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장 가까이 있는 것에서 배움
사회:유교의 가르침이 덕행을 배우는 것인 이상,유교에서 말하는 근절近切(가까운 데서 묻고
가까운 곳에서 생각함)의 가르침은 아주 자연스러운 조류라고 봅니다. ‘근절’이라는 말은 “배움을 넓게 하고뜻을 독실하게 하며간절히 묻고 가까이 생각하면 仁이 그 가운데 있느니라”고 한 말에 의거합니다만, 그 근절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말하면, ‘가장 가까운 것을 생각하라’는 것이 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공자께서 언급하신 인은 지고의 덕이므로 공자님은 제자들에게도 쉽게 인자라는 평가를 허용하지 않으셨지만, 실제로 그 인이라는 것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고 또 가까운 곳에서 찾아 닦아야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인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질고자 하면 곧 인이 나에게 이르는 것이다.”라는 말씀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도는 가까이 있다”는 맹자의 말입니다만, 도를 먼 곳에서 구하지 않는 것이 배움에 대한 공자님의 심오한 뜻이겠지요.
■ 노자의 비판, 배움을 끊으면 근심이 없으리라
노자:참으로 공자님과 그 제자들은 학문수양의 필요성을 너무 큰 소리로 떠드는군요. 뭐 그것도 괜찮기는 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과는 반대 입장을 취해왔습니다. 공자와 맹자 두 분께서는 사람의 근심과 고통 또는 국가 사회의 혼란과 분쟁은 사람이 지혜롭게 살지 못하고 도덕과 인의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오히려 인간이 하잘 것 없는 지혜를 다투어서 이것저것 쓸데없는 인의도덕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자연으로 돌아가자, 무위無爲 즉 인위적인 것을 하지 말고 그대로 있자, 인간의 모든 수양을 그만두자고 말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양엥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학문이고 지혜는 학문에 의해 연마되며 예는 지혜에 의해 장식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당연히 필요없는 말입니다. 그래서 나는 “학문을 끊으면 근심이 없으리라, 공손하게 대답하는 것과 불손하게 대답하는 것의 차이는 얼마나 되며, 선과 악의 차이는 얼마나 되는가?”라고 냉소적인 말을 세상에 던졌던 것입니다. ‘예’는 정중한 대답이고 ‘응’은 건방진 대답이란 말입니까?
사람은 학문 수양을 통해서로 간에 대응하는 도를 배우고, 그것에 의해 인간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도대체 배움으로 습득한 정중한 대답인 ‘예’와, 배움도 예도 익히지 못한 ‘응’이라는 대답 사이에 본질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단 말입니까?또한 선과 악 옮고 그름 또한 마찬가지고과연 절대적인 선악과 시비가 있을까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복잡하게 구별하려고 합니다. 영리한 체하는 지혜가 오히려 사물과 일을 혼란하게 하지는 않을까요? 요켠데 학문은 허식이며 지식과 사고 역시 인간사회를 더욱 더 번잡하게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가합니다. “학문을 위해서는 매일 보태야 되고, 도를 닦으려면 매일 덜어버려야 한다.” “많을수록 미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진실이 아니겠습니까? 학문에 의해 연마된 지혜와 인·의·예·지· 이러한 일체의 것을 끊어버리고 운명도 지식도 없고성인도 현인도 없으며,인의와 도덕이 없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행복과 평안, 그리고 국가와 사회의 안녕과 태평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성스럽다고 하는 것을ㅇ 끊고 지식을 버리면 백성이 백배나 이로울 것이요, 어질다는 것을 끊고 의롭다는 것을 버리면 백성이 모두 孝와 자애(慈)를 회복할 것이다.”
어쩌면 이런 말들이 냉소적인 말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이것이 진정한 도입니다.
석존:음… 역시 준엄하십니다.
사회: 그러면 배움에 대해서는 그 정도로 해 두고, 다음은 가르침에 대해서 공자님의 의견을 계속 들어보도록 할까요?
-그림은 pinterest에서 모셔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