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혁명과정

작성자유테레사|작성시간12.03.22|조회수343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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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을 지지한 자는 소수에 불과하였으므로 1641년 의회의 3년 회기법, 스트래퍼드백의 사권() 박탈법, 성실재판소 및 고등종무관 재판소의 폐지법, 선박세의 위법성 선언, 직할림 제한법, 기사강제금 금지법 등이 잇따라 가결되었다. 그러나 당시 의회의 압도적 다수가 희망한 것은 국왕의 대권에 대해 의회제정법에 따른 제한을 가하려 한 정도였다. 그 후 의회에 대간의서()가 제출, 심의되었으나 그 안에 국왕의 대권에 대한 의회주권 확립의 요구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의회 안에서의 압도적 다수의 지지는 얻지 못하고, 11표라는 근소한 차로 겨우 가결되었다. 이렇게 하여 왕당파[]와 의회파[]의 분열이 결정적으로 되었으며, 왕은 1642년 의회에서의 5명의 의원 체포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런던을 빠져나와 요크로 도주하였다. 의회는 국왕 대권의 포기와 의회 주권을 요구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하여 내란이 일어났다.



의회파와 왕당파는 지리적으로는 전자가 동부 ·남부를, 후자가 서부 ·북부를 지반으로 하였으나, 모직물 공업지대는 의회파에 속하였다. 전자에는 청교도가 많았고, 후자는 대부분 국교회에 속했으며, 일부 로마가톨릭교도가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의회파에 가담한 것이 귀족 ·젠틀맨의 일부와 자유농민 ·상공업자들이었고, 왕당파에 가담한 것이 귀족 ·젠틀맨의 대부분과 그 밑의 소작농민이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귀족과 젠틀맨이 한 집단이 되어 한 진영에 가담하는 일은 없었으므로, 현실적인 지방적 이해나 친족관계가 크게 영향을 끼쳐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혁명이 일어난 초기의 2년간은 국왕군이 우세하였으나, 의회군에 O.크롬웰이 나타남에 따라 청교도인 자유농민을 중핵으로 하는 기병대를 조직하여, 1644년 국왕군을 마스튼 무어에서 격파하였다. 그는 이 ‘철기대()’를 본떠서 1645년 ‘신형군()’을 편성하여, 네이즈비 전투에서 국왕군에 이겨 결정적인 승리를 얻고, 왕을 생포하였다.

그러나 제1차 내란의 종료와 함께 종래부터 문제를 내포하고 있던 의회파 내부의 대립이 표면화하였다. 먼저 그 주류인 장로파와 크롬웰 등의 독립파와의 대립이다. 양파는 다같이 청교도파에서 유래하였지만 정치상의 장로파와 독립파가 종교상으로 꼭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다. 장로파가 국왕과의 화평을 고려한 데 반하여, 독립파는 항전을 주장하였다.

장로파에는 런던의 대상인이나 귀족층에 지지자가 많았고, 독립파는 장로파보다 밑의 계층에 의존하였다. 양파의 개혁노선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으나 의회주권 ·제한군주제()의 점에서는 공통되었다. 이들 양파에 대한 제3의 세력이 수평파()로서 런던의 수공업자 ·직인층을 기반으로 하였으며, 그 사상은 청교도 중의 여러 교파의 흐름을 담은 것을 주류로 하고, 공화제 ·인민주권 ·보통선거 ·기본적 인권 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독립파가 군간부를 지반으로 한 데 반하여, 이들은 병사들 사이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유폐 중인 왕은 이같은 장로파와 독립파의 대립, 군부의 분열을 틈타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또 스코틀랜드와 결탁한 장로파가 책동을 시작하여 제2차 내란이 시작되었다. 독립파는 수평파와 손잡고 대항한 끝에, 48년 승리를 얻고 왕을 다시 체포하였다. 그 뒤 장로파 의원이 의회로부터 추방되고, 독립파만으로 구성된 ‘잔부의회()’가 국왕 재판을 감행하여 49년 왕을 처형하였다. 이로써 군주제귀족원이 폐지되고, 영국은 공화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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