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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태평양 선교역사

작성자따뜻한 남자|작성시간08.07.30|조회수285 목록 댓글 0

남태평양 선교의 역사

 

남태평양은 많은 작가들로 인하여 아름다운 섬들로 묘사가 되었고, 많은 여행객들로 인하여 환상적인 휴식처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태평양의 섬들을 표현하기 위해 쓰이는 말인 오세아니아(Oceania)는 약 1500여개의 섬들로 이루어졌는데, 크게 세부분으로 나뉜다. 가장 큰 지역인 폴리네시아(Polynesia)는 북쪽의 하와이로부터 시작하여 남쪽으로는 뉴질랜드까지 펼쳐져 있다. 작은 섬들의 집합체인 마이크로 네시아(Micronesia)는 마리아나(Marianas), 캐롤라인(Caroline), Marshall, 길버트(Gilbert) 섬등을 포함하여 하와이와 필리핀 제도 사이에 위치한다. 그리고 마이크로 네시아 남쪽과 호주 북쪽 사이에 있는 멜라네시아(Melanesia)는 피지, 산타크루즈, 뉴기니아, 뉴헤브리디즈, 뉴칼레도니아와 솔로몬제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남태평양 지역 최초의 선교 활동은 스페인의 탐험가인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 라는 사람이 1513년에 태평양을 처음 발견한 후 마젤란이 1519년에 남아메리카를 통과하며 태평양에 들어섰고, 그 후 1521년 프란시스회 수도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6세기 동안 로마 카톨릭인은 이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했으나 커다란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태평양에서 개신교선교의 필요성은 쿡선장의 공헌이 크다. 그의 태평양 보고로 인해 개신교지도자들이 크게 도전을 받아 1795년에 개신교의 여러종파들의 지도자들이 모여 타히티(Tahiti)나 남태평양 다른 섬에 선교사를 파송할 목적으로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를 조직하고 1796년 8월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은 30여명의 선교사들이 6명의 부인들과 3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선교 선박인 더프(Duff)호를 타고 출발하여 7개월간의 항해 끝에 타히티(Tahiti)에 도착한 이후 지금까지 선교가 이루어지고 있다.

 

카톨릭과 개신교의 대립

오늘날에도 동일한 양상을 보인 카톨릭과 개신교간의 갈등은 초기 태평양 선교에 있어서도 두드러지게 보였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대부분 카톨릭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의 도덕적 부패상은 아랑곳 하지 않고 성례에만 기반을 둔 껍데기 종교라는데 의견을 같이 하였다.

 

요셉 워터하우스(Joseph Waterhouse 감리교 선교사) “교황주의자들은 원주민들의 식인 풍습, 일부다처제, 간음과 여러 가지 성적 타락상을 용인해 줌으로써 본색을 드러냈다.”

 

초기 개신교 선교사들은 영국이나 미국의 정치적인 개입을 워치 않았지만 프랑스 카톨릭 선교사들이 들어오자 자신들의 신변보호 차원에서 지나친 정치 개입을 요구했지만 두 나라 다 개입하지 않았다. 그 결과 19세기 중반, 영국 선교는 쇠퇴하게 되었다.

 

초기 선교 전략

태평양은 섬들의 집합체라는 지정학적인 특성 때문에 무엇보다 교통 수단이 중요하였다. 그래서 초기 남태평양 선교는 지역의 특성상 ‘선박선교’를 통해서 지대한 공헌을 했다. 모닝 스타호(Morning Star), 폴리네시아의 죤 윌리암스호(John Williams), 멜라네시아의 서던 크로스호(Southern Cross)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선박 선교를 통해 유럽 선교사들은 순회 현장 지도자가 되어 원주민 사역자들과 동역을 하게 되었다.

 

원주민 동역자들은 1839년과 1860년 사이에 유럽인들이 감히 들어가지 못한 지역까지 들어가서 활동함으로서 태평양 선교의 위대한 업적을 쌓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동족들에게 죽임을 당하하기도 하였다.

초기 남태평양 선교의 어려움들과 성과물들

 

더프호와 헨리 노트

선교 초기에는 어느 곳에서나 박해와 위험이 따랐듯이 태평양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 데에도 희생이 뒤따랐다. 그것은 대부분의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이다. 섬들을 방문한 유럽 상인들의 잔인한 만행들로 인해 선교사들의 삶에 의구심을 품었다. 그리고 당시 원주민들 대부분은 애니미즘(Animism)을 신봉하고 있었는데, 이 신앙에 의하면 비록 좋은 의도를 가지고 왔어도 낯선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악령의 저주를 의미했기 때문에 호전적인 원주민들에게 붙잡히면 순교의 제물이 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초기 남태평양 선교사들의 어려움은 자신들과의 투쟁에서의 실패이다. 선교사들에게 언제나 물질로 인한 유혹이 따라다녔고, 게다가 방종한 생활양식과 성의 개방으로 인한 성적 유혹은 더욱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더프호의 선교사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윌리암 크룩과 존 해리스가 마퀘사스(Marquesas)에 내렸다. 이들을 맞이한 두 명의 원주민 여인들은 옷을 전혀 입지 않았고, ‘와헤인 와헤인(우린 처녀입니다.)’라고 외치며 그들을 유혹했다. 그러나 이들 선교사들은 전혀 동요가 되지 않았지만 그 날 저녁 해리스는 추장의 아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으나 결국 그날 저녁 추장의 아내가 데리고 온 몇 명의 여인들에 의해 강제로 추행을 당하고(?) 말았다. 그 후 헤리스는 그 섬을 떠나게 되었고 1년 뒤 크룩 선교사도 역시 동일한 문제로 그 섬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통가에서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는데 배에서 도망친 선원들의 부패하고도 타락한 생활로 인해 1명의 선교사가 그 무리 가운데 휩쓸리게 되었고, 섬에 내전이 일어나 3명이 죽고 6명은 가까스로 탈출하게 되었다.

 

타히티에 남아있던 선교사들도 대부분 조금씩 결실을 맺어 가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돌아가고 벽돌공이었던 헨리 노트 (Henry Nott)만이 남아서 타히티의 복음화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노트는 아무런 성공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16년 동안 참고 견디며 타히티의 복음화를 포기 하지 않았다. 노트에게 가장 커다란 장애물은 티히티의 포악하고 쾌락을 탐닉하는 포매어 왕이었다. 포매어는 한번에 2000명을 죽여 제사드릴 만큼 악명이 높았다. 그를 이은 포매어 2세도 역시 음란하여 동성애까지 즐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트는 과감하게 포매어 2세에게 죄에 가득찬 생활을 버리라고 공개적인 탄원을 했다. 노트의 끊임없는 탄원의 결과 포매어는 공적인 우상을 버리게 했고, 자신은 5천명이 지켜 보는 가운데 세례를 받았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개종을 하게 되었다.

 

노트의 이러한 노력은 유아 살해, 식인 축제, 전쟁들이 사라지게 했다.

 

결론적으로 초기 남태평양 선교는 선교사 개인적으로는 몇몇이 실패를 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인 남태평양에서의 선교는 기독교 역사상 유례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크게 성장한 지역이다. 특별히 이 지역은 구조적으로 가부장적, 특히 추장이 중심이되는 구조 속에서 한 종족 전체가 기독교로 개종하는 ‘대중운동’(People Movement) 또는 집단회심(Group Repentance)이 이루어 졌다.

 

특히 알란 티펫 교수는 「남 폴리네시아와 솔로몬 제도에서의 기독교 대중운동」에서 남태평양의 선교는 선교사들이 가족 밑 종족 단위의 절대적 중요성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교회가 성장할 수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히램과 하와이 선교회

하와이는 서기 900년경부터 사람들이 이주하게 시작했다고 한다. 이 섬 역시 다른 섬들과 마찬가지로 유아 살해와 식인 습관이 흔했고, 정령 숭배의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하와이는 1778년에 제임스 쿡 선장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는데 쿡 선장은 하와이에서 1779년 원주민들에 의해서 살해 되었다.

 

하와이 선교는 히램 빙햄(Hiram Bingham)이 놀랄만한 업적은 남겼다. 빙햄은 당시 하와이의 음란한 상황을 지혜롭게 대처해서 도덕적인 타락을 올바로 잡을 수 있는 길을 열었고, 교회와 학교들이 설립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받게 되었다.

 

하와이 선교사들은 음란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를 했지만 물질의 유혹에 대해서는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선교사들은 외국 상인들이나 무역업자들과 경쟁하듯이 상품을 판매하기도 하고, 원주민을 고용하여 담배를 생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선교사들의 부족함에도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부흥을 주셔서 20배 이상의 성장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1840년, 하와이 선교 20년이 지나면서 카톨릭 신부들이 들어오게 되면서 청교도적인 신앙이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즉 카톨릭 선교 방법이 더 잘 먹혀 들어갔기 때문이다. 카톨릭 사제들은 헌금을 요구하는 대신 선물을 주었고, 설교도 없이 짧게 미사를 마쳤고, 음주나 흡연에 대해서 반대하지 않았고, 어떤 죄인들에 대해서도 면죄를 약속했으며 누구나 다 교회의 일원으로 받아 들였다. 그리고 그들은 서양식의 훌륭한 저택에 살지 않고 하와이인들과 똑같이 생활하였다.

 

존 윌리암스 (John Williams)

존 윌리암스(John Williams)는 런던선교회가 더프호를 남태평양으로 출항시킨 1796년 영국에서 태어났다. 그는 영국의 노동자 계급이 사는 지역인 토텐햄(Tottenham)에서 자라났으며 14세가 되었을 때 장사를 다 배우기까지 7년 동안 주인집에 들어가 살기로 하고 철물상의 점원이 되었다. 어린 시절 신앙을 떠나 불량소년으로 변했던 그는 주인 집 아내의 관심과 인도로 올드 휫트필드교회에 가게 되었고 극적인 변화를 받게 되었다. 그 후로 그는 전도하며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였다. 담임목사 매튜 윌크스(Matthew Wilkes)가 그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선교사가 되려는 젊은이들을 위한 특별한 강의에 초대하였고, 곧 그는 윌크스 목사의 해외 선교를 위한 열정에 감동받아 런던선교회에 지원하였다. 윌리암스가 어린 나이였고 훈련을 받은 적도 없었지만, 남태평양 선교의 강화를 위해 선교사가 절실히 필요했기에 입회가 허락되었다. 윌리암스는 출발 몇 주 전에 담임목사와 성경공부를 하고 메리 쇼너와 결혼하였다.

 

윌리암스 부부는 남태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타히티 근처의 모레아라는 작은 섬에 1년을 머물고, 또 다른 섬에 3개월 머물다가 그의 13년의 선교 기간 동안의 선교기지였던 라이아테아 섬으로 옮겨 정착하였다. 윌리암스는 인신제사와 유아살해, 성생활이 난잡한 문화의 라이아테아 섬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지에 대한 난관에 부딪혔다. 윌리암스가 사역할 당시의 티히티 지역의 상황은 인신 제사 외에 유아살해가 널리 퍼져있었으며, 어떠한 도덕적인 행위도 그들에게는 없었다. 윌리암스는 “남자고 여자고 어린애 할 것 없이 모두 벗고 다녔으며 한 장소에서 아무런 부끄럼도 없이, 차라리 음탕할 정도로 함께 목욕도 했다. 혐오스러울 정도로 난잡한 성생활이 일상화되어 있었다. 만약 남편이 병이 들어 성관계를 갖지 못하게 되면 그의 형제 중 아무와도 거리낌 없이 관계를 가졌으며 아내가 병들면 남편 역시 똑같은 짓을 자행했다. .... 우리가 그들에게 노동의 필요성을 역설하면 그들은 우리를 비웃곤 했다.”

 

그는 타문화권 선교에 관한 훈련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사역은 사람들의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문명, 곧 서구문명을 전하기 시작했다. 다행스러운 것은 윌리암스가 문명화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전도에 대한 열정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윌리암스는 자신보다 원주민들의 접근이 효과적일 거라는 생각에 대부분의 선교사역은 원주민 기독교인들에게 맡겼다. 그들은 대개 훈련이 부족하였고 기독교인으로서 성숙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장애물에 부딪혔지만, 용감하게 집과 안전한 부족 마을을 떠나 낯선 환경으로 들어갔으며 생소한 언어를 기꺼이 공부하면서 다른 섬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 이런 원주민 사역자들이 있었기에 윌리암스는 성공적인 사역을 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성공 요소는 배였다. 그는 남태평양에서의 선교사역 초기부터 섬에는 인구가 적은데다 마음대로 섬들 사이를 왕래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사역에 제한을 느꼈다. 가끔 상선들이 방문하기는 해씨만 너무 불규칙이기 때문에 정기적인 섬전도 사역을 계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의 해결은 선교사역을 위한 자신의 배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배를 만드는 일이 예상보다 복잡하고 힘든 일이었지만, 그는 다른 선교사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마침내 배를 진수하였다. 본국의 선교본부에서의 달갑지 않은 반응이 있었으나 그는 배를 이용한 전도사역을 강행하였고, 도중에 배를 포기하고 다시 얻는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의 열정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배로 인해 원주민 사역자들과 섬들을 오가며 효과적인 선교활동을 했다.

 

윌리암스는 배를 가지고 폴리네시아 순회 전도 사역을 시작하여, 그의 선교 사역 18년이 거의 지났을 때는 “타히티에서 3,000km 이내의 섬은 어떤 섬이나 혹은 어떤 부족이나 복음을 받지 않은 데가 없다.”고 할 정도로 커다란 업적을 맺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 개척자 정신이 강했던 윌리암스는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뉴헤브리디즈(New Hebrides)의 서쪽까지 복음사역을 확장하려고 마음먹었고,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몇 명의 원주민선교사들과 함께 캠던 호를 타고 뉴헤브리디즈에 있는 에로망고(Erromango) 섬으로 항해하였다. 2주 후 도착한 그들은 에로망고 원주민들의 습격을 받아 죽음을 맞이했다. 존 윌리암스의 이 비극적인 소식은 국제적으로 알려지고 모든 교회들은 애도를 표했으며 수십 명의 청년들이 그의 뒤를 잇겠다고 헌신하는 일들이 일어났다.

 

뉴헤브리디스 개척 존 패튼(John G. Paton)

1795년 타히티 등에 선교사를 파송할 목적으로 런던선교회(LMS)가 조직된 이래 감리교 회중교회 장로교 등도 선교단체를 만들었다. 수많은 선교사가 남태평양으로 향했다. 존 패튼 (1824∼ 1906년) 목사도 그중 한 사람이다.

 

남태평양 뉴헤브리디스 개척선교사인 패튼 목사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20세에 글래스고시 선교회 전임 사역자로서 빈민가에서 공장노동자들을 위해 사역했다. 불량배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10년간 사역하며 많은 열매를 맺었다. 도시빈민 사역은 패튼이 훗날 뉴헤브리디스 사역에 큰 도움이 됐다.

 

그는 스코틀랜드 개혁장로교회로부터 남태평양 지역에 선교사가 절실히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고민에 빠졌다. 빈민사역을 계속해야 할지 아니면 선교지로 떠나야 할지 어려운 선택이었다. 동료들이 그를 말렸다. 존 윌리엄스 선교사 등은 “식인종에게 잡혀 먹힐 지도 모른다”며 경고 했다.

 

1858년 봄 목사안수를 받은 패튼은 메리 엔 롭슨과 결혼하고 4월16일 남태평양에 도착했다. 타나 섬을 첫 선교지로 배정받은 패튼 부부는 심각한 문화충격을 겪었다. 원주민들이 온몸에 이상한 색칠을 하고 벌거벗고 지내는 것이었다. 원주민간 내분도 심각해 살인이 생활의 일부였다. 게다가 풍토병도 이들 부부를 어렵게 했다. 롭슨 사모는 해산한 뒤 합병증으로 1859년 3월3일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3주 후 어린아이도 엄마의 뒤를 따랐다.

 

패튼 선교사는 절망했다. “주님을 위한 삶이 아니었다면 나는 미쳐 죽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외로운 아내 무덤 옆에 묻혔을 것이다.”

 

원기를 회복한 패튼 선교사는 안네이티움 섬의 원주민 사역자들과 함께 선교사역을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타나 섬을 휩쓴 홍역 때문에 안네이티움 섬 출신 사역자 중 13명이 죽었다. 그래서 한 부부를 제외하곤 모두 떠나갔다.

 

게다가 1861년 여름 타나 부족 사이에서 패튼 선교사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 그의 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해안 부족들이 내륙 부족들에게 패튼 선교사를 내보낼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이듬해 1월 중순 마침내 전면전이 일어났다. 그래서 그는 탈출해야만 했다.

 

영국 장로교회들을 순회하며 간증집회를 인도하던 패튼 선교사는 1864년 다시 뉴헤브리디스로 떠났다. 패튼의 두 번째 선교지는 애니와(Aniwa)라는 작은 섬이었다. 역시 안네이티움 의 원주민 사역자들과 동행했다. 그 후 수십 년 동안 패튼은 애니와에서의 사역에 주력해서 많은 원주민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는 원주민 기독교인들의 도움을 받아 2개의 고아원과 부흥이 계속되는 교회 및 여러 학교들을 세웠는데 한 학교는 여학교로 마가렛이 가르쳤다. 그리고 개종한 추장의 후원으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패튼은 청교도적인 엄격한 법률을 만들어 섬 주민 모두가 이를 따르게 했다. 원주민들에 대한 패튼의 태도가 엄격하기는 했지만 그는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데 헌신적이었고 진정으로 사랑을 베풀었다. 애니와의 교회는 잘 조직되어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패튼은 그의 말년에 선교 지도자로서 오스트레일리아, 영국, 미국을 방문하여 자금을 조달하고 뉴헤브리디즈에서 필요한 선교사를 헌신시키는 일을 주로 했다. 패튼은 말년에 이르러서도 부지런히 일했는데 애니와 말로 성경을 번역하고 선교사들을 위한 설교를 담당하였다. 패튼 부부는 1904년 선교지를 잠깐 방문하기 위해 되돌아갔다. 그 다음해 아내 마가렛이 눈을 감았으며 그도 2년 뒤 뉴헤브리디즈에서의 사역을 아들인 프랭크(Frank)에게 남기고 83세의 나이로 아내 뒤를 따랐다.

 

제임스 찰머스(James Chalmers)

제임스 찰머스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출신으로, 석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십대 때 어느 주일 오후 교회학교 시간에 목사님이 읽어 준 한 피지 선교사의 감동적인 편지를 듣고 태평양 지역에서 복음 전파를 위한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물을 글썽이면서 목사님은 청소년들에게 결단을 호소했다. 그리고 찰머스는 자신이 선교사로 가겠노라고 자원하였다.

 

찰머스는 선교사로 자원한 지 10년 후인 1866년 아내 제인을 데리고 런던 선교회의 선교사가 되어 남태평양으로 떠났다. 그는 한 때 존 윌리엄스가 사역한 적이 있었던 라로통아(Rarotonga) 에서 10년 동안 사역하였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전부터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던 지역에서 이방인들과 직접 만나 개척 사역을 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자신이 아니라도 라로통가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아직 탐사도 되지 않았던 뉴기니에서 사역하기를 간절히 바랬다. 뉴기니아에는 이미 라로통가 워주민 선교사들이 1872년에 들어가 사역하고 있었다.

 

1877년 드디어 찰머스는 간절히 바래왔던 뉴기니아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은 서양 문명이 전혀 침범하지 않은, 수 세기 동안 식인 풍습이 존재해 온 석기시대에 머물러있는 지역이었다. 그런 장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찰머스는 효과적으로 선교 사역을 하였다. 그는 다른 원주민 선교사들과 교제를 나누었다. 그래서 원주민들로부터 ‘타이메트’라고 불렸는데, 그 말은 ‘관례적인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모든 종류의 사람과 어울리고 그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뜻이었다. 그는 원주민들에게 선물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가져온 선물도 자유롭게 받았다. 그리고 그들이 잔치에 참석하여 함께 즐겼는데 다만 사람 고기만은 거절했다. 같은 또래의 선교사들이 모두 검은 양복에 모자를 쓴 정장 차림을 하였지만, 그는 평상복을 즐겨 입어 원주민들을 편하게 해주었다. 원주민들과의 언어 소통에는 다소 지장이 있었지만 그런 약점을 실천하는 사랑으로 보완하였다.

 

그렇다고 찰머스에세 순탄한 길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그 아내 제인의 건강 문제였다. 뉴기니아에 온 지 2년이 지난 1879년, 제인은 치료를 받으러 오스트렐리아로 갔으나 그 해를 넘기니 못하고 숨졌다. 아내를 잃은 슬픔은 오히려 원주민들에 대한 더 깊은 헌신의 동기가 되었다. 같이 일하는 원주민 선교사들 역시 자신과 비슷한 희생을 치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리스도를 위한 사역에 자신의 슬픔을 묻겠다.’고 서약을 했다.

 

찰머스가 이 섬에 온지 5년이 지났을 때, 그는 자신이 일하던 지역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일도, 축제나 살인도, 사람 해골을 가지고자 하는 욕망도 모두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그 결과 이방 신의 신전이 교회 예배당으로 사용되었으며, 제사 의식은 밤에 숨어서나 행해졌다. 원주민들은 진실함을 가지고 사역하는 찰머스를 사랑했으며 그에 대한 소문을 널리 퍼뜨렸다.

 

찰머스는 항상 복음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전파하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1901년 봄 그는 젊은 동역자 톰킨즈(Tomkins)와 함께 사나운 식인종들의 지역으로 알려진 뉴기니아의 플라이 강(Fly River) 유역을 탐사하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들이 돌아오지 않자 구조대가 보내졌었는데, 구조대가 가서 얻은 것은 찰머스와 톰킨즈가 창에 찔려 숨지고 갈기갈기 찢겨 식인종들에게 잡아 먹혔다는 소식뿐이었다. 그 끔찍한 소식은 기독교계를 경악시켰으나 찰머스 자신은 이렇게 될 것을 항상 준비하고 있었다.

 

존 콜러릿지 패터슨(John Coleridge Patteson)

1827년 영국의 한 명문 집안에서 태어난 패터슨은 수준 높은 교육을 시키고 싶어하는 그의 부친에 의해 이튼과 옥스퍼드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가 옥스퍼드 대학교에 재학 중일 때, 부친의 친구이자 뉴질랜드의 첫 번째 성공회 주교인 조지 셀윈(George Selwyn)으로부터 기독교 사역자가 되라는 권유를 받고 졸업 후 헌신하였다. 패터슨은 성공회 사제로서 서품을 받고 1855년 태평양으로 떠나기 전까지 12개월을 지방 교구에서 일했다. 그가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 것 역시 셀윈 주교의 권유에 의해서였다. 셀윈 주교는 남태평양에서 10년 이상 사역해 왔는데 그의 넓은 교구를 관장하기 위해 패터슨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패터슨은 1856년 셀윈과 함께 뉴질랜드에 도착했다. 도착한 직후 그에게 처음으로 멜라네시아 시찰 기회가 주어졌다. 그것은 패터슨에게 시찰 이상의 것을 가져다주었는데, 그 여행을 계기로 그는 멜라네시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선교선인 서던 크로스(Southern Cross)호를 타고서 이 섬 저 섬을 다니며 자원하는 소년들을 모아 배에 태우고 선교사로 훈련시키기 위해 뉴질랜드로 데려왔다. 그것은 다소 비 교리적이었으나 패터슨과 셀윈은 이 소년들을 훈련시켜 사역자와 교사로 만들어 자신들의 고향으로 파송해 복음사역을 하는 것만이 남태평양 지역을 복음화 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멜라네시아 소년들이 사역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만큼 충분하게 교육을 받으면 패터슨은 그들을 고향에 돌려보내 독자적으로 복음사역을 하도록 권장했다. 동시에 그는 여러 섬의 주민들이나 추장들과 우호관계를 맺어 그들의 신뢰를 받았다. 그는 훈련시킨 젊은이들을 파송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복음사역에 뛰어들어 일하기도 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뒤, 재파송 되었다.

 

그러나 멜라네시아에서 계속 사역하던 중에 패터슨은 자신이나 자신에 사역에 대한 원주민들의 태도가 변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이유는 패터슨의 잘못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섬들에 대한 외부 세계의 상업적 이해가 팽창된 데 있었다. 19세기에 이르자 사탕수수와 목화 재배 농장이 고소득 사업으로 부상했고, 그에 따른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럽인들이 원주민들을 납치해 노예로 파는 사업이 생겨났다. 이런 유럽인들의 죄악상은 패터슨의 사역에 큰 방해 요소가 되었다. 노예상들에 대한 저주와 그들을 자신과 구별하려는 패터슨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년과 청년들을 배에다 태워가는 그의 선교방법 때문에 그에 대한 오해를 쉽게 풀 수가 없었다. 그가 함께 데리고 있던 소년들에게 학교교육을 납득시키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그러나 이런 낙심된 상황에서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그의 사역을 추진해나갔다.

 

1871년 9월 여행 중이던 패터슨은 아침 성경공부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뭍으로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실종되었고, 그를 찾으러 간 사람들은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후퇴하게 되었다. 나중에 패터슨이 살해당했음이 밝혀졌다. 살해당한 사람이 친절하고 점잖은 선교사였음을 안 원주민들은 놀라 시체를 깨끗이 씻어 배로 가져왔던 것이다. 패터슨의 시체는 수장되었다. 패터슨의 죽음의 소식은 노예상들의 비열한 행위에 세상에 주의를 끌게 되어 마침내 노예 밀매는 근절되었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남태평양의 선교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플로렌스 영(Florence Young)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의 토박이인 플로렌스는 남태평양의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영적 복지를 위해 일하겠다고 표명한 최초의 사람이다. 그녀의 오빠는 퀸즈랜드에서 커다란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했는데, 그 농장을 방문하고 그녀는 인생의 항로를 완전히 바꾸었다. 그녀는 비참한 노동자들 사이에서 복음전파에 기꺼이 헌신한 것이다.

 

플로렌스는 어렸을 때부터 플리머스 형제단(Plymouth Brethren)에 속해 성경을 배워왔기에, 1882년부터 시작한 교육 선교를 잘해 낼 수 있었다. 처음엔 10명으로 초라하게 출발했지만 점차 사람들이 몰려와 곧 80명이 되었고, 그 중 절반은 주일 외에도 매일 저녁 배우러 왔다. 내리쬐는 뙤약볕 속에서 하루 12시간 혹은 그 이상을 사탕수수를 베는 작업은 노동자들에게 살인적인 일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귀중한 휴식시간을 아까워하지 않고 복음을 들으러 몰려왔다.

 

사역이 성공하자 플로렌스는 사역을 확대하기로 하였다. 그 가운데 같은 플리머스 형제단 교인이었던 죠지 뮬러가 보내온 지원금은 퀸즈랜드 카나카 선교(카나카:수입해 온 노동자를 일컫는 말)를 준비하고 있던 그녀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곧 그녀는 가르치는 사역을 맡을 남자 선교사들을 모집하였고, 선교 구역 내에 있는 농장주들에게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 결과 19명의 선교사들에게 수 천 명의 노동자들이 배우려고 모여들었다. 그들 중에는 후에 자기 부족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도 있었다.

 

1890년 플로렌스는 중국 선교의 소명을 느끼고 중국내지 선교회에서 봉사하기 위해 떠났다가, 1900년에 다시 남태평양으로 돌아와 이미 많이 변해버린 선교사역을 지도하였다. 노예매매와 강제노동이 법으로 금지되면서 1906년경에는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플로렌스와 그녀의 동역자들은 귀향하는 노동자들을 따라가 솔로몬 제도의 각 섬에서 최근에 귀향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웠다.

 

1907년 선교회는 명칭을 남태평양 복음 선교회(South Sea Evangelical Mission)로 바꿨고, 플로렌스의 두 조카가 이 선교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10명의 다른 친척들이 솔로몬 제도를 위한 선교사역에 동참하였으며, 생동감 있는 복음주의 교회가 뿌리를 내리게 되어 지금도 솔로몬 제도는 계속 부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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