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진여문(眞如門)
제18강 진여(眞如)의 길을 풀이한다 (1)
지난 시간에 심진여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책에 제목대로 하면 ‘(1) 진여의 길을 풀이한다’,
그 다음에 밑에 있는 제목은 ‘진여의 뜻을 통틀어 풀이함’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 하자면 일심(一心) 이문(二門),
진여문(眞如門)과 생멸문(生滅門)을 얘기 했는데,
생멸문은 나중에 뒤에 가서 얘기를 하고
지금은 진여문에 대해서 계속 얘기를 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진여문에서 심진여(心眞如)에 대해서 설명을 한다는 거죠.
‘(1) 진여의 길을 풀이한다’는 것은 진여문에 해당하는 것이고,
‘진여의 뜻을 통틀어 풀이함’이라는 것은
심진여(心眞如)에 대해서 통틀어서 얘기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전 시간에 일법계대총상법문체(一法界大總相法門体)라고 얘기 했죠.
거기에 대한 설명을 했고,
이 심진여를 설명할 때
세 가지를 들어서 제가 얘기한다 그랬습니다.
그 세 가지가 유식삼성(唯識三性)입니다.
다음에 유식삼무성(唯識三無性)으로 들어가면 진여가 들어나는 거죠.
「대승기신론」에서는 유식삼성(唯識三性)을
분별성(分別性), 의타성(依他性), 진실성(眞實性), 이렇게 했는데,
「유식(唯識)」에서는 분별성(分別性)을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성(依他性)을 의타기성(依他起性),
진실성(眞實性)을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그랬습니다.
분별성(分別性)이 두루 헤아려서 집착하는 성품[遍計所執性]인데
비유를 들면, 산길을 가다가 뱀을 보고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는데,
자세히 보니까 뱀이 아니고 새끼줄인 겁니다.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한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대상을 분별한다는 것은 전부다 착각이라는 겁니다.
이 분별성(分別性)은 대개 상(相)을 가지고 얘기를 합니다.
이 상에 대해서 잘못 알고 있는 거죠.
그러면 형상이 왜 진실하지 않느냐 하면, 한 번 봅시다.
이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분필이죠.
그러면 이 분필이 여러분들한테
분필이라고 말해달라고 한적 있습니까? 없죠.
그러면 이 하나만 보더라도 주관적 판단이 들어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 분필은 보는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어떤 한 사람을 평가하더라도 평가하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르고
어떤 미술품을 보더라도 보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른 겁니다.
실제로 밖에 대상이 확실하게 존재한다면
이구동성으로 똑같이 얘기를 해야 되는데 다 다르게 얘기 하거든요.
그것도 역시 주관적인 거죠.
그래서 분필을 부수면 가루가 되는데
가루를 분필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하면, 아니죠. 말할 수 없죠.
이것을 분필이라고 얘기했을 때 두 가지 조건이 맞아야 됩니다.
하나는 변하지 말고 영원히 존속해야 된다는 거예요.
우리가 판단하는 것은 언어상 분필이라고 얘기 했지
분필에 맞는 그 대상은 부서지기 때문에
실제로는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두 번째는 이 분필이 다른 것과 관계없이 독립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독립된 분필은 존재하느냐하면 안 그렇다는 거죠.
제 손에 들려 있다는 자체가 벌써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는 겁니다.
독립된 존재가 아니라면 변한다는 거죠.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고 관계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변하는 존재입니다.
또 어떤 문제가 있느냐 하면,
형상이 있는 분필은 부서지고 없어질 수 있지만,
분필이라는 언어는 10년 전에도, 20년 전에도 사용 했습니다.
언어는 변하지 않았는데,
언어가 지시하고 있는 이 분필은 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분필이 실제로 있다고 봅니다.
언어에 합당한 그 대상은 존재한다고 보는 거죠.
그것이 생각이나 말을 가지고 분별하는 분별심입니다.
그런 생각이나 말을 가지고 분별하는 그 상(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무성(相無性)이에요.
상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마치 새끼줄를 뱀으로 착각해서 놀라는 거와 같은 겁니다.
그 다음에 의타기성(依他起性)은 타(他)를 의지해서 존재하는 겁니다.
이것은 식(識, 마음)을 얘기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항상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대상이 없으면 우리 마음은 작용이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일어났다 사라졌다, 변하고 기복이 있는 것은
대상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변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은 홀로 생기지 않기 때문에 생무성(生無性)입니다.
자연생이 아니라는 겁니다.
타를 의지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자연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 마음도 대상이 없이는 홀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심(一心)이라는 근본 마음만 실재하는 것이지
다른 것은 실재하지 않는 거죠.
우리가 보통 마음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몸 기운에 의해서 형성 된 마음을 얘기 합니다.
그게 의식입니다.
몸 기운에 의해서 형성 된 마음이라는 얘기는
『원각경』 보현보살장에 나옵니다.
그래서 식(識)이라는 우리 마음은 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은 자연생이 아니다, 그래서 생무성(生無性)입니다.
그 다음에 원성실성(圓成實性)은
승의무성(勝義無性)이라고도 얘기 합니다.
이게 유식삼성(唯識三性)에서 유식삼무성(唯識三無性)으로 가는 거예요.
승의(勝義)라는 것은 ‘뛰어난 뜻’인데,
새끼줄을 발뒤꿈치로 문질러보니까 삼으로 이루어진 거죠.
우리 마음이 대상하고 관계 속에서 마음 작용이 일어나는데
그 본질은 새끼줄이 삼으로 이루어 졌듯이 텅 비어 있는 겁니다.
그것[勝義無性]은 진여(眞如)를 얘기합니다.
여기에서 두 번째 의타기성(依他起性)이 중요한 거예요.
의타기성은 마음인데 그 마음 안에 말과 생각이 개입되어 있으면
그 마음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변합니다.
분별성(分別性)으로 바뀌는 거죠.
분별한다는 것은 말이나 생각을 의지해서 분별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수행을 열심히 해서 말과 생각을 떠나면
의타기성(依他起性)이 진여(眞如)로 바뀌어 버립니다.
가장 중요한 게 의타기성인데,
의타기성에는 염분의타(染分依他)와 정분의타(淨分依他)가 있습니다.
염분의타(染分依他)는 여기서 말하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고
정분의타(淨分依他)는 진여(眞如)를 얘기 합니다.
염분(染分)이라는 것은 물들어 있다 이거죠.
무엇으로?
말과 생각에 의해서 진실이 가려져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말과 생각만 떠나 버리면 진실을 보는 거죠.
예를 들면,
여기 종이의 진실을 밝혀 볼까요.
여러분들 이 종이를 볼 때 시선이 종이를 뚫고 나갑니까?
그렇지 않죠?
여기[종이]에 머물러 있죠.
여기 머물러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죠, 종이라는 생각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시선이 여기 딱 머물러 있어요.
그런데 종이라는 생각, 종이라는 말을 다 떠나버린 사람에게는
이 종이를 봤을 때 뭘로 보일까요?
시선이 머물지 않고 차고 나가버립니다.
이게[종이] 비어 있는 겁니다.
그러면 종이라고 생각하는 자체는 분별성입니다.
그렇지만 종이가 실체 없음을 명확하게 보면
그것은 진여를 보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종이 자체는
여러 가지로 화합해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의타기성이에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시죠?
그래서 의타기성이 마음[識]이라 했는데, 수행법도 그렇습니다.
남방 위빠사나 수행할 때 몸 관찰 들어간다고 했죠.
대부분 몸 관찰 합니다.
「청정도론」에 보면
‘몸을 관찰하면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몸 관찰 할 필요 없이 마음으로 바로 들어가면 된다, 왜?
몸도 마음의 현상이고 보이는 이 세계도 마음의 현상이라 이거죠.
몸이나 현상을 있게 하는 것이 말과 생각이라는 거죠.
『화엄경』에서도 부처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말과 생각으로 이루어진 세계다’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짜 세계죠.
그러면 수행은 간단한 겁니다.
말과 생각을 떠나버리면 됩니다.
말과 생각을 떠나는 게 수행이에요.
뒤에 가면 진여로 들어가는 길에 대해서 문답이 이루어지는데,
그 문답에서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몸 관찰 할 필요가 없이
마음으로 바로 들어가면 되는 겁니다.
그렇지만 마음이라는 게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는
몸 관찰해서 들어가는 게 훨씬 쉽겠죠.
이것은 방편입니다.
그래서 상무성(相無性)은 모양이 없는 거고,
생무성(生無性)이라는 것은
모든 상호관계가 의존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생긴 게 아니라 이거죠.
그리고 승의무성(勝義無性)이라는 것은
승의는 진여다, 본질이 참답고 변하지 않는다 이겁니다.
이게 심진여(心眞如)에 대한 설명입니다.
저렇게 가려면 알아차림에 대한 얘기를 해야 되겠죠.
알아차린다는 것은 생각도 아니고 감각도 아니라고 얘기를 했는데,
지난 시간에 그런 질문이 있어서 말씀드립니다만
예를 들어서 손바닥을 폈다가 오므릴 때
손에 여러 가지 감각이 생깁니다.
손에 움직임, 손바닥이라든지 손가락에 느낌이 옵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호흡관찰 할 때
호흡이 길면 길다고 관찰하고 짧으면 짧다고 관찰하는 겁니다.
이것은 남방 위빠사나에서 수식관하는 방법입니다.
그 알아차림은 생각이나 감각으로 하는 게 아니죠.
그리고 호흡의 길이, 굵기, 차고 더움, 빠르고 느림, 이런 게 있습니다.
그런데 이 호흡관찰도 잘 이해가 안 되면,
손을 꼬집으면 아프다고 “아야” 하고 알아차리죠.
그게 알아차림입니다.
쉽게 말해서 느낌도 관찰 대상이고 생각도 관찰 대상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생각이 일어난다고 알아차리고
느낌이 오면 느낌도 알아차리는 거죠.
이 알아차림을 정념(正念)이라고 그러는데 이런 식으로 하는 겁니다.
말과 생각을 떠나는 방법도 이 알아차림으로 하는 겁니다.
남방에서 알아차림으로 하는 대상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무상(無常)이고,
두 번째는 고(苦), 세 번째는 무아(無我)입니다.
무상(無常)은 변화를 알아차리는 겁니다.
고(苦)는 갖가지 고통인데, 이것은 알아차리기 쉬워요.
무아(無我)는 알아차리기가 힘든데,
변화를 계속 알아차리면 됩니다.
왜냐하면 고(苦)도 변하거든요.
변화를 알아차리면 변화를 주재하는 자아가 없으면 무아를 보는 겁니다.
변하는 어떤 실체라든지 알갱이 같은 것이 없다면
그것은 공(空)을 보는 겁니다.
공(空)도 무아(無我)의 다른 이름이에요.
이렇게 알아차리게 되면 말과 생각을 떠나버립니다.
남방 위빠사나에서는 의식에 초점을 두지만
대승불교에서는 자성청정심, 불성에다 그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133p (논 – 11) 그 다음 구절을 보십시오.
(논 - 11)
若離妄念하면 則無一切境界之相이니
是故로 一切法이 從本已來로 離言說相 離名字相 離心緣相이니
畢竟에 平等하여 無有變異하고 不可破壞이어 唯是一心이라.
故로 名眞如니라.
망념을 여읜다면 경계로 나타나는 모든 모습은 없다.
이 때문에 모든 법이 본디부터 말에 있는 모습과
이름에 있는 모습과 마음에 인연한 모습을 여의어서,
마침내 평등하여 변할 것이 없고 무너뜨릴 수도 없어
오직 한마음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진여라고 한다. |
여기에
‘망념을 여읜다면 경계로 나타나는 모든 모습은 없다.’
이 말을 우선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망념을 여의면 일체 경계는 없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는 거예요.
결국 뒤집어서 얘기하면 망념은 생각인데,
그 생각이 바로 일체 경계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생각이 경계라는 얘기죠.
유식에서는 생각은 사물이라 그랬습니다.
우리 마음이 컵을 보면 그 마음에 똑같은 형상의 컵이 생깁니다.
우리는 마음 안에 있는 컵하고 밖에 있는 컵하고 동일시합니다.
그러나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컵은 찰나로 변하고 있는 거죠[無常].
여러분들 일 주일 전에 이 컵을 보셨죠?
그럼 지금 보는 컵과 변화 있습니까?
변화를 못 느끼죠.
그것은 망념으로 보고 있는 겁니다.
실제 이 컵은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계속 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 시각상으로는 안 변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바깥에 변하는 컵을 보는 게 아니고
마음 안에 저장되어진 영상을 보고 있는 겁니다.
실제 컵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는데
이 영상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인 거죠.
그러니 가짜를 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망념에 의해서 일체 경계가 나타나는 겁니다.
바깥에 대상은 무상해서 일정한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 망념만 사라지면 일체 경계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우리 마음에 저장된 영상을 보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자기가 자기를 인식하는 ‘자기인식’이라 그럽니다.
그래서 「대승기신론」뒤에 가면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고 있지만
사물을 인식하는 게 아니고 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바깥에 보이는 대상도 자기 마음이다,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이다, 이렇게 얘기 합니다.
사람들은 대상을 고정화 시켜서 보는 습성이 있어요.
그것일 깨트리는 방법이 변화를 알아차려가는 방법을 써야 됩니다.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빠르게 변하는 대상을 알아차리는 겁니다.
이게 수행이에요.
그렇게 했을 때 망념에 의해서 모든 세계가 나타나고
망념이 사라지면 보이는 경계도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정화 되어 있는 세계는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그 다음에 보면 확실한 얘기를 합니다.
‘말에 있는 모습과 이름에 있는 모습과
마음이 인연한 모습을 여의어서’, 이랬습니다.
언설상(言說相), 명자상(名字相), 심연상(心緣相)을 떠난다[離],
떠나면 진여가 나타나는 겁니다.
바꾸어 얘기하면 진여(眞如)는 말[言說]에 의해서 가려져 있고,
문자[名字]에 의해서 가려져 있고,
대상을 반연함[心緣]으로 해서 가려져 있는 겁니다.
심연(心緣)은 인식한다는 뜻이고,
그래서 대상을 인식하는 것을 심연상(心緣相)이라 그럽니다.
실제로 몸에 대한 얘기를 해보면,
남방 위빠사나 열여섯 단계 중에서
다섯 번째 단계가 몸 사라짐의 단계입니다.
언설상(言說相), 말이라는 것은 대상인 형상이 있어야 됩니다.
형상이 있어야 저것은 무엇이다, 무엇이다 이름을 붙일텐데
모든 형상은 항상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을 못 붙이는 겁니다.
명자상(名字相)도 마찬가지에요.
명자상은 이름을 못 붙이는 거고 언설상은 말을 못 붙이는 겁니다.
그 다음에 저것이 무엇이라고 인식하려고 하면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인식도 못해요.
그래서 몸 관찰을 통해서 이런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진여를 알 수가 있는 겁니다.
더 말씀을 드려야 되는데 시간이 다 됐습니다.
다음시간에 자세히 말씀드리기로 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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