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올 듯한 저녁
바람이 이는 게 제법 비가 내릴 듯했다.
아직 비는 오지 않았으나 공기에는 이미 젖은 냄새가 배어 있었다.
날씨도 몸도 그 어떤 징조를 먼저 띄운다. 매사가 그렇다.
비가 오기 전에는 바람이 먼저 불고, 몸이 지치기 전에는 기운이 먼저 가라앉는다.
사람의 일도 관계가 멀어질 때는 말수가 줄고, 마음이 흔들릴 때는 눈길부터 달라진다.
세상일은 갑자기 일어나는 듯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언제나 작은 예고가 먼저 와 있었다.
그러나 징조가 늘 분명한 것은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닌 망설임 속에서 날씨도 그런가 보다.
비를 내릴 듯 말 듯 하늘은 머뭇거리고, 바람은 불다가 멎고, 빗방울은 몇 점 흩어지다 만다.
사람 마음 또한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붙잡아야 할지 놓아야 할지 한참을 서성인다.
만사가 분명하면 좋을 것 같지만 세상일이 어디 뜻대로만 되던가.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더 많고, 알 수 없는 일은 늘 예정보다 앞서 와 있다.
사람은 어쩌면 불확실함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살아가기도 한다.
저녁에는 친구가 막걸리 한잔하러 오기로 되어 있었다.
비가 오면 미리 오지 말라고 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빗방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할 무렵, 친구는 이미 와 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약속은 약속이기 때문이다.
날씨는 망설여도 사람은 마음먹은 길을 온다.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아도 사람 사이에는 지켜지는 것들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몇 가지 덕분에 불확실한 세상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다.
막걸리 두 병, 왕뚜껑 라면 둘, 라면땅 세 봉지.
참 변변찮은 술상이라 할지 모르나,
살아보니 저녁의 값어치는 차려진 음식보다 마주 앉은 사람에게 있었다.
공원 광장 벤치에 앉아 분수대 물줄기를 바라보았다.
음악은 제 리듬대로 흐르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저녁을 지나고 있었다.
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하나님, 이제는 가엾이 여겨 한 번쯤 봐줄 때도 된 것 같은데요.”
원망이라기보다 농담에 가까운 말이었으나,
농담 속에는 늘 진심이 조금 섞여 있는 법이다.
친구는 가고, 나는 조금 취한 몸으로 귀가하는 길.
밤은 깊어가고, 개구리 울음이 들렸다. 그것은 꼭 여울물 소리를 닮아 있었다.
저마다 제 소리로 우는 데, 멀리서 들으면 하나의 물결이 되었다.
사람 사는 일도 저마다 다른 사연으로 울고 웃으며 살아가지만,
멀리서 보면 모두 시간이라는 강물 곁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인 것을.
비는 끝내 올 듯 말 듯했고, 세상은 여전히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저녁만큼은 세상이 나를 아주 박하게 대하지는 않은 듯했다.
친구는 왔고, 약속은 지켜졌고, 개구리 울음은 여울물처럼 흘렀다.
그 정도면 살아가는 하루의 몫으로는 과하지 않은 듯싶다.
나는 조금 취한 걸음으로 귀가 중이고,
밤은 깊어가고, 세상은 여전히 고요히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