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귀신이라거나,
수행 중 만나는 경계라거나 하는 등의
정신적인 어떤 역경계를 만났을 때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사실 물질적인 현실 세계의
온갖 힘들고 괴로운 경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갑자기 부도가 났다’거나,
‘남들이 나를 욕하고 모함한다’거나,
‘괴로운 일이 생겼다’거나 하는 그런 경계에도
우리가 과도하게 마음속의 에너지를 부여해가지고
과도하게 가슴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거기에 휘둘리고, 휘청거리고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내 스스로 그 경계에 무너지면서
괴로워하고 과도하게 반응을 하게 되면
그 외부 경계가 내 두려운 마음을 먹고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외부의 그 경계 자체가
진짜 힘이 있는 경계였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두려워했기 때문에
두려움의 경계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무서워해야만 그 경계는
무서운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급을 못 했다거나, 부도가 났다거나,
욕을 얻어먹었다는 등의 외부 대상은 그것 자체가
절대적인 괴로운 실체를 지닌
경계인 것으로 오해를 하곤 합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 현실에 부여한 해석일 뿐이지,
사실 모든 경계는
그것 자체에는 아무런 힘도 없고,
실체성도 없고, 괴로움도 없습니다.
진급을 못 했기 때문에 신나게
다른 직장, 다른 일을 시작할 수도 있고,
부도가 났기 때문에 새로운 다른 일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도 있습니다.
욕을 얻어먹었을지라도 내가 그것을 받을지 말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지요.
중요한 점은
그 외부 경계에 내가 힘들어하기로 작정을 하는 순간,
그것이 그때부터 내 마음을 먹고
실체적 힘을 지닌 존재로
덩치를 키우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모든 외부의 일들은
내 안에서 내가 만들어내는 것일 뿐이지,
그것 자체의 실체적 힘을 지닌 대상경계는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중도적으로 본다’는 것은
과도하게 두려워하지도 않고,
과도하게 더 집착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양극단을 내려놓고
다만 ‘그것이 일어나고 있구나’ 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그것뿐이지요.
그냥 보고 있을 뿐인 겁니다.
그게 일어나도록 허용해 주는 겁니다.
가라고 하지 않고,
‘그래, 여기 있는 것을 내가 받아들일게’ 하고
‘네가 어떤 일을 어떻게 벌이는지 한 번 지켜보자’ 하고
여유롭게 관객이 되어 바라봐 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온갖 번뇌 망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질투심, 괴로움, 미움, 화 등의 마음이 올라왔을 때,
‘그래. 잘 왔다’하고
그냥 이렇게 미소를 지으면서 바라봐 주세요.
그 올라온 마음을 진짜라고 믿을 아무런 근거는 없습니다.
다만 내가 올라온 생각에
힘을 부여하는 것일 뿐이지요.
크게 대응할수록
그 대응하는 상대에게 힘을 실어주는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아주 큰 잘못을 한 제자나 외도들에게도
“묵빈대처(黙賓對處)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수행자들이 그 사람에게
말도 걸지 말고 침묵을 지키라’는 것이지요.
그게 최고의 벌이었어요.
그 말은 뭐냐 하면,
대응하지 말라는 겁니다.
대응하면 그쪽에 오히려 힘을 실어주는 거니까.
저도 인터넷 홈페이지를 오래 운영하다 보니까
홈페이지에 들어와서 딴죽 걸 듯이
막 말싸움을 붙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아요.
그 때는 부처님의 방식대로
그냥 딱 ‘묵빈대처’하는 게 가장 좋습니다.
반응하지 않는 거예요.
아예 클릭도 안하고,
아예 댓글도 안 달아주고 가만 내버려두는 겁니다.
그럼 혼자서 막 그러다가 그냥 스르르 가 버려요.
재미가 없으니까.
여기는 싸워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어떤 경계가 오더라도
그 경계는 나를 집어삼킬 수 없습니다.
내가 그러기를 허락하기 전에는 말이지요.
과도하게 대응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그저 허용해 주고 바라봐 주세요.
* 출처 : 목탁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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