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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쎄의 산문

정신 해부학 침대 위에서

작성자폴쎄|작성시간26.06.06|조회수19 목록 댓글 0

정신 해부학 침대 위에서

 

가끔은 내가 해체되어 정신 해부학 침대 위에 놓여 있는 기분이 든다.

 

한쪽에는 후회가 놓여 있고,
다른 쪽에는 미련이 놓여 있다.

 

오래된 상처 하나는
아직도 이름표를 달지 못한 채 구석에 놓여 있고,

 

이미 지나간 줄 알았던 기억들은
불쑥불쑥 걸어 나와
자신을 다시 살펴보라고 등을 떠민다.

 

나는 그 곁에 서서
현미경을 들이대듯 나를 들여다본다.

 

이 생각은 어디서 왔을까.

 

이 두려움은 언제부터 내 안에 살았을까.

 

이 고집은 무엇을 지키려 했던 것일까.

 

그렇게 하나씩 살펴보다 보면
어느새 나는 환자이면서 의사가 되고,
해부 대상이면서 관찰자가 된다.

 

그러나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사람의 마음은 몸처럼 깔끔하게 분류되지 않는다.

 

그리움과 원망이 한자리에 앉아 있고,
슬픔과 고마움이 같은 옷을 입고 있으며,
포기한 줄 알았던 소망이
아직도 숨을 쉬고 있다.

 

그래서 해부는 끝나지 않는다.

 

마음을 칼로 나눈다고
삶까지 나누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흩어진 생각들을 대충 주워 담고
다시 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어느 날 또다시
그 정신 해부학 침대 위에 누워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또 무엇이 발견될지 모른 채.

 

 

누구는 가슴에 승냥이와 여우를 들여 키운다고 말한다.

 

승냥이는 세상에 맞서기 위한 공격성과 독기,
자기방어의 본능일 것이고,

 

여우는 처세와 눈치,
지혜와 계산,
때로는 능청스러움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이런 동물들을 한두 마리쯤 품고 사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는 승냥이가 너무 커져 늘 으르렁거리고,

 

어떤 이는 여우가 너무 영리해져
좀처럼 속마음을 보여주지 않는다.

 

또 어떤 이는 토끼 같은 두려움을,
거북이 같은 느림을 품고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정신 해부학 침대에 누워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내 안에 어떤 동물이 살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승냥이도 있고,
여우도 있고,

 

어쩌면 쇠비름처럼
뽑혀도 다시 일어서는 고집 한 포기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동물들을 없애는 일이 아니다.

 

누가 주인인지 잊지 않는 일이다.

 

가끔은 승냥이가 앞장서고,
가끔은 여우가 꾀를 내더라도,

 

결국 목줄을 쥔 사람은 자기 자신이어야 하니까.

 

그래서 요즘은 승냥이나 여우보다
동물 조련사 한 명을 키우는 일은 어떨까 하고 생각을 한다.

 

늘 한 발 물러서서

 

"지금 저놈이 무슨 끙끙이지?"

 

하고 지켜보는 사람.

 

그 관찰자가 곁에 있으면
공격성도,
교활함도,
게으름도,
두려움도,

 

조금은 더 선명하게 보인다.

 

어쩌면 사람은 평생
자기 안의 동물들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 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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