
이러다간 정착촌이 형성되었을 때 자기들이 원했던 신앙촌 사회를 만들기에 주도권이 상실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들었다. 그래서 청교도들 중에는 몇 명의 탁월한 지도자급 사람들이 나서서 상륙하기 전에 협약을 미리 맺어, 그 협약에 따라 선출한 지도자에게 누구나 복종하기로 했다.
사실상 정착촌이 형성됐을 때 계속해서 청교도들 중에서 플리머스 식민지 지사가 선출되었고, 결국은 비청교도들도 정착촌의 질서와 법규에 따르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비청교도들과의 질서 유지를 도모했다.

플리머스를 정착지로 삼은 이유 중에는 배 안에 싣고 온 맥주가 거의 동이 났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어 여기에 소개해 본다.

청교도들은 검소 근면 금욕 생활을 앞세워 청빈한 기독교인을 꿈꾸어 왔다. 그래서 금지하는 음식물이 많았다. 그러나 맥주는 예외였다. 청교도들은 도가 넘을 정도로 맥주를 많이 마셨다. 사실, 그들은 탑승 전에 메이플라워호에 식수보다도 맥주를 더 많이 싣고 왔었다. 
당시 영국은 산업화 시대가 열리면서 공업용수가 하천에 흘러들어 식수 공급이 부족했다. 따라서 대부분 사람들은 오염 가능성이 있는 물 보다는 집이나 공장에서 빚은 맥주를 물 대신에 즐겨 마셨다.
게다가 물은 집에 오래 보관할 수가 없었다. 영국인들은 왜 맥주를 자주 마시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한다,
“물은 쉽게 오염되어 함부로 마시면 배탈이 나니까요”
마치 왜 위스키를 자주 마시느냐 물으면 이런 대답으로 변명하는 것처럼 들린다.
“위스키는 충치를 예방하니까!”

크리스마스가 되자 맥주 때문에 소동이 일어났다.
두 달 이상이나 좁은 공간에 틀어 박혀 항해를 계속해 왔기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질병에 시달린 사람도 많이 발생했다.
그러나 맥주가 바닥이 나고 있다는 소문에 한 동안 배안에서 소동이 벌어졌다. 
맥주는 당시 영국인들에게는 식수였다. 식수가 바닥이 났다고 하니 서로 창고에 있는 맥주를 꺼내먹으려 했다.

드디어 맥주는 배급제로 통제되었다. 맥주를 마시고 싶을 때 못 마시시게 되자 이들에게는 그 시간이 악몽처럼 느껴졌으며 이런 불평을 토해냈다.
“아! 영국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물 마시듯이 맥주를 마실 수 있었는데∼ 젠장 이럴 수가!”
이 때문에 당초 특허를 받았던 버지니아 일부 지역에 정착하는 일을 도중에 포기하고 서둘러 플리머스에 정착촌을 세웠다.
‘맥주 사건’이 바로 그렇게 촉구시켰기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주장도 최근에 나오고 있다.

그런데 당시를 기록한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선상에서 비를 받아 마셨다”
사람들은 불평을 하며 물바가지를 발로 걷어차 버린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맥주를 찾는 사람들 먼저 상륙시켜, 숲 속에서 냇물을 찾아 마시라고 사실상 강제로 배에서 내리게 했다.
특히 진짜로 맥주가 바닥이 났는지를 확인하겠다고 선실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는 모두 하선시켰다.
그러나 이런 고통과 소동도 얼마 가지 않아서 끝이 났다. 왜냐하면 우선 급선무로 맥주를 빚는 임시 가설 공장을 만들어, 물 대신에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 원주민들 무덤을 약탈 사건도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잠깐 언급하고 지나가 보겠다.

청교도들이 플리머스에 상륙했을 때 그 주변에는 상당수의 인디안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을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막상 해안 지역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도 어떤 인디언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밤이면 아주 먼 곳에서 인기척을 알리는 모닥불이 깜박깜박 이따금 희미하게 보였다. 그래서 그들은 인적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훑고 다녔다. 그러다가 텅빈 마을을 발견했다.

살아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하얀 뼈들과 해골들이 군데군데 굴러 다녔다. 그리고 마을 저장소에는 식량으로 비축해둔 옥수수와 콩이 쌓여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 원주민들은 한동안 전염병이 마을에 심하게 돌아서 몽땅 떼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 전염병은 유럽의 어부들이  고기를 잡으러 왔다가 옮긴 병이라고 했다.
아마도 이 마을뿐만이 아니라 인근에 있는 뉴잉글랜드 지역의 여러 마을에서도 90퍼센트 이상이나 마을 사람들이 이 병 때문에 죽어 나갔다고 했다. 그래서 마을마다 사람들은 없어도 비축된 식량은 다소 남아 있어 이것은 영국 청교도들에게는 엄청난 횡재나 다름이 없었다.

청교도들은 우선 다 죽어 없어진 그들에 대한 연민의 정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이 순례자들인 자신들을 보살펴 주려고 미리 예비한 것으로 보고,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 주심에 감사드렸다고 한다.
죤 윈드롭은 이를 기적이 일어났다고 이렇게 그의 글에 남겼다

“하나님께서 이곳을 우리의 땅으로 예비하여 주셨다”

청교도들은 인디언이 남긴 옥수수를 차지했고 게다가 그들의 무덤도 약탈했다. 그 속에 있는 부장물 속에서 쓸 만한 것은 꺼낸 후에 다시 시신은 묻어 주었다.
플리마스 청교도들이 살아 있는 인디언을 찾으려다 자포자기하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맨 처음 만난 인디언이 나타났다. 그가 맨 처음 요청했던 것은 바로 ‘맥주’였다.
청교도들이 한 창 정착촌에서 살 집들을 짓고 있을 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중 그 인디언 남자는 용감하게도 그들 앞에 접근해 오더니 다짜고짜로 영어로 인사를 하며 다가왔다.

“환영해요, 영국 사람들!”(Welcome, Englishmen!)

모두 깜짝 놀랐다. 서툰 그의 토막 영어였지만 의사소통이 되었다.
그의 이름은 사모세트(Samoset) 였다.
그는 손을 내밀며 서툰 영어 발음으로 뭘 달라고 했다.


▲ 청교도 정착촌을 찾아 온 ‘사모세트’ 인디안(그림)



“비어, 비어, 비어!”
바로 그가 원하는 것은 맥주였다.
그는 전에 이곳 연안에 고기를 잡으러 왔던 영국인 어부들을 자주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맥주도 얻어 마셔 본 경험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로부터 몇 마디 토막 영어를 배웠다고 했다. 맥주가 그에게까지 줄 것이 없어서 그 대신에 독한 술을 마시라 했다. 그는 그 술이 더 기분을 좋게 한다고 하면서, 계속 더 마시려고 했다. 이제 자기네 마을로 돌아가라고 해도 가려 하지 않고, 술을 자꾸 더 달라고 칭얼댔다. 할 수 없이 독한 술을 많이 마시게 해서 그날 밤은 캠프에서 곯아떨어진 채 자게 하고, 다음 날 자기네 마을로 돌려보냈다.
그런 인연으로 그 후에 ‘사모세트’는 청교도들이 죽음의 고비를 맞이했을 때 여러 번 구해주었다. 그리고 그는 앞장서서 청교들과 인근 원주민들인 ‘왐파노아그’ 부족들과 화평조약을 맺게 알선해 주었다. 그리고 자기 소유의 땅이 아님에도 자기 땅이라고 하면서 최초로 돈을 받고 인디언 땅을 청교도에게 팔아먹었다.
말하자면 그는 미국판 봉이 김선달 노릇을 한 인디언이었다. 그는 땅 매매 문서에 서명까지 한 최초의 인디언이 되었다.
‘사모세트’는 자기보다 영어를 훨씬 더 잘하는 사람을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그가 소개해 준 인디언이 바로 ‘스콴토’(Squanto)였다. 스콴토는 영어를 영국사람 못지않게, 유창하게 잘했다. 그런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스콴토는 6년 전에 토마스 헌트(Thomas Hunt)라는 영국인을 만나게 되었다. 헌트는 버지니아 제임스타운 식민지 정착촌에서 존 스미스 선장의 뒤를 이어 지도자급으로 정착촌에서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처음엔 헌트가 다른 23명과 함께 그를 납치해 갔다고 한다.
헌트는 그를 스페인으로 싣고 가서 노예로 팔아먹었다.
그곳에서 스콴토는 다시 한 영국인에게 팔려 갔다.
그는 그 영국인의 하인이 되었고, 그에게서 영어를 배웠고, 그의 통역사가 되어 북아메리카 뉴파운드랜드에서 식민지 사업을 벌이려고 한 그를 따라서 왔다 한다. 그런데 뉴파운드랜드에서 다시 팔렸다.
이번에 주인은 영국인 토마스 더머(Thomas Dermer)였다.
‘더머’는 그를 메사추세츠로 데리고 왔다.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잡게 되어 그는 고향까지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가 고향인 플리머스에 도착해 보니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어 있었다. 2∼3년 전, 고향 마을에 전염병이 휩쓸어서 몽땅 참변을 당한 것이다. 전화위복이라고 그가 납치되어 노예 신세가 된 것이 오히려 그를 살아남게 한 것이다.
고향 지역에 있을 때 자기 주인인 더머가 왐파노아그 인디언들에게
붙잡혀 죽음에 처해 있었다. 이때 스콴토는 왐파노아그 추장에게 애걸복걸 호소하여 주인인 더머의 목숨을 구해주기도 했다.
이에 감명받은 더머는 스콴토를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되도록 허용해 주었다.
이렇게 스콴토는 플리머스가 식민지로 정착하는데 통역사로서 큰 역할을 했다.
스콴토는 청교도들을 인디언들에 대한 정복자나 박해자로 보지 않고 오히려 청교도들이 정착하도록 많은 도움을 준 인디언이다.
만약 그의 통역과 또 도움이 없었다면 청교도들의 플리머스 정착촌 건설은 지난했을 것이다.
그는 옥수수 심는 방법과 땅을 북돋아 주고 거름을 주어 재배하는 방법을 정착민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올 때 밀, 완두콩 등 여러 농작물 씨앗을 가지고 왔는데, 씨앗이 상했거나 아니면 아메리카 토양과 기후 탓인지 발아가 잘되지 않았다. 발아된 씨앗도 거친 토질에서 성장이 더디었다.
그러자 스콴토는 인근 개천이나 해안가에서 많이 잡히는 생선이나 이들을 말리다가 썩힌 것들을 옥수수를 심을 구덩이 마다 생선 3∼4마리를 묻어서 거름으로 삼는 법과 한 구덩이에 옥수수 낱알을 3∼4개 함께 심고, 이것들이 움이 트면, 북돋아 주고, 바람이나 빗물에 견디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옥수수 심기와 생선으로 거름 이용법을 가르쳐 주고 
있는 스콴토 모습
그리고 장어나 생선들은 갈대 줄기로, 한쪽은 막았다 열 수 있는 통발을 만들어 물고기 떼가 모이는 곳에 설치하여, 잡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 통발은 박물관에 전시품을 보니까 마치 옛날 우리나라에서 죄수들의 머리에 씌웠던 용수처럼 생겼다.
그리고 그는 과일이나 식용 열매를 많이 채취할 수 있는 장소도 가르쳐 주고, 약초들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조개 등 어패류를 바닷가에서 돌이니 바위를 들추어서 잡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인디언들의 특산물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또한 인근 인디언들과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상거래도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는 도가 지나쳤다. 그는 일부 정착민과 인디언들에게 총이나 고급 기술 등 무기 거래도 주선했다. 그리고 영국인 말고 기타 유럽인들과 인디언 사이에 교역도 관여하였다.
그는 그런 거래를 통해서 선물이나 대가도 양쪽에서 받으며 나름대로 챙겼다. 어떤 경우에 인디언들이 거래 상품가를 너무 비싸게 부르고, 자기가 요구한대로 들어 주지 않으면, 영국인들이 무서운 전염병을 뿌리거나, 총이나 대포로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 거라는 등
헛소문이나 겁박을 주기도 했으며, 영국인들을 믿고 권력자 인양 과시하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점차 인디언들로부터 미움을 사고,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그의 행동은 거침없이 너무 멀리 나가고 있었다. 그는 왐파노아그 부족의 추장인 ‘마사소이트’ 면전에서도 화를 버럭버럭 내기도 했다.
그는 추장이 자기 말을 듣지 않게 되면 영국인들을 동원해서 그를 죽여 없앨 수 있다고까지 했다.
그리고 때로는 영국인들마저도 속이려고까지 했다.
어떤 때는 영국인들에게 왐파노아그 족을 먼저 공격해서, 추장을 없애야 한다고 확신시키려 했다.
이렇게 되자 왐파노아그 추장인 마사소이트는 스콴토가 2중 간첩으로 농간을 많이 부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영국인들에게 알리면서 그의 목을 달라고 요구했다.
영국인들은 한때 그렇게 하려다가, 아무래도 당분간은 스콴토의 도움이 더 절실하다고 믿고, 오히려 당분간은 스콴토 편을 들며 그를 한층 보호했다. 실제 그가 중요한 역할을 잘 해왔기에, 청교도들도 그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도 1622년에 인디언 열병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플리머스 지사였던 윌리엄 브래드포드는 그의 죽음을 “청교도와 정착촌에는 큰 손실”이었다고 안타까와하면서 그의 저서에 기록을 남기었다.
아무튼 플리머스 식민지(Plymouth Colony)는 버지니아 다음으로 북아메리카에서 두 번째로 영국의 식민지가 된 곳이다.
물론 뉴잉글랜드 지역에서는 첫 번째이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1620년부터 1691년까지 71년간 북아메리카에 개척된 영국 식민지의 선구적 지역으로 있다가 메사추세츠 식민지에 통합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최초의 플리머스의 지명은 존 스미스 선장에 의해 사전 탐사되어 그 이름이 ‘뉴 플리머스’로 지어졌었다.
이 ‘뉴 플리머스’는 그 지역 식민지의 수도가 되었고, 현재는 매사추세츠 주에 속하는 ‘플리머스’ 카운티가 되어 있다. 그 전성기의 플리머스 식민지는 현재의 매사추세츠 주 남동부의 대부분의 땅을 영유하고 있었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앞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청교도들, 일명 ‘필그림 파더스’(Pilgrims fathers)로 알려지게 된 종교 분리파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북미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설립된 가장 초기의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그리고 뉴잉글랜드 지역에서는 최초로 상당한 규모의 개척지가 되었다.
특히 앞서 말한 인디언 스콴토의 도움을 받아, 플리머스가 식민지로서의 성공을 보증해 준, 〈마사소이트 추장과 평화조약〉을 맺을 수도 있었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특히, 인디언과 가장 초기의 유혈 전쟁이 된 ‘필립 왕 전쟁’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 후 1691년에 플리머스 식민지는 ‘매사추세츠 주와 합병’되어 버린 것이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미국 역사에서 특별하다.
제임스 타운의 많은 개척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왔는데, 플리머스 청교도들은 종교적 박해를 피해 종교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삶터를 찾기 위해서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식민지 사회제도, 법적 체계는 개척민들의 믿음을 바탕으로 구성하였다.
플리머스 식민지의 많은 사람들과 또 그것을 둘러싼 사건은 미국의 신화가 된 ‘추수감사절’과 더불어 북아메리카의 전통이 된 ‘플리머스 바위’라는 기념비를 탄생시켜 놓기도 했다.
플리머스 식민지는 비교적 단기간에 소멸되었지만, 오늘날 ‘미합중국’이라고 부르는 나라에 초석이 되는 중요한 표상이 되어 오고 있다.












월산 이상완
호: 월산越山, 전남 고흥(1945), 향토사학자, 수필가, 고흥동초등학교, 고흥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1964), 서울대학교 언어학과(1974) 졸업, 카이로 아메리칸 대학원 수료, 아랍어 및 고대 이집트 문화사 전공(1977〜1979), 미국 조지타운대학원 졸업(이슬람 문학 및 중동관계 전당)(1981〜1986) 주이집트, 주리비아, 주미대사관 및 주호놀룰루 총영사관, 바로영어전문학원 경영(서울, 1992〜2012-20년), 《한강문학》 수필부문 추대 등단(2020),한강문학회 편집위원, 저서 《사하라》(김영사, 1987), 현재활동: 향토사 연구 및 블로거, 발간작품: 〈조선시대 천재 이야기꾼〉, 〈어우당 유몽언〉, 〈오리점에 묻힌 슬픈 로맨스〉(화가 나혜석 이야기), 〈한국미술계 큰 별이 지다〉(화가 천경자 이야기), 〈마크 트웨인 & 스토우 부인 하우스 탐방기〉, 〈헤밍웨이 주요 작품 탄생지 ‘키웨스트 섬’ 탐방기〉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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