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우금치-
새야새야 파랑새야 -채동선 편곡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새야새야 파랑새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아래녁 새는 아래를 가고 윗녁 새는 위로 가고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우리 밭에 앉지 마라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 손톱 발톱 다 닳는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
새야새야 파랑새야 전주 고부 녹두새야
윗논에는 차나락 심고 아랫논에 메나락 심어
울 오래비 장가갈 때 찰떡 치고 메떡 칠 걸
왜 다 까먹느냐 에가 왜 다 까먹느냐
위여 위여 위여 위여 위여 위여
새야새야 파랑새야 우리 논에 앉지 마라
-1934년 채동선의 친필편지-
나는 공주에 있을 때 가끔 우금치를 찾았다.
그리고 전봉준을 생각했다.
가슴이 아파왔다.
일본군에게 무참히 패한 이 우금치.
2007년에 다시 가 본 우금치.
쓸쓸했다.
채동선 (蔡東鮮 1910~1953).
작곡가. 전남 보성군 출생. 3ㆍ1운동 관련 문제로 경기고등보통학교
(현 경기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1924년 와세다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18년경에는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웠으며 1924년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위해
독일로 유학, 베를린의 슈테르쉔음악원에서 리하르트 하르처에게 바이올린을,
빌헬름 클라처에게 작곡을 배웠다. 1929년에 귀국하여 수 차례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하고, 최호영, 이혜구 등과 현악4중주단을 결성하는 등
활발한 음악활동을 펼쳤다.
1933년에 작곡된 대표가곡 <고향>은 정지용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나,
분단 이후 이은상 시 <그리워>, 박화목 작사 <망향>으로 가사만 바뀌었다.
1937년에는 첫 작곡집을 발간하였으며, 동아일보사 주최 제1회 전조선 창작곡 발표
대음악제에서 <환상곡 d단조>를 발표하였다.
전통음악에도 관심을 보여 <서울 아리랑> 등을 편곡하고 <별유천지(別有天地)>
등을 채보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주로 작곡에 전념하였으며 고려음악협회를
결성하여 회장을 맡고 한국문필가협회 부회장,
고려작곡가협회 회장, 서울시 문화위원, 예술원 위원, 국악원 이사 등을 지내면서
음악계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1950년부터 서울대 상과대학, 숙명여대 교수로
재직하다 1953년 부산 피난 중에 5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는 동학 농민운동 때 불렸던 민요다.
민족주의 작곡가 채동선(1901~1953)이 채집해 합창곡으로 다듬은 작품이다.
그가 부산 피란 시절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내가 악보를 건넸다.
1절 가사만 알려졌던 노래인데 채 선생은 6절 가사까지 채집했다
절박했던 민초들의 아픔이 담겨 있어 부를 때 눈물이 나온다.
이 노래가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
만 몇 가지 설이 있다. 먼저, 동학 농민 운동(1894) 때에 일본군이 푸른색 군복
을 입어 파랑새는 일본군을 뜻하며 전봉준이 녹두장군이라 불리었던 점을 보
아 녹두밭은 전봉준을 상징하고 청포장수는 백성을 상징한다는 것이 유력하
다. 또 다른 설로는 팔왕설이 있는데, 전봉준은 전(全)자를 파자하여 팔(八)왕
(王) 이라고도 불리었고 이것이 변형되어 파랑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일본*들아 녹두장군 잡아가지 마라
녹두장군 죽으면 우리 민중들이 울고간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새야
녹두꽃이 떨어지면 부지깽이 매맞는다
(녹두장군 잡아간 일본*들아
녹두장군 죽이면 우리가 혼내줄거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은새야
아버지의 넋새보오 엄마죽은 넋이외다
(녹두장군 잡아간 일본*들아
녹두장군의 죽음은 부모의 죽음과 같이 안타깝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너는어이 널라왔니
솔잎댓잎 푸릇푸릇 봄철인가 널라왔지
(여기서 파랑새는 팔왕 전봉준을 뜻하고
청송·녹죽을 보고 봄인 줄 알고 왔다는 뜻)
마지막장에서 겨울인데 봄인 줄 착각했다는 것은
혁명의 시기가 성숙하지 못하였는데 거사를 해서
결국 실패했다는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 같다(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