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영국의 종교개혁

작성자유테레사|작성시간12.03.23|조회수51 목록 댓글 1

영국의 종교개혁

 

 

가. 백년 전쟁 후의 영국(잉글랜드)과 튜더왕조의종교개혁

 

(1) 장미전쟁(Wars of the Roses / 1455 ~ 85)

 

프랑스 카페왕조가 단절되고 발루아왕조의 시작과 함께,

왕위 계승 권을 둘러싸고 시작된 백년전쟁은,

 

실제로는 기엔의 포도주, 플랑드로의 모직물 등

경제적 이익을 두고, 영국의 에드워드3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6세 사이에 시작되어(1337 ~ 1453)

 

프랑스의 최종 승리로끝을 맺었지만 영국에서는 이로 인해서 왕실 간에 내분이 일어나 다시 30년간 전쟁의소용돌이에 빠지게 되었는데, 전쟁의 주역이 었던 요크가(House of York)에서는 백장미를 랭커스터가(House of Lancaster)에서는 적 장미를 문장(紋章)으로 사용, 후세에 이를 두고 장미전쟁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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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발단은 에드워드 3세의 손자들 간에 영지 문제와

왕위계승 권을 둘러싸고 시작되는데 그 전개과정이 매우 복잡하다. 에드워드 3세가 죽고, 그의 손자 리처드 2세(흑태자의 아들)가

왕위를 계승, 숙부인 랭커스터 공(에드워드3세의 제 4자)이 후견인이 되었으나, 1398년 반역의 혐의를 받고 프랑스로 추방,

이듬해 리처드 2세가 랭커스터 영지를 몰수하자, 프랑스로부터 급히 귀국, 군사를일으켜 왕군을 무찌르고 조카인 리처드 2세를 체포,

퇴위시킨 뒤 의회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여 헨리 4세(Henry IV / 1399∼1413)라 불렀고, 이로써 그는 랭커스터 왕가의시조가 되었다.

 

이것은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것이므로 헨리 5세를 지나 헨리 6세(Henry VI / 1422∼61, 70∼71)가 1422년 8월 생후 9개월의 유아로 즉위, 그 해 10월 프랑스왕 샤를 6세가 죽자 그의 모후가 프랑스 왕녀 였으므로, 트루아조약에 따라 프랑스 왕을 겸하였고, 정치는 숙부인 베드퍼드 공(公) 존과 글로스터 공 험프리가 왕권을 대행하였는데, 당시 백년전쟁 말기의 프랑스에서는 잔 다르크의 출현으로 열세를 만회하고, 샤를 7세의 대관식을 프랑스에서 올리자,1431년 그도 프랑스 왕으로서 파리에서 대관식을 올렸다. (이래서 프랑스에는 두 명의 왕이 동시에 있었고, 다시 브르고뉴백 까지 합하면 3명의 통치자가 있었는데, 그 내용은 본 칼럼 제 28호 백년전쟁편에 보다 상세히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1453년에는 칼레 이외의 영토를 모두 잃고 대륙에서 추방되어 백년전쟁은 종결되었으나, 그가 취한 프랑스에 대한 평화정책을, 요크가(에드워드 3세의 제 3자 및 제 5자 계통)의 리처드를 중심으로 귀족들이 반발, 헨리 4세가 리처드 2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였다 하여, 1455년 요크가에서 반란, 세인트올번스 전투를 시작으로 이른바 장미전쟁이 일어났는데, 60년 리처드가 웨이크필드에서 전사, 그러나 그의 장남 에드워드가 그 뒤를 이어, 랭커스터파(派)를 타우턴 전투에서 격파하고 즉위, 에드워드 4세라 칭하고, 랭커스터파 사람들을 반역 죄로 몰아 영지를 몰수하고 헨리 6세를 런던 탑에 유폐시켰다.

 

그 후 에드워드 4세 옹립에 큰 공이 있었던 요크파의 워릭백작이 반란을 일으켜 70년 에드워드 4세를 국외로 추방하고 헨리 6세를 복위시켰고, 에드워드 4세는 세력을 회복, 귀국하여 71년 바넛전투에서 워릭 백작을 전사(戰死)시키고, 헨리 6세는 다시 붙잡혀서 런던 탑에 유폐시켰다가 살해되어 랭커스터왕조는 멸망하였다.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하고(1483) 그의 장남 에드워드 5세가 12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 이번에는 그의 삼촌인 글로스터 공 리처드가 에드워드 5세를 투옥하고 리처드 3세로 즉위하고는 그의 조카 에드워드 5세를 살해, 이렇게 뒤죽박죽이 되자, 이 무렵 대륙에 망명해 있던 랭커스터 계의 리치먼드 백작 헨리 튜더는 1485년 웨일스에 상륙, 보즈워스 전투에서 리처드 3세를 패사시켜 30년에걸친 장미전쟁을 끝내고, 헨리 튜더가 즉위하여 헨리 7세라 칭하고 튜더왕조를 열었다.

 

(2) 튜더왕조(House of Tudor / 1485∼1603)와 헨리8세

 

장미전쟁을 수습하고 즉위 한 헨리 7세(1485 ~ 1509)는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기 위해 에스파냐 페르난도 5세(1479 ~ 1516 / Ferdinad Ⅴof Castile / Ferdinand Ⅱ of Aragon)의 왕녀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 1485~ 1536)을 제 1 왕자 아서(Arthur)와 결혼 시켰는데(1501) 이 때 신부 캐서린은 16세, 신랑 아서는 14세, 그러나 병약한 아서는 혼인 후 5개 월을 못 넘기고 사망, 신혼의 참 맛을 보기도 전에 캐서린은 과부가 되었다.

 

과부가 된 이 어린 며느리를 에스파냐로 돌려보내자니 에스파냐와 동맹관계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녀에게 딸린 지참금(持參金)이 너무 아까워 그의 둘째 아들 헨리와 다시 결혼 시켰는데, 이 때 헨리의 나이는 8세, 여덟 살의 연상인 그의 형수와 결혼한 헨리는 그의 부왕 헨리 7세가 죽고 나서 왕위를 계승, 헨리 8세(Henry VIII / 1509∼47)가 되었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아내로 마지하는 풍속은 고대 동양의 유목사회 유풍으로 위지 동이전 부여 조에 "형이 죽으면 그 처를 동생이 아내로 마지하니 흉노와 같은 풍속(兄死妻嫂與匈奴同俗)"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유목사회의 재산권 문제와 관련된 혈족 보존의 필요에서생겨났다고 보여지며, 기독교에서는 이를 엄격히 금하고 있는데, 그 상세한 내용이 구약성서 레위기에 전한다.

 

구약성서 레위기(Leviticus)는 야곱의 셋째 아들 레위를 조상으로 하는 이스라엘 12 지파(支派)의 하나로서, 그 후손들은 주로 제사와 의식을 담당하면서 계율을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아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무릇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 하였은 즉 그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 가리라"...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그 계모와 동침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범하였은 적 둘 다 반드시 죽일지니...그 자부와 동침하는 자 둘 다 죽일지니....."


"누구든지 그 형제의 아내를 취하면 더러운 일이라, 그가 그 형제의 하체를 범함이니 그들이 무자 하리라"(레위기 20장 제 21절).....

 

헨리 8세는 왕비 캐서린과는 별 탈 없이 지냈고, 레위기의 무자(無子)하리라는 내용과는 달리 두 사람 사이에는 메리(Mary / 1516 ~ 1558)라는 왕녀가 탄생하여 무자는 면했으나, 그 외에는 사산과 유산을 거듭하였고, 겨우 태어난 아기는 몇 년 안돼서 죽었으므로, 왕위를 계승할 왕자를 보지 못했다.

 

여자라고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수적인 영국에서 그렇게 되면 여러 가지 구설수가 따르고, 문제가 복잡해지기 때문에 헨리 8세는 왕자를 낳아서 대를 잇고자했다.

 

(3) 영국식 종교개혁

 

왕비 캐서린의 나이가 사십을 넘어서자 더 이상 자녀를 얻는다는 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안 헨리 8세는 캐서린과 이혼하고 다른 왕비를 맞기로 결심, 마침 캐서린의 시녀로 있던 궁인 앤 불린(Anne Boleyn / 1507 ?~1536.5. 19)과 열애 중이었으므로 그녀와 결혼하기로 하고,.....

 

그러나 일부일처 제를 교회법으로 지키고 있는 유럽에서 군주라고 예외는 아니기에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이 선결되어야 한다. 하지만 카톨릭에서는 이혼도 엄격히 금지하였기 때문에, 로마 교황 청에 이혼을 신청하면 들어줄 리 없고,...그래서 캐서린과의 결혼 무효를 신청하였다.

 

수 십 년 전에 교황의 특허로 이루어진 이 결혼 역시 교회 법에어긋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무효고, 교황은 이를 무효화 선언만 하면 이혼하지 않고도 두 사람의 혼인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황이 이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왕과 교황이 대립하여 영국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는데, 당시 로마 교황청은 헨리 8세의 요구를 받아 줄 수 없는 입장에 처해 있었다. 그것은 1527년 로마에 침입, 로마를 황량하게 파괴하고 교황을 완전히 굴복시킨 바 있는, 독일 황제 카를 5세가 캐서린의 조카였기 때문에, 영국 왕의 이혼을 섣불리 다루었다가 카를 5세로부터 어떤 보복을 당할지 두렵기 때문에 이러 지도 저러 지도 못하고 양쪽의 눈치만 살피면서 차일피일 뒤로 미루고 있었다.

 

이렇게 되자 1533년 1월 25일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비밀리에 결혼을 하였고, 부활절에 이 사실을 공포, 교황청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1534년 11월에는 "우리들의 원수(元首)인 국왕 및 이 국왕을 상속하고 계승하는 이 왕국의 모든 국왕은 엥글리카나 에클레시아(Anglicana Ecclesia)라고 불리고, 영국 교회의 지상(至上) 유일 최고의 수장(首長)으로 해석되고 인정되고,또 간주 되어야 한다"라는 내용이 담긴 이른바 국왕 수장령을 의회에서 통과시키고, 교황과 결별을 선언하였다.

 

이렇게 해서 영국 교회는 일시에 국왕을 최고의 수장으로 받드는 영국 국교회(Anglican church or English church 聖公會)가 생겨났는데, 루터나 칼뱅처럼 교리상의 문제나 면죄부 판매와는 관계없이 국왕의 이혼과 결혼문제가 원인제공으로서 교회의 제도나 의식은 그대로 두고, 우두머리를 교황에서 국왕으로 바꾼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국의 종교개혁의 원인을 제공했던 앤 불린은 결혼 후 딸 에리자베스를 낳았으나, 이것이 다른 남자와의 불륜(不倫)의 관계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퍼지는 가운데, 헨리 8세는 신의 저주를 받아 겨우 왕녀를 낳았다 해서 참수(斬首)시켰고, 그 뒤를 이어 제 3의 왕비 제인 시무어(Jane seymour)는 왕자 에드워드를 낳아 헨리 8세의 소원을 풀어주고는 곧 죽었으며, 제 4왕비 클레브의 앤(Anne of Cleves)은 이혼 당했고, 제 5왕비 캐서린 하워드(Chatherine Howard)는 앤 불린 처럼 참수(斬首) 당했으며, 제 6왕비 캐서린 파아(Chatherine Parr)는 헨리 8세가 죽은 후 딴 남자와 재혼하였다고 하는데, 아내를 두고 본다면 헨리 8세야말로 팔자 사나운 남자임에 틀림없다.

(4) 영국식 개혁의 내막

 

헨리 8세 자신은 신교 파에 대해서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이를 철저히 단속하였는데, 실제로 루터의 저서를 금서(禁書)로 지정하고 이를 비판, 교황으로부터는 신앙의 옹호자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따라서 캐서린과의 이혼문제가 없었거나 그 문제가 순조롭게 풀렸다면 영국식 교회개혁은 없었거나 다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보수적인 영국에서도 예외는 있기 마련이고, 켐브리지대학의 일부에서는 루터의 지지자가 생겨났고, 교회에서는 영어 판 성서가 등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들의 세력은 미미한 것으로서 그들 역시 카톨릭의 교의(敎義)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이런 영국의 종교개혁은 당시 일고 있었던 절대주의와 연관되어 설명되고 있는데, 로마교황청에  보내던 세납(稅納)이 국왕에게 돌아갔고,국토의 1/3을 점하고 있었던 수도원의 토지를 몰수하여 왕실의 소유로 만드는데서 그 단면을 볼 수 있다.

 

1536년 헨리 8세는 작은 수도원들이 부패 타락 했다는이유로 강제 해산시켰고, 3년 뒤에는 큰 수도원도 해산시키고 그 재산을 왕실의 소유로 했다. 다시 재정상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 많은 현금이 필요한 헨리 8세는 몰수한 수도원 토지를 매각(賣却), 결국은 그 토지가 귀족, 젠트리(신흥 지주), 대상 인들의 소유가 되었는데, 양모공업의 발달과 목양업의 번성, 농업기술의 향상으로 토지수요가 폭발, 토지 전매(轉賣)가 유행되고, 한편에는 부동산 투기가 열을 올리고 있었다.

 

헨리 8세의 절대주의 정책들 중, 왕비와의 이혼과 처형, 교회에 대한 지나친 간섭, 수도원의 해산과 재산 몰수 등은 그의 잔학성과 폭력을 반영한 것이며, 이런 국왕의 처사에 반대하는 여론 또한 높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Thomas More / 1477 ~1535)와 로체스터 주교 피셔(John Fisher / 1459 ~ 1535)의 처형에서 볼 수 있는데, 에라스무스가 우신예찬을 모어의 집에서 집필 했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고, 모어 자신도 유토피아(Utopia: 理想鄕)를 발표(1516), 중세적 질서에서 근대적 질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미래에 대한 기대 치를, 낯선 이국을 둘러보고 온 선원의 이야기 형태로 엮었는데 여기에서 그의 종교에 대한 생각을 엿 볼 수 있다.

 

....유토파스 왕이 즉위하여 주변을 둘러보니, 이 나라 사람들은 종교를 두고 서로 끊임없이 다투다가, 이웃 나라에 정복 당하고 말았다. 이래서 유토파스 왕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믿는 종교를 가진다. 사람들은 성급하게 싸움을 걸어서 남을 비난해서는 안되며,....남을 개종시키려고 애쓰는 것도 안된다. 개종을 강제하기 위한 폭력은 더욱 더 허용할 수 없고, 남을 불쾌하게 하거나치안을 어지럽히는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본다면 모어 자신은 종교적 관용(寬容)과 신앙의 자유를 이상(理想)으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글자 그대로 이상 이였고 그 자신은 법관으로서 많은 신교도들에게 화형(火刑)을 선고했고,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 헨리8세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공정한 재판을 했다는 평을 얻었지만, 헨리 8세의 캐서린왕비 와의 첫 번째 이혼에 반대, 런던 탑에 15개월 동안 갇혔다가 결국 처형당했다.

 

피셔 역시 케임브리지대학을 졸업하고 1501년 동 대학부총장, 1503년에 신학교수, 1504년에는 총장, 다시 동년 국왕 헨리 7세에 의해서 로체스터의 주교로 서임  되었으나, 그는 헨리 8세의 이혼문제가 일어났을 때 토머스 모어와 함께 이를 반대, 또한 국왕이 로마 교회로부터 영국 교회를 분리시키려는 정책에도 반대하였다가, 1534년 런던 탑에 갇히게 되었고, 또한 국왕이 자신을 영국 국교회의 수장임을 인정하도록 그에게 강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경하게 버티며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왕의 진노를 사, 런던 탑에서 참수 당했다. 이시기 헨리 8세는 재세례파의 네덜란드 사람들 13명도 처형했다.

 

뒤 이어 1536년부터 37년에 걸쳐 잉글랜드 북부를 중심으로 은총의 순례(Pilgrimage of Grace)라는 대규모 반란이 젠트리와 농민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북부 링컨셔의 민중봉기를 계기로, 이단을 배척하고 수도원 해산을 반대하는 성직자를 비롯하여, 헨리 8세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젠트리의 불만, 지주들의 토지 전매로 토지를 잃은 데다가 수도원의 혜택을 입을 수 없는 농민들의 불만과 물가앙등 등의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 한때는 반군의 숫자가 5만여 명에 이르렀으나, 참가한 사회계층이 다양했고, 각각의 이해 관계가 달랐기 때문에 투쟁목표를 일치시키지 못하여 수많은 회생자만 내고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헨리 8세의 중앙집권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5) 신 구교도의 갈등과 영국 국교회 성립

 

1547년 헨리 8세가 사망하고, 아홉 살의 어린 에드워드 6세(Edward VI / 1537 ~ 1553)가 즉위하였는데,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 The Prince and the Pauper : 1881)에서 등장한 왕자가 이 에드워드 6세로서, 소설에서와 같이 그는 매우 영리했다. 이 무렵에는 멀리 스위스의 취리히나 제네바에서 신교파의 교육을 받고 귀국한 영국 인들이 많았고, 이런 영향으로 에드워드 6세는 어려서부터 신교파의 교육을 받았고, 즉위 후에는 신교파에 가까운 사람들이 정치를 위임받고 있었다. 따라서 신교화의 경향이 짙어지자 카톨릭의 반격 또한 만만치를 않았다.

 

더구나 슈트라스부르크의 부처 등 대륙의 종교개혁자 다수가 영국으로 건너가 나이 어린 에드워드 6세의 측근들로부터 지원을 받으며 예배양식을 개정한 일반기도서, 신앙의 기준을 정한 42개조 등을 엮어, 미사의 폐지와 승려의 결혼허용, 두 가지의 성찬을 실시하고 화체설을 부정하는 등 조심스럽고 부분적인 개혁을 추진했으나, 카톨릭 적인 것을 배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개혁이 보수적인 영국에서는 곧 저항을 받았고, 이미 1450년에 있었던 케이드 반란(Cade'sRebellion)에서도 카톨릭 적인 의식의 부활을 요구하였던 전례가 있었다. 그러다가 병약한 에드워드 6세가 16살의 나이로 1553년 타계(他界), 다시 영국의 왕위는 헨리8세의 장녀 메리가 잇게 되면서 종교문제에서도 양상은 다시 카톨릭교로 회귀하였다.

 

메리 1세 (Mary I / 1516 ~ 1558)는 헨리 8세와 제1 왕비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나, 부왕 헨리 8세가 캐서린과는 이혼했으나, 자기 혈육인 메리를 에드워드 왕자 다음의 왕위 계승자로 지목, 그 유언에 따라 왕위에 올랐으나, 그간의 권력을 둘러싼 정치 사정은 매우 복잡하다.

 

모후인 캐서린 오브 아라곤으로부터는 전투적 기질을 물려받았고, 이복동생 에드워드 6세 치하에서는 일반기도서를 승인하지 않아 박해를 받았으며, 권력 투쟁에 휘말려 제거될 뻔한 위기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에, 그가 즉위 후 존 다들리를 비롯한 반대파를 처형하면서 카톨릭의 반격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1553년에 소집된 의회에서는 에드워드 6세 때의 모든 개혁안을 폐지, 헨리 8세의 말기와 같은 상황으로 복귀한다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고, 1554년 의회에서는 종교개혁 이전의 1529년의 상황으로 복귀한다는 법안을 제출하였는데, 영국 국민의 대다수는 프로테스탄트 적인 개혁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메리에 의한 카톨릭 신앙의 전면 부활에는 반대하지 않았으나, 국왕 수장령의 폐지및 로마 교황권의 재 승인, 수도원 부활 같은 문제에서는 말이 달라지게 되어 있다.

 

이는 반교황적인 국민감정이 강한데다가 수도원의 토지를 구입했던 사람들이 다시 그 토지를 수도원에 단 한 뼘의 땅도 반납할 생각은 없었고,...땅을 구입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야 상관 없었겠지만, 이 땅을 사들여 자기 소유로 만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애국심이나 사회정의에 따라 이를 되돌려 준다는 것은 허울일 뿐...여러 가지 구실을 달아 당연히 반대했다. 따라서 여왕도 교황권의재승인과 수도원 영지 회복은 단념하지 않을 수 없었다.

 

1554년 메리 여왕은 독일 황제 카를 5세의 아들이면서 에스파냐 왕위계승자로 지목되어 있던 펠리페 2세 (Felipe II / 1527 ~ 1598)와 결혼하였는데, 이 때 메리의 나이는 38세, 신랑 펠리페 2세는 27세, 이 결혼을 주도한 것은 카를 5세, 그 목적은 모직물 공업이 발달되어 있었고 영국 왕실의 주요 재원(財源)이었던 네덜란드를 펠리페 2세에게 주기 위해서,....

 

이런 것을 정략 결혼이라 한다. 그러나 이런 정략 결혼이 행복할 리 없고, 더구나 이것이 영국 국민들이 메리 여왕을 불신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가운데 메리가 에스파냐를 도와 주기 위해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하자, 영국 국민의 불신과 불만은 극도에 달했다. 또한 카톨릭의 부흥을 전면으로 단행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신교도에 대한 박해가 뒤따르게 마련이고, 이래서 영국의 승려 8천 8백 명의 1/4에 가까운 2천 여명이 추방되거나 박해를 피해서 제네바나 취리히 등 대륙의 신교파 도시로 망명,... 메리 여왕은 에드워드 6세 때, 종교개혁을 추진한 신교파의 중심 인물들 중 캔터베리 대사교를 비롯해서 300 여명을 체포, 스미드필드(죄수 처형장)에서 화형에 처했고, 이미 죽은 슈트라스부르크 출신 부처의 시체를 파내어 화형에 처했다. 죽은 사람의 시체를 파내어 목을 자르는 것을 우리 역사에서는 부관참시라고 했는데, 화형을 시켰다면 부관화시(?)라고 해야 되는지,...죽은 사람이 말을 하고 행동 할 수야 없다.

 

이것은 다음에 이야기할 에스파냐나 네덜란드에 비교하면 별로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영국 역사상 최초의 이 대규모 종교 박해를 당한 영국 인들은 메리 여왕을 "피에 주린 메리(Bloody Mary)"라고 불렀고, 국왕에 대한 반감은 교황청이나 카톨릭교회, 카톨릭을 신봉하는 왕국에 대해서도 전보다 더한 증오심을 갖게 만들었다.

 

이런 메리 여왕이 자신의 병으로 1558년 재위 6년을 고비로 사망, 그녀의 치세 기간이 짧았다는 것은 본인 자신이나 영국 인들을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메리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한 것은 엘리자베스 1세(ElizabethI / 1558 ∼ 1603). 그녀는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로 참수된 뒤 궁정의 복잡한 세력 다툼의 와중에서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고, 이복 언니 메리 1세의 카톨릭 복귀 정책에 반발하고 반란에 가담한 혐의로 런던 탑에 유폐(1554)되는 등 다난한 소녀시절을 보냈다.

 

그러면서 에드워드 6세 시대의 개혁과 메리 시대의 반동(反動)을 생생하게 체험하였기 때문에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그 나름 데로의 복안(腹案)을 세울 수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종교에 대한 해결 방안은 타협, 그래서 그는 즉위 다음 해인 1559년 "국왕 수장령"과"예배 방식 통일안"을 의회에 제출하여 통과시키고,

 

얼마 뒤에는 영국국교회의 교의(敎義)를 규정한 39개조를 공포(公布)했는데, 국왕 수장령은 헨리 8세 때 영국 국왕이 영국교회의 지상(至上), 유일, 최고의 수장이라는 표현을 썼으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은 세속적인 경우와 마찬가지로 종교에서도 이 나라 유일의 최고 통치자라고 하였으며, 국왕이 교회의 정신적인 면에 간섭하거나 결정을 내릴 권한은 없고, 외면적, 행정적 권위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런 것은 다만 표현상의 차이일 뿐 내용상으로 헨리 8세의 수장령과 무엇이 다른지, 그들의 관습이나 문맥상의 어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들로서는 그 진면을 알기가 힘든다.

 

예배 방식 통일안이나 법령에서도 교의 적으로는 프로테스탄트적이고, 의식(儀式)에서는 카톨릭 적인 것으로, 다시 프로테스탄트 적인 교의(敎義)에서는 루터파, 츠빙글리파, 칼뱅파의 내용을 모두 담고 있으며,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않으려는 흔적을 쉽게 볼 수 있다.

 

이것은 각 교파가 자기들의 주장을 한치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의도를 이해하고, 잘 못 다룰 경우 다시 수많은 회생 자를 낼수도 있었기 때문에, 다소 불철저 하다는 소리를 각 교파로부터 들으면서도 종교적 대립을 완화시키고 국민 전체를 포용하기 위해서는 이런 타협이 가장 현실적이라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이런 일련의 그의 조치들은 로마 카톨릭에서 영국 국교회를 완전히 독립, 영국 민의 비카톨릭화에 중심을 두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녀가 즉위할 당시만 하여도 영국에서는 카톨릭이 단연 압도, 1561년경의 신교파는 1 % 내외의 미미한 존재였으나, 20 여년이 지난 1580년경에는 반대로 카톨릭의 신도가 3 % 내외였다고 하니까, 여왕의 종교정책이 여왕의 입장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는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런 엘리자베스 식 해결, 나아가서는 영국 식의 타협적인 해결은 매우 현실적인 것으로, 지금까지 전해오는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기초는 이 때 확립 되었다.

 

종교문제 이외에도 여왕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나 많다. 애인은 두었으나, 결혼은 하지 않았고, 여왕의 지위와 미모에 반한 이름 있는 실력자들을 교묘히 조종, 영국의 국제적인 위상과 지위를 높였으며,

 

그의 형부인 에스파냐 펠리페 2세의 무적함대를 격파(1588), 해상 왕국을 이루었으며, 동인도회사를 설치(1600)하여 인도 경영에 발을 들여 놓았고, 경제학자 그레샴, 세계적인 극작가 셰익스피어 등이 활약한 것도 이 여왕의 치세기간에 있었던 일이다.

 

영국 국교회의 성립으로 이제 유럽에서는 루터파와 칼뱅파가 종교지도에서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상대적으로 카톨릭의 교세는 현저히 줄게 되었다. 그렇다면 로마 교황청을 비롯해서 카톨릭 측에서는 이런 현상을 팔짱만 끼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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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유테레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6.20 영국교회에 대해서 잘 정리된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추천 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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