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한 생각
괜히 진료의뢰서를 아내에게 보여
걱정거리만 안겨준 것 같다.
두 아들도 은근히 걱정하는 기색을 보였다.
사실 마지막까지 나를 걱정해 줄 사람은
가족밖에 더 있겠는가.
나 역시 초연해지고 싶지만, 그게 어디
마음먹는다고 되는 일인가.
나도 모르게 말과 행동, 그리고 거취에서
자연스레 드러나게 마련이다.
아침 밥상에서 나는
묻지도 않은 말을 혼잣말처럼 했다.
“벌써 김치가 맛이 들었네.”
무거운 공기가 싫었다.
밖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늘
찾아오는 식구들이 와서 안부를 묻는다.
그래, 이것이 삶의 이치일 것이다.
걱정은 나누고, 안부는 묻고, 서로를 살피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가족이고, 또한 사람 사는
세상이다.
진료의뢰서 한 장이 집 안의 공기를 잠시 바꿔 놓았다.
말로 꺼내기도 전에 가족의 눈빛이 먼저 반응했고,
그 안에서 나는 괜히 불필요한 짐을 더 얹어 놓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사실 삶이라는 것은 늘 이런 식이다.
아무 일도 아닌 듯한 종이 한 장이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그 흔들림이 다시 가족의 표정으로 번져 간다.
걱정은 숨기려 할수록 더 또렷해지고,
초연해지려는 마음은 오히려 서툴게 드러난다.
아침 밥상 위에서 던진 “김치가 맛이 들었네”라는 말은,
어쩌면 그 무거운 공기를 조금이라도 덜어 내려는 작은 바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삶은 거창한 말보다 그런 사소한 말들로 이어진다.
이발도 하고, 다려놓은 남방도 갈아입으라는
평소처럼 던지는 아내의 말이 걸린다.
그 말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붙잡는다.
걱정은 지우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
안부는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놓지 않기 위한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이치 속에서 가족은 서로를 살피며 오늘을 건너간다.
조금은 서툴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조용히 생각한다.
그래, 이렇게 살아지는 것이 삶이겠지.
아침에 읽은 ‘나의 묘비명을 상상한다’는
모 소설가의 글이 새삼 다가오는 건 정말 우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