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화 앞에서
오랜만에 봉숭화를 보았다.
길가 한켠에 조용히 서 있는 그 작은 꽃 하나가, 오래된 시간의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떠오른 것은 꽃이 아니라 사람의 시간이었다.
어린 날의 나, 마당을 뛰어다니던 계절, 아무 이유 없이도 하루가 충분하던 시절.
그 장면들은 설명이 아니라 냄새처럼, 빛처럼 한꺼번에 밀려왔다.
꽃 너머로 어머니의 얼굴이, 누님의 목소리가 스쳤다.
봉숭화는 언제나 꽃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그 곁에 있던 사람들, 그들의 온기까지 함께 불러오는 방식으로 피어 있었다.
세월은 각자의 방향으로 흘러 흩어졌지만,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 깊은 자리에서 조용히 남아 있다.
낡지 않은 채로, 다만 다른 시간의 모습으로.
추억은 과거를 꺼내는 일이 아니었다.
현재의 안쪽에서 다시 숨을 쉬게 하는 일이었다.
몸은 늙고 풍경은 바뀌어도,
어떤 기억은 여전히 지금을 붙들어 세운다.
힘겨운 날이면 그 기억이 등을 밀고,
지친 날이면 그 온기가 마음을 감싼다.
봉숭화 앞에서 나는 꽃을 본 것이 아니었다.
오래된 나를 다시 만났고,
멀어진 사람들의 숨결을 다시 들었고,
오늘을 버티게 하는 조용한 힘을 다시 확인했다.
작은 꽃 하나가 가르쳐 주고 있었다.
추억은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 안에서 살아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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