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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출생지

작성자이영숙|작성시간26.06.08|조회수51 목록 댓글 0

출생지

 

이영숙

 

 

역마다 들르는 기차를 타고 왔다

꽃잎을 훑어 손을 씻으며

기차를 보내고 다음 기차를 기다렸다

기차를 부리는 사람처럼

기차에 연연하지 않았다

 

정오가 반으로 접혀 나를 옆 페이지로 옮기면

잠시 쓸쓸해져

XXL 사이즈처럼 헐렁한 허공을 입고

기차가 가는 방향으로 따라 걸었다

사람들은 내가 미로에 갇혔다고 믿는 듯했으나

아시다시피 기차는 상행과 하행만 있다

 

지나온 날들이 눈에 띄게 줄고 있다

그땐 왜 그랬지 이런 질문도 종국에는 잦아들고야 말겠지만

애초부터 기차는 수직을 피하고자 멀리 도는 쪽을 택했다

산 하나를 다 넘으면서도 숨이 차지 않았다

지름길로 오느라 이 모양이 되었다는 말

기차에겐 통하지 않았다

 

한쪽 눈을 감고 총을 겨눈다

이 총알은 언제가 내게 돌아올 것이다

확신하면서 구식으로

검지가 방아쇠에 걸릴 때만 해도 세계는

완행이었다 이제는

타깃이 된 폐건물 사이에서

너덜너덜해진 허공을 당겨 입는 집시들이 늘고 있다

 

기차가 서지 않고 역을 통과한다

서울에서 경주쯤은 차 한 잔 길게 마실 거리

기차에 연연하지 않는다니, 제정신이야?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서울 쪽으로 펄럭인다

멈추었던 발길을 다시 떼지만

봄에서 떠나 가을에 도착한

잘린 손톱처럼 각이 선 표정으로는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한다

 

사실 나는

온 데도 없이 갈 데도 없이

이 역에서 나고 자라 이 역에서 늙어가는 중이다

 

  ―《시와문화》 2026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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