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대승기신론

지운스님 강의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 17. 지관쌍수(止觀雙修) - 제126강 지(止)와 관(觀)은 함께 수행해야 함을 밝힘 (1)

작성자虛 堂|작성시간14.03.25|조회수1,151 목록 댓글 24
다음카페 : 『 가장행복한공부 』
    17. 지관쌍수(止觀雙修) 제126강 지(止)와 관(觀)은 함께 수행해야 함을 밝힘 (1)
      지난 시간에는 위빠사나[觀觀] 공부를 했고, 오늘은 지관쌍수(止觀雙修)에 대해서 하겠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지관(止觀, 사마타관), 두 번째는 관관(觀觀, 위빠사나관), 세 번째는 지관쌍수(止觀雙修), 과정이 이렇습니다. 이 순서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제일 먼저 사마타를 닦고 난 다음에 두 번째는 위빠사나를 닦고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같이 닦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대승기신론」에서 하는 수행 방법의 과정인데 보편적으로 대승불교에서 이 과정을 얘기 합니다. 그런데 초기경전에 벌써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사마타를 닦고 난 다음에 위빠사나를 닦고, 두 번째는 위빠사나를 닦고 또 사마타를 닦고, 세 번째는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쌍수하고, 네 번째는 법문 듣고 그냥 깨달아 들어가는 방법, 이것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은 단순히 대승불교에서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두시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358p, ‘지(止)와 관(觀)은 함께 수행해야 함을 밝힘’, 지관쌍수(止觀雙修)입니다.
       (논 - 83)
      
      
      若行若住 若臥若起에서 皆應止觀俱行이라.  
      
      수행자는 오고 가며 앉고 눕는 삶 속의 모든 생활에서 
      모두 지(止)와 관(觀)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대체적으로 좌선 위주로 닦는 게 사마타관입니다. 그런데 위빠사나는 좌선만이 아니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닦을 수 있는 게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사마타 수행은 한 대상에 마음을 집중해서 생각의 흐름을 그치게 하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칠 지(止)자를 쓰는 거예요. 그러나 위빠사나는 대상의 움직임을 그 대상으로 하는 겁니다. 그래서 물건을 들고 놓고, 가고 오고하는 모든 것, 예를 들어서 요리할 때 무를 썬다든지 떡을 썰 때도 알아차림이 가능한 거죠. 몸의 움직임, 생각의 흐름 등 모든 것을 알아차리는 게 위빠사나에요. 그래서 본문에 ‘모두 지(止)와 관(觀)을 함께 수행해야 한다.’ 그랬는데 왜 함께 해야 되는지를 오늘 밝힐 이야기입니다.
       (”)
      
      
      所謂 雖念諸法自性不生이라도 而復卽念 
      因緣和合하여 善惡之業 苦樂等報가 不失不壞이고 
      
      이른바 모든 법의 자성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지만 
      다시 인연화합을 통하여 선과 악으로 나타나는 괴로움과 즐거움 같은 과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고, 
      ‘모든 법의 자성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은 지행(止行)이라 그럽니다. 지행을 닦고 생멸인연의 과보까지 관찰하는 것은 관행(觀行)이죠. 그러니까 먼저 지행하면서 관행을 닦는다, 사마타 하면서 위빠사나 한다는 얘기입니다. 저렇게 얘기를 하지만 우리가 하나 알아둬야 될 게 있습니다. 진여문에서 우리가 공부해본 바에 의한다면 자체성품이라는 게 비어 있다는 쪽에서 얘기하는 것은 잘 아시다시피 진여엔 불변(不變)과 수연(隨緣)이 있습니다. 불변은 공(空)을 얘기하고, 수연, 인연을 따르는 것은 공하지 않는 모습이죠[不空]. 그러면 본연의 마음이 진여인데, 진여의 두 가지 측면 중에 하나는 텅 비어 있는 부분이 있지만 인연을 따라서, 대상의 어떤 반연을 따라서 이루는 모습을 가지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면 지행한다는 것은 바로 불변[空]에 속하는 겁니다. 자체 성품이 텅 비어 있는 겁니다.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 속에서 다시 관행을 닦는다는 것은 인연을 따라서 일어나는 갖가지 인연의 모습을 알아차려 가는 것이죠. 여기서 생각해 봐야 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왜 사마타를 닦고 난 뒤에 위빠사나를 닦는가 하는 겁니다. 그 다음 구절에는 뭐가 있는가 하면, 생멸인연을 통해서 선악을 잘 판별 하거든요. 그러면서 자성이 비어 있는 것을 또 본다는 거죠. 관행 속에서도 지행하는 방법이 나온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위빠사나 속에서 사마타 하는 게 나오죠. 처음에 얘기를 할 때, 사마타를 닦고 그 다음에 위빠사나를 가고, 위빠사나에서 다시 사마타로 가고, 그 다음에 지관(止觀, 사마타와 위빠사나)을 함께 닦는 쌍수(雙修)를 한다고 했죠. 이 과정이 이 속에 다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 다음 구절을 읽어볼게요.
       (”)
      
      
      雖念因緣 善惡業報라도 而亦卽念 性不可得이니라.  
      
      비록 인연화합을 통하여 선과 악으로 나타나는 과보를 생각하지만 
      또한 그 자성은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게 쌍수하는 건데, 진여에 두 가지 중에 하나인 불변(不變)에서, 지행(止行)을 하고 난 다음에 관행(觀行)을 하지만 두 번째는 관행을 하고 그 다음에 지행을 하는 것이죠. 그러면서 결론적으로는 쌍수해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될 수 있는 것은 모든 현상계라고 하는 것이 인연화합에 의해서 결과가 온다는 사실을 얘기를 하고 있고 그 본질은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텅 비어 있는 부분과 인연화합에 의해서 결과가 오는 그 생멸인연의 모습하고는 전혀 정반대일 것 같지만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라는 사실이에요. 하나라고 한다면 한 측면만 수행해서 캐치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서 얘기하면, 여기 컵이 있다면, 컵에 모양이나 색깔은 인과 연의 모습이거든요. 인연의 모습을 잘 파악하는 것은 위빠사나로 하는 거고 그러면서 그 본질이 실체가 있느냐 없느냐 파악해 가는 거예요. 그러면 사마타는 뭔가 하면, 이것 자체가 자체 성품이 없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컵 하나에 현상의 모습과 본질이 비어 있는 공한 모습, 두 개 다 갖고 있습니다. 사마타만 닦으면 컵 자체의 텅 빈 모습은 볼 수 있지만 현상계의 상호관계성을 갖고 있는 하나의 흐름으로 흘러가는 것은 보질 못하는 겁니다. 반대로 단지 인연화합에 의해서 실체가 없는 한 가지 모습으로 흘러가는 것만 본다면 이 자체가 텅 비어 있는 것을 보지 못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다 같이 현상계가 매순간 인연을 갖고 모습을 달리해가는 것 하고 그러면서 매순간 그 속에는 자아와 실체가 없는 것 하고 같이 가는 거거든요. 그래서 수행도 사마타와 위빠사나를 같이 해야 되는 겁니다. 또 하나 얘기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수행을 했을 때 우리에게 어떤 이익을 갖다 주느냐 하는 겁니다.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고 생각해요. 현상계에 매여 있을 때 상호 관계를 갖고 이것을 잘 파악하지만 이것이 자아도 없고 실체도 없다, 매 순간 바뀌어 가기 때문에 독립된 어떤 자아라든지 실체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는 어떤 결과가 초래하느냐, 거기에는 선악, 이익과 손해되는 것, 또 좋고 싫어하는 것, 이런 상대적인 게 나타납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반드시 고통이 오는 것이죠. 사람과 사람간의 인간관계도 그렇고, 사람과 자연의 관계도 그렇고, 모든 것이 관계성 속에 있는데, 그 속에 그 자체가 독립되어 있는 것이 비어 있다, 결여되어 있다, 어떤 실체가 결여 되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때는 이런 현상계가 진짜 있다고 생각하고 그냥 아등바등하고 살아간다는 말이에요. 만일에 그렇게 살아가다가도 수행하는 분이라면, 상호 관계성 속에서 이익을 추구하고, 서운함도 생기고 질투도 생기고 증오심도 생기지만, 그런 인연관계가 원래 자체성품이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아는 분이라면 그 속에서도 몸과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거죠. 현상계와 본질이라는 것이 본래 하나예요. 텅 비어 있는 부분을 꿰뚫어 보는 것은 사마타로 꿰뚫어 보고 바깥 현상에 관계성을 갖고 있는 것은 위빠사나로 꿰뚫어 보는 거예요. 그래서 이 둘 관계가 분리되어 있지를 않는 것이죠.
       (”)
      
      
      若修止者면 對治凡夫 住著世間하여 
      
      지(止)를 닦는다면 세간에 대한 범부의 집착을 다스리고 
      지(止, 사마타)는 집착을 다스리는데, 집착은 아집(我執)와 법집(法執), 두 가지가 있습니다. 아집(我執)은 내 몸속에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게 하는 뭔가 실체가 있다, 자아가 있다는 것이고, 법집(法執)은 내 밖에 따로 무엇인가 존재한다, 나 외에 따로 분리되어서 존재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사마타 수행을 하게 되면 이 두 가지를 다스리게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것은 어떻게 알아야 되는가하면, 사마타 수행에는 반드시 증가되는 게 있고 감소되는 게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증가되고 무엇이 감소되느냐 하는 거예요. 『해심밀경(解深密經)』에서는 사마타 수행을 하면 생각의 흐름이 그쳐진다고 얘기합니다. 여기 「대승기신론」에서는 주관과 객관을 해체시키잖아요. 주객을 해체 시켰을 때 마음이 고요해지면서 점점 맑아져 가는 것이 증가하고 반대로 물을 그대로 두었을 때 이물질이 가라앉듯이 번뇌가 감소하는 거예요. 그런 과정 속에서 아집과 법집을 끊어 낼 수가 있다고 여기서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원효스님께서도 359p 세 번째 단에 보면
       《소(疏) - 83》
      
      
      若修止者면 離二種過라. 
      一者는 正除凡夫住著之執하여 遺彼所著人法相故니라. 
      
      지(止)를 닦는 것이라면 두 가지 허물을 여읜다.
      하나는 바로 범부의 집착을 없애 
      그가 집착한 아집과 법집의 고정관념을 없애주기 때문이다. 
      그랬죠. 집착은 바로 그걸 얘기합니다. 다시 358p 본문입니다.
       (논 - 83)
      
      
      能捨二乘 怯弱之見하고  
      
      오음에 대한 이승의 약하고 두려운 생각을 버릴 수 있으며, 
      오음(五陰)은 오온(五蘊)을 얘기합니다. 오음은 옛날 번역이고 요즘은 오온이라고 번역 합니다. 오온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인데 여기서 온은 쌓일 ‘온(蘊)’자를 씁니다. 색(色)은 육체를 얘기하고, 수(受)는 감수작용이고, 상(想)은 표상작용이고, 행(行)은 의지작용이고, 식(識)은 판단작용입니다. 육체라는 것은 물질을 얘기하죠. 예를 들면 떡을 봤다면, 떡을 보는 것은 감수[受]하는 거고, ‘맛있겠다!’ 생각[想]을 떠 올리고, 떡에 손이 가고[行], 먹어보고 맛이 있다, 없다 판단[識]하는 거예요. 이렇게 육체와 정신이 혼합된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우리 인간인 오온,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여기서 얘기하는 게 ‘오음에 대한 이승의 약하고 두려운 생각을 버릴 수 있으며,’, 이랬는데 이승(二乘)이라는 것은 성문(聲聞), 연각(緣覺)이죠. 왜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는가 하면, 잘 알다시피 육체라는 것도 끊임없이 바뀌어 가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지를 않아요. 다른 말로하면 생겼다 사라졌다 생멸하는 거예요. 영원하지가 않다는 거죠. 그러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굉장히 두려워하는 겁니다. 이런 두려움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느냐 이거죠. 바로 사마타 수행을 하면 두려움이 없어지는 거예요. 왜? 계속 공부해서 마음이 맑아지면 안과 밖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바깥 경계를 찾으려야 찾을 수 없고 안의 자기 모습을 알래야 알 수 없는 거예요. 비어 있는 놈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없기 때문에 생멸이 없는 줄 아는 거예요. 그러면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사람은 삶과 죽음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모릅니다. 특히 나이 들면서 점점 더 하죠. 어떤 분은 젊어서는 공부를 안 하고 나이 들어서 하려고 하지만 잘 안되니까 두려움이 생기는 거예요. 혼자서 괴로워하며 눈물 흘리기도 하고 두려운 생각에 어쩔 줄 몰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육체를 자기라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이 자기라 생각했지만 생각이 매순간 바뀌고 몸도 매 순간 바뀌니까 두려워하는 겁니다. 그렇지만 사마타 수행을 하다보면, 아까 제가 말씀드렸듯이 증가하는 게 있고 감소하는 게 있다는 겁니다. 특히 번뇌가 감소합니다. 몸이나 자아가 있다는 생각이 점점 없어져 가니까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는 겁니다. 다른 얘기를 해 보죠. 사마타 수행을 하면 몸이 가벼워지는 현상이 생깁니다. 이것은 번뇌가 감소해서 일어나는 현상인데 그런 상태에서 제일 먼저 오는 게 머리가 무겁습니다. 머리가 무거운 것은 마음의 나쁜 것이 빠져나가는 현상이라는 거예요. 그 다음에는 마음이 아주 가벼워집니다. 마음이 가벼워지면 몸도 새털같이 가벼워지는 게 옵니다. 그 다음에 몸 자체에서 기쁨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마음의 기쁨이 생깁니다. 수행하면 그런 과정이 있는 거죠. 처음에 머리가 무거운 것은 마음속에 나쁜 것이 빠져나가서 그렇다고 했는데, 이 말은 뭔가 하면, 명상 수행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몸과 마음이 상호 관계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빨리 알아차려야 됩니다. 몸의 상태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몸이 기운이 없고 축 처지면 잘못하면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의 대부분 모습은 어깨가 안쪽으로 오그라들어 있습니다. 반대로 어깨가 펴지고 고개가 뒤로 젖혀져 있는 사람은 교만이 아주 똘똘 뭉쳐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세를 보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알 수가 있는 거예요. 몸과 마음이 상호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을 빨리 아셔야 됩니다. 그러니까 머리가 무거운 것은 마음에 무언가 빠져나가는 중입니다. 무겁다고 하는 것은 기혈이 상승이 되어서 마치 무거운 것 같이 느껴지는 거죠. 그러다가 마음이 아주 가벼워지면 번뇌의 힘이 약해진 거죠. 그것은 몸의 기혈이 열려버린 겁니다. 기쁨이라든지 환희는 사마타 수행할 때 많이 일어나는 겁니다.
       (”)
      
      
      若修觀者면 對治二乘 不起大悲 狹劣心過하여 遠離凡夫 不修善根이라.  
      
      관(觀)을 닦는다면 자비가 없는 이승의 좁은 마음을 다스리고 
      좋은 일을 하지 않는 범부의 마음을 떠날 수 있다. 
      ‘자비가 없는 이승의 좁은 마음을 다스리고’, 이 말은 중생에 대해서 성문과 연각은 자기 혼자만 깨달으면 된다는 거죠. 그렇지만 대승은 자기만이 아니라 일체중생들과 함께 가는 겁니다. 자기의 깨달음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의 깨달음까지 생각하는 거죠. 그게 자비심입니다. 그래서 관행을 한다는 것은 앞에서 배웠듯이 대비관이 있죠. 중생들의 어렵고 힘든 것을 생각하는 거죠. 과거 전생부터 지금까지 윤회하면서 고통당한 것을 생각하면 연민심이 일어나는데, 이런 연민심이 점점 커집니다. 마음이 일체 중생을 생각한 만큼 커지는 것이죠. ‘좋은 일을 하지 않는 범부의 마음을 떠날 수 있다.’, 이 말은 게으르다는 것은 편안하니까 게으른 거죠. 이것은 시간이 다 되었기 때문에 다음 시간에 이어서 얘기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일단은 사마타 수행을 하게 되면 우선 두 가지가 다스려집니다. 하나는 범부의 집착이 다스려지고, 또 자신의 몸과 마음이 계속 변해가는 모습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없어지고,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두 가지가 다스려지는데, 하나는 좁은 마음이 없어지고 자비심이 많은 큰마음이 생기고, 그 다음에 게으른 마음이 없어진다는 얘기입니다. 게으른 마음이 없어지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해서 모든 것은 매 순간 바뀌어 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음시간에 뵙겠습니다. 다음카페 :『가장 행복한 공부』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가람불교 사무국장 | 작성시간 15.11.08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_()__()__()_
  • 작성자김종랑 | 작성시간 16.09.02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작성자수부띠(道光) | 작성시간 18.02.13 제가 btn 홈페이지에 2004년~2006년 대승기신론을 지운스님 동영상으로 강의할때 공부했었습니다. 그때 공부한 것이 가장행복한 공부 카페에서 그대로 문자화에 그 노고에 감사드리며, 양해를 얻어 모셔(아비라불교 밴드) 갑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지전 | 작성시간 18.07.20 _()_
  • 작성자greenworld | 작성시간 18.10.21 감사드립니다_()_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