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안토니오 그람시, 박상진 역, 『대중문학론』, 책세상, 2003
오영진
대중적인 글쓰기라는 것은 대중성을 고려해보겠다는 것. 그러니까 위에서부터 아래로 향하는 행위에서 나오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은 아래에서부터 위로 향한다고 볼 수 있다. 어떤 동정이나 온정을 통해 대중에게 접근하는 일이 아니라 바로 그 대중에서부터 시작해 무엇인가를 감지하고 뽑아내는 행위가 되어야 한다. 그러니 대중을 ‘위한’, 대중을 ‘고려한’, 대중을 ‘배려한’ 글쓰기가 아니라 대중‘에서’ 시작한 글쓰기가 되어야 한다. 그람시는 이를 감옥이라는 공간에서 여실히 깨달았는데 무엇보다 “정치범은 무엇보다 감옥의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참조해 ‘무에서 피를 뽑아’(17)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허용된 것은 대중소설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 대중소설에서 이 소설들이 대중의 어떤 열망에 부응하는가로 문제를 돌려 대중문학에 대한 단상들을 정리하게 된다.
그람시는 “도스토예프스키에게는 국민-대중의 느낌이 잠재되어 있다”고 평가하며 반면, 이탈리아 지식인에게서 하층민이란 표현은 지도와 온정으로 물든 보호의 관계를 가르친다“고 비판한다. 그는 “‘미美’로는 충분치 않다. 지적이고 도덕적인 일정한 내용이 필요하다. 그것은 일정한 독자층이 지닌 가장 깊은 열망이자 역사적 발전의 한 단계에 있는 국민-대중이 세련되게 완성되어 나타난 표현이다.”(32)고 말하며 문학의 도덕성에 대해 강조한다. 하지만 이러한 문학은 당연히 “문명의 실제 요소인 동시에 예술 작품이어야 한다.”(32)고도 말한다. 작품이 되지 못한 연재소설이 대중의 마취제 역할에서 멈추는 것은 쉽기 때문이다. 대중성과 예술성에 대해 그람시의 모델은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에 있는 듯 보인다. “대중은 ‘내용주의자’이지만, 대중적 내용이 위대한 예술가들에 의해 표현될 때 이 예술가들은 선호될 것이다. 셰익스피어와 그리스 고전 작가들, 현대에 와서는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들(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있어 대중의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내가 쓴 것을 기억하라.(107)
이는 그가 말하는 대중문학이란 단순히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 이상의 의미가 발생하는 장이라는 말이 된다. 대리충족을 넘어 대중의 열망을 ‘표현’한다는 것이고, 이것이 정치적이며 도덕적인 의미까지 획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람시가 예를 든 것처럼 쥘 베른의 과학소설에는 “반영국적 감정이 식민지 상실이나 해전에서 겪은 패배의 곪은 부분에 연결되어 생생하게 살아난다.”(44) 쥘 베른은 대중을 읽어내고 표현하는데 힘을 쓴 것이다. 대중이 바라는 바를 충족시켜 입막음하는 것과 대중이 바라는 바를 표현하는 일은 조금 다른 것이다. 가까운 예로 일본의 망가-애니메이션 계에서 미성숙한 신체의 형상을 한 로봇이라는 ‘아톰’의 명제는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데츠카 오사무 개인의 작가의식이 아니라 일본사회의 집단적 무의식이 작동한 예로 볼 수가 있다. 아톰은 일본이 원폭이후 패전 상태에서 던진 맥아더의 다음과 같은 말이 반영된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미성숙한 어린아이와도 같다.” 그렇게 어린아이의 캐릭터가 강력한 힘을 가진다는 서사는 대중의 욕망을 충족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욕망 그 자체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탈리아 문학이 대중을 가지지 못한 이유는 그들의 전통에서 ‘대중’을 의식해야할 계기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편적 세계의 가톨릭 왕국의 일원으로 스스로를 간주한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지식인을 대상으로 하는 신학 해석으로 활동을 이원화하면서 그 둘의 종합을 중개자의 입장에서 이끌어내려 애쓰지만, 대중을 지식인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일, 즉 대중의 지적-도덕적 개혁은 한 번도 자기 임무로 삼은 적이 없었”(160)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의 가치인 사랑은 보편성을 강조하지만 이들은 그 보편성이 톨스토이처럼 “‘대중적’ 정신, 즉 초대 기독교의 복음적 정신”(83)을 기반으로한 보편성임을 잊은 지 오래되었던 것이다. 즉 이들은 대중문화의 장 안에서 펼쳐지는 헤게모니 투쟁에 대해서는 전혀 눈뜨지 못했으며 그래서 무력하다는 것이다. 근세에 들어와서 ‘국민’이라는 개념이 강조되기는 했지만 이 국민은 그 외부를 규정하여 얻은 헛껍데기에 불과하다. 실재보다는 개념이 앞서있기에 거짓 대중이다. 그람시는 ‘국민’과 ‘대중’을 당대 이탈리아의 맥락에서 구분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람시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지금’과 ‘여기’로서의 대중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아름다운 고전작품은 언제나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변형되고 수용되었는지를 보는 작업이 더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감수성, 새로운 문체에 맞추는 정비 작업을 의식적으로 전개하는 것이 중요”(80)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작업은 예술적이기보다는 ‘문화적이고 대중적인’ 가치를 갖는다. 이러한 가치체계에서는 작가의 이름은 사라지고 반대로 주인공이 중요해진다. “대중의 지적 생활의 무대로 들어가면, 그 주인공들은 원래 유래했던 ‘문학적’ 기원에서 떨어져 나와 역사적 인물로서 위상을 얻게 된다.”(87) ‘지금’, ‘여기’를 강조하는 일은 전통의 쓸데없는 권위에 도전하는 가치를 가진다. 그와 비슷한 취지의 운동은 모더니즘에서 찾아볼 수도 있다. 하지만 “마리네티는 아카데믹하게 되었고, 과자 부스러기 같은 전통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변질되었다.”(114) 모더니즘은 새로움(a brand of the new)이라는 모더니즘의 명령에 대해 다만 중독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어떤 대중 독자들은 지난 역사의 실제 세계와 환상의 세계를 구분할 줄 모르고, 소설 속의 인물들에 대해 얘기할 때 마치 그들이 실제 살았던 인물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환상의 세계는 대중의 지적 생활에서 하나의 특수한 우화적 구체성을 획득한다.”(88) 이는 대중의 환상이 문화의 장을 통해 물질적으로 전환되는 지점도 있음을 말한다.
이어 고전에 대한 신화가 그람시는 깨뜨려 본다. 고전 작품들이 실은 대중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니체는 프랑스의 연재소설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인데, 그는 “자칭 니체적 ‘초인’이 차라투스트라가 아니라 뒤마의 『몽테크리스토 백작』을 정통한 기원과 모델로 삼는다는 것”(101)이 분명하다고 적고 있다. 또한 발자크에게서도 연재 소설의 냄새가 다분히 난다고 말한다. 다만 이러한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일종의 수치심을 느끼”게 하기 때문에 “니체는 정당성을 확보하고, 발자크는 연재 소설 형식의 창시자로서가 아니라 예술 작가로 찬미되는 것”(102)이라고 말한다. 여하튼 연재소설은 속물적 내용을 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대중미학’을 염두에 둔 민주적 형식에 가깝다고 그람시는 보고 있다. 추리소설은 어떠한가? 우리가 추리소설에서 보아야 할 것은 진공화된 범죄현장의 조잡한 퍼즐과 그것에 대한 해결이 아니라 완전한 세계와 그곳에 난 상처, 그 상처를 다시 봉합하려는, 반복적 속죄의 형식일 것이다. 고해성사와 추리소설서사 사이의 가까움을 깨달을 때 대중성에 대한 편견도 사라질 것이다.
또 그람시는 예술지상주의자들의 ‘태만’에 대해 공격한다. 지식인은 “문학을 하나의 ‘직업’으로 이해하”며, “그래서 자신이 직접 아무것도 내놓지 않을 때에도 문학은 ‘보답’을 해주어야 하며 연금을 받을 권리를 부여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르네상스의 위대한 문학가들은 글을 쓰는 일 외에 어떤 식으로든 노동을 했”다고 응수한다. “르네상스의 문학가의 이미지는 거짓되고 잘못된 것이다. 오늘날 문학가는 교수이거나 저널리스트 혹은 그냥 문학가다(문학가가 되려 하고 그 역할을 담당한다는 의미에서).”(112)
이러한 “(문학가들의) 빈 두뇌는 국민주의적 찬미에 광분하느라 그들의 헤게모니가 어디에 의존하는지, 어디서 억압받는지를 느끼지 못한다.”(130) 그들이 “문학은 그 자체의 문학을 갖지만, 그 문학은 다른 대중에게서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까? 아니 그 점에 대해 애정을 쏟을 이유라고 있을까? 하여 정치의 혁명은 이렇게 문화의 영역, 더 들어가 대중의 영역에서 벌어진 일에 민감하지 않아서 곤란하다. 이것은 작품의 구조가 아니라 감성의 구조를 연구하는 방식으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람시는 문학연구 나아가 문화연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작품의 미에 대한 탐구는 그 작품이 왜 읽히는지, 왜 대중적인지, 왜 탐구되는지, 아니면 반대로 왜 대중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대중의 관심을 끌지 못하며 국민의 문화적 삶에서 통일의 부재를 확연하게 드러내는지 연구하는 것이어야 한다.”(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