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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시

[스크랩] 하루 (외 1편) / 장석주

작성자시강|작성시간11.12.01|조회수16 목록 댓글 0

하루 (외 1편)

—주역시편 202

 

   장석주

 

 

 

돌아서면, 거기 네가 서 있다.

아침엔 다리가 넷이다가 낮엔 둘,

저녁엔 셋이 되는 하루.

마치 태어나서 미안하다는 얼굴이구나.

밥과 젊음 없는 젊음은 우리를 자주 속여

하루를 지루함 속에 주저앉힌다.

후회하지 마라, 더는 선량해지지 않으마.

더는 고약해지지도 않으마.

수요일에는 동물원엘 가고

금요일 저녁엔 사람 붐비는 술집들을 순례하마.

희망은 단순하고 인생은 복잡하겠지만,

어쨌든 소란과 안달은 하루와 함께 끝난다.

우기 뒤에 곧바로 가을이

하루라는 용병(傭兵)들을 이끌고 쳐들어온다.

가을의 달은 높고 풀벌레 소리들은

낮은 음역대에서 번성한다.

물푸레나무 잎들이 우수수 떨어지면

하루는 우연과 서리들을 데려오겠지.

어제는 누가 죽거나 태어나고

몇 건의 차량 접촉사고가 일어나고

하루는 버거워 해도 한 해는 너끈하게 견뎌내는

노모에게도 별 일이 없었다.

삶은 한 점 눈물도 요구하지 않고

세월은 하루보다 더 멀리 데려가지도 않았다.

나는 내 횡격막 아래의 침묵에 귀 기울이는 독자다.

침묵의 슬하에서 분노가 버섯처럼 자라는데,

일요일이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하루여, 내가 돌아다보면 너는 거기에 없고

어제보다 하루 더 늙은 여자가

난독증 소년을 데리고 횡단보도 앞에 서 있다.

 

 

 

                                —《세계의 문학》2011년 겨울호

 

 

 

 

잎과 열매

—주역시편 133

 

 

 

   오라 오라 갈 수 없으니 못 간다 등 뒤에서 닫히는 문들 나는 불만을 터뜨린다 나는 용의자가 아니다 나는 탁발 한 벌을 받아 길을 떠나는 사미승이다 너는 단 하나의 태양만을 머리에 이고 있는가 해가 있고 길 있는데 왜 못 오나 오라 유빙遊氷으로 떠돈 세월 길어 뼈에 찬바람이 드세다 그 찬바람의 종족種族들이 품어 기르는 새들은 연약하다 나무 아래 만들어진 그늘과 공중의 새들은 근친 관계이다 날개 가진 것은 위도 없고 아래도 없다 염치가 있었다면 누가 네 염의를 마름질할 것인가 떠나면서 뒤도 돌아보지 않았던 집이 어찌 멀다 하지 않으리 가면 가겠지만 못 가면 못 갈 것이다 밤의 모호함에 대해 의심을 갖지 마라 춤추며 까르륵거리는 소녀들의 예쁜 발들을 보라 춤추는 자와 웃는 자가 하나다 애초에 마음은 고아였으니 타관을 떠도는 일이 녹록치 않다 해도 크게 낙담할 일은 아니다 마음에 잎사귀들을 달고 밖으로 나섰는데 바람을 피할 수 있었겠나 떡갈나무 수만 개의 잎들에 수백만의 빗방울들이 열렸다 중력의 귀신들이 그 수백만의 빗방울들을 기어코 땅으로 끌어내린다 그때 나는 아직 태어나기 전이다 밖으로 끌려나와 심문을 받은 것은 누구인가 함부로 우는 자들의 진실을 항상 의심하라 그들의 진실은 잘 변질된다 신앙을 키우는 것은 늘 불순한 날씨들이다 자식의 머리 위로 독수리가 날게 하고 그의 팔에게는 역경逆境을 안겨라 씨를 파종하고 죄의 열매들을 수확하는 가을의 각성覺醒들이 기백 번 지나갔다 죄는 번개처럼 사람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노래가 열리는 나무들이 자라는 땅에서 난민難民들이 땡볕을 피해 그늘에 앉아 있다 저들은 이미 후생後生을 준비한다 나무가 죽으면 노래도 더는 열리지 않는다 노래 나무가 죽으면 황사가 온다 나도 무렴無鹽 채소와 곡밥 먹고 말 떠난 빈 구유간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살았다 다시는 삶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 마라 입에서 나오는 게 말이라고 말 마라 오직 가면을 쓰고 걸어라 바다를 끼고 양쪽으로 암벽이 솟고 그 암벽 위를 걸었다면 알 것이다 내가 잠들어 있을 때 흑염소들이 와서 이마에서 돋는 노래의 싹들을 뜯어 먹는다 흑염소들이 아귀아귀 뜯는 것은 내 눈이고 귀며 혈관이고 심장이다 내가 괴롭지 않았다면 정말 누군가가 괴로웠을 것이다 저 다리를 건너가게 해다오 배들이 떠나는 항구를 나의 배후에 놓아다오 축축한 불멸들 끔찍한 우연들 목격자에 대한 복수는 없었다 날개가 적의에 대한 정당성이 될 수는 없다 길이라고 다 길인가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 나를 부르러 오는 자가 있다 갈대밭에 숨지는 않겠다 모든 길은 길이 아니다 단 하나의 수수께끼를 풀어라 넝쿨 우거지고 키 작은 풀들 뒤덮은 땅을 멧돝과 고라니가 먼저 가고 나중에 사람들이 가니 길이 되었다 길이라고 다 길인가 불운한 길들도 있다 길의 발목을 돌보지 않고 길의 섭생을 도모하지 않았다면 길은 없다 먼지의 살해자들이 지나가고 조수초목鳥獸草木의 살해자들이 지나가고 그 뒤를 따라 길의 운수납자들이 지나간다 누가 내 몸을 빌려 거기에 죄를 싣고 괴로워하겠느냐 먼저 불길한 탄생들이 있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비를 실은 구름이 다가오고 어느 날부터 비가 내렸다 언덕들이 물에 잠기고 이윽고 산천초목들이 물에 잠겼다 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지각변동地殼變動이 일어난다 왜 너는 늑대가 아니라 늑대가 다니는 황폐하고 고독한 길이 되려고 하느냐 네가 스스로 네 마음을 극소화시켜 횡격막 아래 숨기는구나 이 극소화의 분할로 너는 끝끝내 발견되지 않은 현상이다 네 마음은 늘 너의 배후다 너는 네 배후로 불굴의 패배를 부양하는구나 패배를 배우지 못한 것들이 거들먹거린다 한줌거리도 안 되는 승리에 취해 있는 자들을 해일이 덮쳐 쓸어 가리라 밤에는 너의 정원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수관水管으로 물오르는 소리 그 물오르는 소리가 달을 키운다 초승에 잠들고 온달에 잠 깨리라 일찍이 너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었다 막 태어나려는 선과 막 태어나려는 악들 사이에서 양귀비꽃들이 피어난다 빗방울들을 잔뜩 수태한 검은 구름들이 만나 천둥과 번개들을 만든다 한 꿰미의 천둥 열 타래의 번개들 땅이 사십 년 간 메말랐으니 이제 비가 뿌려도 좋을 것이다 춤추고 노래하던 소녀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초경을 하지 않은 어린 무당들이 모여서 기우제를 지낸다 열매 맺고 꽃 피나 아니다 서리가 내린 뒤 얼음이 어는가 아니다 꽃 피고 열매 맺고 서리가 내리고 얼음이 언다 나는 서리고 너는 얼음인가 나는 꽃이고 너는 열매인가 나는 죽고 너는 사는가 나는 갈 길이고 너는 돌아오는 길인가

 

 

 

                                —《시인세계》201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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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 1954년 충남 논산 출생. 197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때』『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붉디붉은 호랑이』『절벽』『몽해항로』등과 산문집 『이 사람을 보라』『추억의 속도』『강철로 된 책들』『느림과 비움』『책은 밥이다』『새벽예찬』『만보객 책 속을 거닐다』『취서만필』『나는 문학이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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