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내가 읽은 시

황금 장수말벌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작성자시강|작성시간11.12.08|조회수17 목록 댓글 0

황금 장수말벌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도마뱀 저 발 없는 도마뱀이 현관 발판을 따라 흐른다.

아나콘다처럼 고요하고 위엄 있게, 다만 크기가 다를 뿐.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 있지만 해가 밀고 나온다. 이런 날이다.

오늘 아침 내 사랑하는 여자가 악령들을 쫓아버렸다.

마치 남쪽 어딘가에 있는 어두운 헛간의 문을 우리가 열었을 때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바퀴벌레들이 구석으로 돌진하고 벽 위로 올라가고

그리고 사라지듯이, 이때 우리는 바퀴벌레들을 보았고 또한 보지 않았는데,

그렇게 내 사랑하는 여자의 적나라한 모습이 마귀들을 달아나게 했다.

마귀들이 존재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들은 돌아오리라.

천개의 손을 가지고, 신경神經의 구식 전화교환국 속에 있는 전화선들을 넘어서.

7월 5일이다. 루핀*들이 바다가 보고 싶은 듯 위로 뻗고 있다.

우리는 아무 문자도 따르지 않는 침묵 지키기의 교회, 경건의 교회 속에 있다.

마치 고위 성직자들의 저 용서없는 얼굴들과

돌에 잘못 새겨진 신의 이름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돈을 비축해놓은, 축자적逐字的으로 문자에 충실한 TV 설교가를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이제 힘이 없었고 경호원의 부축이 필요했다.

경호원은 재갈처럼 딱딱한 미소를 짓는 잘 차려입은 청년이었다.

비명을 질식시키는 미소.

부모가 떠날 때 병상에 홀로 남은 아이의 비명.

신성神性이 인간을 스쳐가며 불꽃을 밝혀놓고,

그러고서는 물러난다.

왜?

불꽃이 그림자들을 끌어당기고, 그림자들이 바스락거리며 날아드러 불꽃에 합류하고,

불꽃이 치솟으며 검어지고, 검은 질식의 연기가 뻗어나간다.

마침내 검은 연기뿐, 마침내 경건한 사형집행관뿐.

경건한 사형집행관이 장터와 군중들 위로 몸을 기울리고,

장터와 군중들은 사형집행관이 자신을 볼 수 있는

흐린 거울이 된다.

최대의 광신자는 최대의 불신자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광신자는. 하나는 백 퍼센트 눈에 보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둘 간의 계약이다.

'백 퍼센트'라는 표현을 내가 얼마나 증오하는지.

정면에서 아니면 어디에서도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자들

멍한 마음이 결코 될 수 없는 자들

문을 잘 못 열어 '정체 불명자'를 얼핏 보게 되는 일이 결코 없는 자들,

이들을 지나가라!

7월 5일이다. 하늘이 구름으로 덮여 있지만 해가 밀고 나온다.

발 없는 도마뱀이 현관 발판을 따라 흐른다. 아나콘다처럼 고요하고 위엄 있게

발 없는 도마뱀은 관료주의가 없는 듯 하다.

황금 장수말벌은 우상숭배가 없는 듯 하다.

루핀들은 '백 퍼센트'가 없는 듯 하다.

페르세포네처럼 우리가 포로인 동시에 통치자인 그런 심연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자주 그곳 뻣뻣한 풀 속에 누워

땅이 내 위에 아치를,

둥근 천정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자주.

그것이 내 삶의 절반이었다.

하지만 오늘 나의 응시가 나를 떠났다.

나의 눈멂이 사라졌다.

검은 박쥐가 내 얼굴을 떠나 여름의 밝은 공간을 가위질하며 돌아다니고 있다.

 

*루핀 lupin : 콩과인 루피너스속의 식물.

 

 

그의 시는 천상과 지상과 지하를 넘나드는 . 혹은 시공을 넘나드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의 산물로 보여진다. 이럴 때의 그의 시의 자유분방함은 기독교 신비주의의 차원과 긴밀히 연관된다. 상기한 시는 신비주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랑하는 여자의 '적나라한 모습'이 마귀들을 쫒아버렸다니? 속인俗人들의 감수성으로는 얼핏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다. 사랑하는 여자의 나신裸身이 악령을 쫒아버렸다는 말인가? 여자의 눈부신 나신이 일종의 '신성'이 되어 마귀들을 달아나게 했다? 아무래도 이것은 종교의 영역이요 신비주의 영역이 아닐 수 없다. 갑작스런 빛이 쏟아져 들어와 '어둠의 자식들'인 바퀴벌레들을 달아나게 하듯이, 사랑하는 여인의 빛나는 육체적, 정신적 '적나라함'은 시인의 정신 속의 악령을 쫒아버린다는 것이다. 여인의 눈부신 적나라함은 바로 기독교 신비주의자로서의 시인의 정신 속에 쏟아져 내리는 천국의 눈부신 빛의 순간적인 육화肉化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시인은 '신성'이 잠시 스쳐 지나면서 영혼의 불을 지펴놓은 자의 비전적 체험을 순간적으로 가지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시인은 자주 '지하'의 깊은 심연 속,"뻣뻣한 풀 속에 누어/땅이 내 위에 아치를,/둥근 천장을 그리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바로 이 점이 한때 그가 많은 비판을 받은 까닭이 된다. 말하자면 그의 시는 종교적 경사가 심하여 반대로 정치사회학적 맥락이 거세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눈앞의 정치현실을 무시하고 있다는 비판이 그 핵심인데, 그러나 그는 이러한 비판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고 자기 나름의 시의 길을 꿋꿋이 걸어왔으며,---(생략)--- 이경수 (문학평론가)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