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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유랑민족인 집시족을 찾아서 - 체코 프라하여행

작성자이규영|작성시간17.10.23|조회수4,604 목록 댓글 0

체코 Sokol Troja Hostel & Camping 숙소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가 음식을 만들면서 그릇이 부딪쳤던 소리이었다.

회원 음식을 만들 있는 사람은 선배 사람 뿐이다.

고마워서 무엇인 가를 도와드려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항상 겸손하게 거절했다.

그래서 몸들 바를 몰라하고 있었다.

음식 이라고 해봐야 양파와 당근 고추장이 전부라 있었다.

여기에 누룽지와 김이 있으면 성찬 이라고 있었다.

방은 와이파이가 연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리셉션이 있는 굿으로 내려갔다.

리셉션에 라우터가 설치 되어 있었기때문이다.

리셉션 근처에 도착하자 마자 와이파이가 연결되었다.

서울과 통화 가능 했다.



프라하에서 촬영한 사진을 아이클라우드에 업그레이드 시키고 서울의 집에도 통화를 시도했다.

이곳의 기온은 우리나라 여름과 비슷했다.

그러나 아침 부터 찌는듯해서 오늘도 어제와 마친가지로 무더운 하루가 지속될 같다.

오늘은 5 31일로 자유 여행을 출발한지 이레가 되는 날이다.

아침 식사를 마친 전차와 지하철을 이용해 페트린(Petřin)으로 이동하고 있다.

페트린으로 이동 하기위해서는 블타바강을 건너야 한다.

페트린이 프라하 서쪽에 위치하고있기때문이다.

이동수단이 버스 였다면 시내를 관망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하철로 이동했기때문에 시내를 관람할 없어 조금은 아쉬웠다.



페트린은 체코 프라하 중심에 있는 언덕이다. 

블타바 왼쪽 제방 위로 130m 정도 올라와 있으며, 높이는 320m이다. 

공원으로 거의 덮여 있으며 프라하 시민들이 애용하는 레크리에이션 지역이다.

이곳에 문화유적지가 다양하게 분포되어있다.

지하철에 탑승하여 이동하고 있다.

그러나 30분도 안돼 헬리호바(Hellichova) 역에 도착했다.

대합실로 이동했다.

funicular(케이블카) 역을 찾기위해서다.

주변사람들에게 영어로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영어로 소통이 가능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보디 랭귀지를 동원했다.

다행히 여대생을 만날 있었다.

아주 날씬하고 예뿐 여대생이었다.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 하는지를 물었더니 “Yes” 라고 대답했다.

funicular(케이블카) 역의 위치를 물었다.

여대생은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자신이 앞장서서 funicular(케이블카) 입구까지 동행해주었다.

세상에 좋은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낄 있었다.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카를교


funicular(케이블카) 승차하여 정상으로 이동하고 있다.

오른쪽으로 아기 예수 성당이 보였다.

그리고 정면에 블타바 강의 강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funicular(케이블카) 페트린 정상에 도착했다.

페트린 정상까지 이동하는데 20분도 소요되지 않았다.

funicular에서 내려 산책길을 걷기시작했다.

하늘은 파랗고 미세먼지 없었다.

발걸음도 가벼웠다.

그런데 공원이 너무 깨끗했다.

휴지조각 하나 발견할 없었기때문이다.


성 미트대성당


조깅 하는 사람들을 흔히 발견할 있었다.

그리고 외국인 관광객들도 간간히 있었다.

이곳은 공기를 정화하는 허파라고 있었다.

서울에서 미세 먼지로 들었던 호흡기가 이곳에서 말끔히 세척된 기분이 들었기때문이다.

또한 숲이 울창하여 문명 권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페트린스케 공원으로 걸어갔다.

공원은 각가지 화초가 만발해 있고 정원수는 단정하게 전정되어있었다.

중의 백미는 장미라 있었다.

장미 송이가 도도한 자태로 태양을 바라보며 세상밖을 구경하고 있었다.

잠깐 동안 벤치에 앉아 장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따뜻해지고 평화가 왔다.


성 미트대성당


장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꽃이다.

묵주를 소지하고 있었다면 묵주기도를 했을 것이다.

성모 마리아는 아들 그리스도의 가시관에 장미꽃 송이를 꽂아주고 싶었다.

그래서 ' 도미니쿠스에게 장미꽃을 구해오라고 했다.

장미꽃 송이를 그리스도 가시관에 꽂고서야 답답했던 가슴이 가라앉았다.

장미꽃 송이가 성모 마리아의 가슴에 평화를 가져다 것이다.

자식을 먼져 세상으로 보내야 하는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이것은 죽는 순간까지도 고통을 극복할 없다는 의미다.

성모 마리아의 마음을 이해할 있을 같다.

이것이 장미와 가톨릭교가 얼킨 사연이다.



장미는 홀로는 서지 못한다.

그래서 담에 기대어 자란다.

장미라고 명명한 이유다.

활짝 장미 한송이가 자신의 진면목을 자랑하고 있었다.

유독 짙은 빨강 이어서 사람의 입술을 연상하게 했다.

이것이 장미가 살아나가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살아가는 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누구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행복을 축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는 것도 자신의 행복을 쌓는 것이다.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을 같다.

장미는 떼약볕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감격에 눈물 흘리고


그래서 장미꽃이 더욱 매혹적 이었다.

장미를 바라보고 앉아있으니 시간이 훌쩍지나갔다.

자연 관찰이나 역사 유적지를 견학하는데는 이곳만한 곳이 없을 같다.

어린이들이 열을서서 장미 정원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친구들과 재잘 거리며 걷고 있었다.

어린이들이 가고 있는 곳은 수령이 수백년도 넘은 느티나무 고목이 있는 곳이다.

사통 팔달하게 뚫린 도로처럼 장대한 나무가지가 쭉쭉빵빵 독야청청 하고 있었다.

어린이들은 누가 먼저라 없이 고목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나무가지에 먼져 올라가기위해서다.


프라하 성에서 바라본 카를교


어린이들이 느티나무가지 위에 앉아있었다.

천사가 내려와 앉아있는 것처럼 보였다.

위험에 대비해 노란 발광 조끼를 입고있었다.

그래서 멀리서도 어린이들의 모습을 바라볼 있었다.

상큼 하면서도 예쁘게 보였다.

다시 산책길을 따라 천문대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천문대는 작았지만 아름다웠다.

놀라운 경험을 체험해 있도록 직원들은 여러가지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직원이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해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카를교에서 순교한 성 얀 네포무츠키


다시 페트린 전망탑으로 이동했다.

전망탑은 63.5m 높이의 탑이다. 

프랑스 에펠탑 모방하여 제작했다.

그러나 에펠탑 보다 훨씬 작았다. 

페트린 전망탑은 1891 완공되었다.

현재는 관측 뿐만 아니라 송전탑을 겸하고 있었다.


성인을 배경으로 인증샷


전망탑에 도착했다.

전망탑은 걷거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정상에 오를 있었다.

정상까지 올라가서 프라하시를 관망할 있다는 기대감때문에 가슴이 부풀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그냥 걸어서 정상까지 올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누구나 올라갈 없었다.

입장료를 지불한 사람만 가능했다.

1인당 15 유로나 징수했다.

혼자라면 15유로를 지불하고 올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모두는 미적거리고 있었다.


카를교를 걸으며



시민회관


이곳까지 와서 페트린 전망탑 조망을 포기한다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다수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산하기시작했다.

하산 하면서 굶주린자의 (Hunger Wall) 관람했다.

굶주린자의 벽은 14세기 경에 완공되었다.

시기는 중세시대다.

중세시대는 문맹의 시대다.

그래서 청결에 대한 위생관념이 없었다.

페스트가 유럽을 휩쓸었던 이유다.




기근도 심했다.

페스트는 이곳 체코 뿐만 아니라 유럽으로 확산되어갔다.

왕실은 페스트에 전염된 자들을 굶주린자의 (Hunger Wall)으로 격리시켰다.

더이상 확산을 방자하기위해서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사망자가 증가했기때문이다.

왕실은 이상 방관할 없었다.

국민이 동요하지 않도록 극단적인 처방을 강구해야 했다.

이것이 1929 미국의 뉴딜정책과 비슷한 현대판 기근대책이었다.


천사같은 어린이


세계 대공황은192910 24 미국 뉴욕 가에서 주식이 폭락한 데서 비롯되었다.

1933 말까지 거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이 여기에 말려들었다.

여파는 1939년까지 지속되었다.

이것을 1929년의 대공황 또는 1929년의 슬럼프 라고도 한다. 

원인은 미국의 번영에서 찾아볼 있다.

미국은 1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국가의 경제는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이상현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과잉생산으로 수요와 공급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공급은 넘치는데 구매자가 없었다.

덩달아 생산이 위축되었다.

기업이 하나 둘씩 도산하기시작했다.

실업자도 기하급수 적으로 증가했다.

미국 정부는 실업자를 구제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해야했다.

미국 국민은 유럽의 정부들 처럼 미국 정부도 실업자들을 위해 무엇인가 해주기를 기대했다.

그래서 취한 조치가 뉴딜정책이다.


굶주린자의 벽


뉴딜 정책은 정부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경제와 사회문제에 적극 개입 하려는 시도다. 

그것은 정부의 힘을 사용하여 평등의 이상을 부분적으로 실현하려는 것이다.

뉴딜 정책의 정부개입은 농민을 돕는 방식으로도 나타났다. 

정부는 농업조정법을 제정하여 농산물 가격의 하락을 막아 주려고 했다. 

그러기위해서는 농산물의 과잉생산을 막아야했다.

경작지를 축소시키고 대신 농민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

그리고 나이든 은퇴자를 위한 연금 기금을 조성하는 정부가 일정 금액을 보조했다.

이것은 미국에서도 유럽식의 사회보장제도가 도입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셰흐라드성에서 바라본 프라하성

 

다시 공산주의 치하의 폭정을 잊지 않기위해 조성한 테마공원으로 이동했다.

공산주의 희생자 추모비다.

추모 비는 공산주의 체제하에서 인간성이 말살되어가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산에서 사람씩 내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갈비뼈가 튀어나오고 깡마른 형상을 하고 있었다.

공산주의체제의 참혹 함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그들은 해방을 찬미하며 행복한 표정을 짓고 하산하고 있었다.

씁쓸한 감정을 간직한   다음 목적지인 비셰흐라드(Vysehrad)성으로 이동했다.


길을 물어보는 영어교사님


비셰흐라드(Vysehrad) 정문은 최근에 건축된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왕가의 문장도 보이지 않았다.

내부는 현대적 감각이 물씬 풍겼다.

과거에 이곳이 체코의 수도 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유적과 유물이 빈약 했기때문이다.

전성기시대의 흔적도 거의 찾아볼 수없었다.

그러나 성곽 만큼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서쪽은 절벽이고 북쪽은 도나우 강이 흐르고 있었다.   

성곽에서 동북쪽을 바라보았다.

미트 대성당과 프라하 성이 선명하게 보였다.


공산주의 희생자 추모비


그것은 폭의 그림이었다.

성벽 아래를 바라보니 해자가 있었다.

그러나 해자가 토사로 거의 메워져가고 있었다. 

메워진 해자는 테니스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안타깝지만 이것이 현실이었다.

성곽 위로 올라갔다.

시내가 눈에 내려다보였다.

빨간 지붕 일색이었다.

빨간색은 온화하고 따뜻함을 의미한다.

집시족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는듯 했다.


댄싱하우스


비셰흐라드(Vysehrad) 성은 프라하 이전의 체코 수도다.

마르틴(Martin) 성당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틴(Martin) 성당도 2 세계대전 당시 파괴되고 말았다.

현재의 마르틴(Martin) 성당은 전후에 다시 복원된 것이다.

비셰흐라드(Vysehrad) 시대 유행한 고딕건축 양식으로 복원해서 모습을 자아내게 했다.

자연은 복원 능력이 뛰어나다.

무너지고 파괴된 건물더미는 자연으로 다시 회귀하고 말았다.

그래서 고즈넉하고 쓸쓸해보였다.


비셰후라드 성문


체코에서 마르틴(Martin) 성당은 미트 대성당과 쌍벽을 이루고 있다.

발걸음이 나를 마르틴(Martin)성당 안으러 이끌었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고 있는데 입구에 검색 대가 있었다.

이방인은 들여보낼 없다는 의미인 같았다.

그래서 발걸음을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기때문에 안으로 들어가보고 싶었다.

그러나 금품을 요구하면서 반가워하지 않았다.

예수는 본래 인종간 차별을 금했다.

그리고 계급이나 재산의 유무를 가리지 않았다.




독일 북부지방과 유럽일부에 루터의 사상이 파급된 이유다.

루터파 교회는 성서 주의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와 목자 사이에 직업 신부가 없다.

개인이 그리스도와 직접 대면하는 이유다.

성상 숭배도 중요하지 않았다.

로마 가톨릭교 하고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다시 본당에서 나와 성곽을 따라 걸어갔다.

최고의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도나우 강의 물이 시원스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유람선과 요트가 정박되어 있다.


성 마르틴 성당


비셰후라드 성


빈부의 격차를 엿볼 있는 광경이었다.

오른쪽 성곽 아래는 떠러지다.

벼랑 아래에 도로가 개통되어있었다.

까마득했다.

마치 뱀이 끔틀 거리는 것처럼보였다.

도로만 차단한다면 성을 보호할 있을 같다.

비셰흐라드(Vysehrad) 성은 난공불락의 천연의 요새라 있었다.

성당옆에 있는 공원묘지로 이동했다.

천사의 날개가 묘지를 수호하고 있다.




주교나 왕족, 정치가, 예술가 등의 시신이 안치되어있었다.

죽음은 삶의 일부다.

죽은자와 살아있는 자가 공존하고 있었기때문이다.

이러한 사상은 가톨릭과 밀접하다.

묘지를 바라보니 인간의 역사를 바라보는 듯했다.

묘지의 주인공은 생전에 저명한 인사들도 있었다.

그러나 죽은자는 말이 없었다.

창고에 가득채운 재화를 모두 사용하지 못하고 죽은자도 있었다.

욕망이나 집착은 한낱 물거품에 불과하다.

인생은 구름에 불과했다.

욕심은 허상이었다.




프라하 시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다시 방문해보고 싶다.

무엇이 나를 붙잡아두려고 하는 것인지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량한 체코의 역사적 유산일 같다.

바출라프(Vaclavske naměsti) 광장으로 이동했다.

바츨라프 광장은 프라하 신시가지 위치하고 있다.

체코 많은 사건들이 이곳에서 발생하고 현재도 시위와 행사 등이 진행되고 있었다.

광장 이름은 수호 성인인 바츨라프 1 공작에서 유래되었다.



바츨라프 광장은 중세시대 말을 사고 파는 장소다.

보헤미안의 시인 카렐 하블리체크 보로프스키 제안으로 바츨라프 광장으로 개명했다.

바츨라프 광장을 종단하여 하벨시장(Havel's Market)으로 이동했다.

하벨시장(Havel's Market) 하벨 교회가 있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시민이 북적이는 곳으로 활기찬 프라하의 모습을 체험할 있는 곳이다.

평일에는 주로 채소와 과일을 판매한다. 

그러나 토요일과 일요일은 인형과 글라스 각종 기념품을 파는 시장으로 탈바꿈한다.

시장은 별로 크지는 않았다.


바출라프광장


하벨시장



시골의 5일장과 비슷하고 상품도 다양하지 않았다.

관람을 하고 입구로 돌아오는데는 20분이면 충분했다.

저가의 기념품 정도는 무난할 보였으나 과일의 신선도는 떨어졌다.

그외 상품은 신빙성이 없어보여서 구경만하고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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