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례후궁(先禮後弓), 선사(善射)의 길 제대로 가르쳐야.
골프를 처음 배울 때다. “골프는 하루 먼저 배운 사람이 선생이다.”는 말이 있었다. 초보가 왕 초보를 가르치려 달려드는 모습을 두고 한 말이다. 활 세계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어 이건 아니다 싶다.
대개의 활터에 가면, 선례후궁, 일시천금이란 말을 돌에 새겨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새겨 볼수록 엄청난 이야기인데 그저 지나치기 일 수 인 듯하다. 과연 모든 활터에서 선례후궁의 아름다운 풍습이 잘 지켜지고 있을까?
활을 처음 시작하는 신사들의 교육은 주로 사범이 맡고 있다. 나는 가끔 사범들의 교육이 적절한가하는 생각과 함께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민과 자질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사범이라는 말은 일본식표현이다. 원래는 선생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여기서는 통념적으로 선생을 사범이라 하기에 그대로 표현했다.)
활터는 어떤 사람을 사범으로 임명하는가? 대한궁도협회에서 인정하는 명궁, 활 꾼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그들의 자질은 어느 정도일까? 활터에서 교장의 역할은 어떤 것일까?
분명한 것은 활의 세계는 일반사회와는 다른 무엇이 있다. 활을 배우기 위해 집궁을 한다는 것은 새로운 사회에 들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 활을 배우는 사람은 새로운 활 세계에 대해 전반적인 것을 교육받아야 한다. 그들이 배우는 것 중에서 활을 쏘는 기술은 아마도 극히 일부의 것일 터이다.
그런데 돌아보니 우리나라 궁도계가 참 중요한 문제를 너무 쉽게 보고 있지 않은가하는 걱정이 앞을 선다.
우리를 본디 동이(東夷)라 해서 동양의 한 중 일 삼국 중에서 우리의 활을 제일로 쳐왔다. 한국은 활, 중국은 창, 일본은 칼이라고 동양 삼국의 특징을 설명해 오고 있다. 과연 그럴까? 과연 우리가 활의 종주국일까?
만약 우리나라가 활의 종주국이라면 그에 대한 이론적 근거도 가장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활의 철학을 이야기해 놓은 것을 보면 흔히 공자(孔子)를 들먹이고 노자(老子)를 들먹이는 글이 많다. 왜 중국 사람의 이야기를 빌려 우리 활의 철학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왜 퇴계(退溪)나 서애(西厓) 같은 대 석학들이 활에 대한 철학을 정리해 두지 않았을까?
조선의 궁술, 사법비전공하 그 두 권이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의 전부인가? 언제까지 그것에만 매달려 있을 것인가? 새로운 역사를 언제 써 나가려 하는가? 대사례? 향사례? 언제까지 중국의 유산에 매달려 있으려 하는가? 주역으로는 활을 풀면서 우리 철학의 근간인 오행으로는 왜 못 풀고 있는가? 우리의 천제문화(天祭文化)는 어디에다 두고 중국에서 건너 온 유교(儒敎)에만 매달리려 하는가?
우리에게 활을 가르치는 활터의 사범들이 과연 이론적으로 얼마나 활에 접근하고 있을까? 적어도 명궁이 되기 위해 몇 편의 논문이라도 써야 하는 의무규정은 없는 것일까? 사범과 명궁이 되기 위해서는 이론과 실기에 대한 지식을 온전히 겸비해야 할 것이다. 과연 그런가? 혹 한쪽으로 기우러져 있는 지식을 통해 활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지러진 것들을 잘 못 전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적어도 사범, 명궁, 교장과 같은 지도자는 문무(文武)를 겸비해야 한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면 온전한 인격도야가 힘들다.
우리 궁도계에는 아직 지도자교육의 틀이 제대로 잡혀져 있지 않은 것 같다. 적어도 전통문화요 전통무예인 활이 우리의 역사에서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보존되고 발전되기 위한 대책이 서 있어야 한다. 그 중 중요한 것의 하나는 국가에서 공인하는 지도자교육과 양성에 대한 제도의 정립 일 것이다.
그저 사설(私設)로 개인적 지식을 전해 주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허울 좋게 자율로 맡겨둔 결과가 어떤 현상을 초래하고 있는가? 활을 우리는 지금 문화재적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선례후궁(先禮後弓)! 예(禮)가 무엇인가? 쉽게 말해 예는 순서(順序)이다. 앞뒤를 모르면 예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똥인지 된장인지 모른다는 말이 있다. 예를 모르는 것을 두고 한 말이라 생각한다.
예는 모든 것의 바탕이기도 하다. 바탕이 온전해야 그 위에 무엇을 그리고 쓸 수 있지 않을까? 무엇이 활의 바탕이 되어야 할까?
과녁을 조금 잘 맞춘다고 상하좌우를 구분하지 못하고 기고만장한 활 꾼을 보고 얼굴 찌푸리는 경우를 흔히 본다. 그리고 그런 것들에 대해 한탄하는 소리도 여기저기서 자주 듣는다.
예(禮)가 바로 서지 않았으니 활(弓)인들 바로 설 것인가? 활터의 바탕부터 새로 잡아가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 국궁이 가지고 있는 당면문제인 것 같다.
정풍(亭風)이 바로 서고 사풍(射風)이 바로서야 그것이 곧 국풍(國風)이 바로서는 길이다. 궁풍(弓風)을 바로 잡는 것, 그것이 바로 선사자(善射者)들의 길을 제대로 열어 가는 바탕일 것이다.
우리 국궁계를 돌아보면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보여 내일이 밝게 느껴진다. 내가 만난 활 꾼 중에서도 장래가 촉망되는 걸출한 준걸들이 많았다. 다만 그들을 잘 다듬어 주지 못한 것이 나이든 사람의 입장에서 참 부끄러울 뿐이다.
정책당국과 궁도계의 지도자들은, 지금이라도 서로 얼굴을 맞대고 깊이 있는 논의들을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재를 바르게 키워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제 몫을 바르게 행 할 수 있도록 뒤 받침을 잘 해 주어야 한다.
모든 활 꾼이 하나 같이 밝고 힘차게 선사자의 길을 걸을 때, 이 나라의 내일이 밝게 열릴 것이다.
본시 이 나라는 도인(道人)의 나라다. 궁도 9계훈을 잘 음미해 보라. 신선한 국풍을 여는 길은 많은 선사자의 배출에 달려 있지 않은가? (20070616. 和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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