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권의 生
고영서
달 비친 사창(沙窓)에 한이 많아
꿈속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되었을라나*
해동조선국 승지 조원의 처 이옥봉은
온몸에 시를 감고 죽은 여인
여염의 아낙이 되어
지아비 얼굴을 깎아내리는 일 따위,
시 따위 쓰지 않으리라, 맹세했다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리지 못하는
천형을 앓다
산지기의 누명을 벗기는
시 한 수로 내쳐졌으니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를 떠돌다
겹겹의 종이로 떠올랐으니
하나 같이 빼어난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명나라 원로대신의 서가에
그렇게나 소중히 꽂혀 있었던 것
시퍼런 언어의 작두를 타다
뼈째 썰리는 고통으로
내림굿이 되는 시
씻김굿이 되는 시
* 이옥봉의 시 「몽혼」.
—고영서 시집 『우는 화살』(애지, 2014)
고영서
전남 장성 출생. 2004년 광주매일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기린 울음』, 『우는 화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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