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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에 관한 기록들

▣11-1.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욕망의 홍수 속에 우뚝 선 지주(砥柱)-

작성자류시언|작성시간26.06.05|조회수78 목록 댓글 0

◈욕망의 홍수 속에 우뚝 선 지주(砥柱)

 

서애(西厓, 柳成龍) 선생의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에서 가장 깊이 마음에 남는 것은 ‘지주(砥柱)’라는 비유이다. 선생은, 황하의 거센 홍수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바위를 인간의 절개와 본심에 비유한다. 특히 단순히 길재의 충절만을 칭송한 것이 아니라, 혼탁한 시대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지켜야 하는가를 깊이 있게 말하고 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질 때 많은 사람들이 권세와 이익을 좇았지만, 길재 선생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서애 선생은 이러한 길재 선생의 절의를, 홍수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지주산에 비유하며 참된 선비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욕망은 홍수이고 본심은 지주”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준다. 현대 사회 역시 물질과 욕망의 흐름이 거세지만, 결국 사람을 바로 세우는 것은 자신의 본심과 의리라는 것이다.

 

이 글은 단순한 비문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정신을 일깨워 주는 깊은 가르침이며, 나 또한 어떤 상황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말하고 있다.

 

▣11-1.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원문1]豐山柳侯雲龍。宰仁同縣之三年。大修吉子墓。直墓之左得高阜。前俯洛流。後倚烏峯。郊原彌迤。烟沙浩渺。顧瞻樂之。載龜載謀。築書院其上。復爲屋以祀先生。監司李公山甫曁善山府使柳斯文德粹共韙是擧。爲之區畫經營。以助其不給。役用易就。不數月而告成。於是前建石碑。刻中原人楊晴川所書砥柱中流四大字。旣訖功。侯命其弟成龍曰。吾將以此表先生之節。而爲敎於後。爾其志諸陰。

◉豐山柳侯雲龍。宰仁同縣之三年。大修吉子墓。直墓之左得高阜。前俯洛流。後倚烏峯。郊原彌迤。烟沙浩渺。顧瞻樂之。

◌풍산후(豐山侯) 류운룡(柳雲龍)이 인동(仁同) 고을을 다스린 지 3년째 되던 해에 길자(吉子,길재吉再) 선생의 묘역(墓域)을 크게 보수(補修)하였다. 무덤 바로 왼편에 높은 언덕이 있었는데, 앞에는 낙동강 물줄기가 굽어보이고 뒤로는 오봉(烏峯, 金烏山)에 기대어 있었다. 교외의 들판이 넓고 길게 이어져 펼쳐져 있고 안개 낀 모래 벌은 넓고 아득하였다. 둘러보니 쳐다보니 경치가 매우 마음에 들었다.

[해설]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러운 대구(對句)
중간의 자연 배경을 묘사한 부분은 전형적인 산문 미학의 정수를 보여줍니다.
►前俯洛流(앞에는 낙동강을 굽어보고)↔後倚烏峯(뒤에는 금오산에 기대어)
►郊原彌迤(넓은 들판은 멀리 펼쳐지고)↔烟沙浩渺(안개 낀 모래 벌은 아득하다)
이처럼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웅장한 기상이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의 꺾이지 않는 절개와 닮아 있었기에, 겸암 선생이 그 자리를 보자마자 마음으로 깊이 기뻐하며(顧瞻樂之) 비석을 세우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載龜載謀。築書院其上。復爲屋以祀先生。監司李公山甫曁善山府使柳斯文德粹共韙是擧。爲之區畫經營。以助其不給。役用易就。不數月而告成。

○터의 길흉을 거북점(龜卜)으로 살피고 신중히 도모하여, 그 자리 위에 서원(書院)을 세우고, 다시 건물(屋, 祠堂)을 지어 선생을 제사 지내게 하였다. 경상감사 이산보(李山甫) 공과 선산부사 류덕수(柳德粹) 사문(斯文)도 함께 이 일을 옳게 여겨 구획(區劃)하고 경영(經營)하며 부족한 부분을 도와주어서 공역(工役)과 비용(費用)이 순조롭게 이루어졌고 몇 달 지나지 않아 공사가 마무리 되었다.

 

◉於是前建石碑。刻中原人楊晴川所書砥柱中流四大字。旣訖功。侯命其弟成龍曰。吾將以此表先生之節。而爲敎於後。爾其志諸陰。

○이에 앞에 비석을 세우고 중국인 양청천(楊晴川)이 쓴 ‘지주중류(砥柱中流)’라는 큰 글자 넉자를 새겼다. 공사가 끝나자 류후(柳侯) 운룡(雲龍)은 그 아우 성룡(成龍)에게 말하였다. “나는 장차 이것으로 선생의 절개를 드러내어 후세의 가르침으로 삼고자 하니, 너는 그 뜻을 비석의 뒷면에 기록하라.”

[해설]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 1539~1601)
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선생의 형이다.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응현(應見), 호는 겸암(謙菴)이다. 퇴계 이황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학문과 인품이 깊고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겸암은 벼슬보다 학문과 절의를 중시한 인물로 평가된다. 여러 관직을 지냈으나 지방 수령으로 있을 때 백성을 잘 다스렸고, 후진 교육과 향촌 교화에도 힘썼다.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에 나오는 인동현감 시절의 일도 그러한 활동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길재의 묘역을 크게 정비하고 서원과 사당을 세워 길재의 충절과 학문 정신을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다.
겸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실천하는 선비”라는 점이다. 단순히 성리학 이론만 말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절의와 교화를 지역 사회 속에 구현하려 하였다. 그래서 「지주중류비」에서도 단순 추모를 넘어 “후세 교육”을 강조한다. 본문의 “나는 장차 이것으로 선생의 절개를 드러내어 후세의 가르침으로 삼고자 한다.” 라는 말은 바로 겸암의 뜻을 보여준다.
또한 겸암은 동생 서애와 매우 가까운 학문적 동반자였다. 서애의 문장과 정치적 역량이 크게 드러난다면, 겸암은 보다 온건하고 유학자다운 기풍을 지닌 인물로 평가된다. 두 형제는 모두 퇴계학맥을 계승하였고, 임진왜란 전후 영남 유학의 중심 인물로 큰 역할을 하였다.

 

2026. 6. 5. 두서(杜西) 류시언(柳時彦)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현 경상북도 구미시 오태동 오태마을 길재의 무덤 앞 낙동강변에 있는 비석이다. 1587년(선조20) 류운룡(柳雲龍) 선생이 인동 현감(仁同縣監)으로 부임하여 비를 세웠다. 비의 앞면에는 중국의 명필 양청천(楊晴川)의 글씨를 새겼고, 뒷면에는 서애(류성룡) 선생이 지은 〈야은선생지주비음기(冶隱先生砥柱碑陰記)〉가 음각되어 있다. 현재의 비석은 1780년(정조4)에 다시 세운 것이다.

*재귀재모 (載龜載謀): 번역하신 대로 터를 잡을 때 '거북점(龜)을 치고 사람들과 의논(謀)했다'는 뜻으로, 서원 자리를 허투루 정하지 않고 고례(古禮)와 신중함을 다해 택지(擇地)했음을 보여주는 격조 높은 표현입니다.

*이산보(李山甫) 류덕수(柳德粹): 당시 영남 지역의 도정(道政)과 인근 고을을 맡고 있던 유력 관료들입니다. 겸암의 이 거사가 개인의 치적을 넘어, 영남 사림과 조정 관료들이 모두 공감하고 전폭적으로 지원한 '공적인 숭모 사업'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류덕수(柳德粹):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중정(仲精)으로 1546년(명종1) 식년시 생원에 입격하고, 1560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습니다. 선산 부사를 지내면서 1583년 야은사당(冶隱祠堂)을 중수하였습니다.

*이산보(李山甫, 1539~1594):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신. 본관은 한산(韓山). 대사간(大司諫)으로 재임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수습함.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여 호종공신(扈從功臣)에 책록되고, 명(明) 나라 군대의 조선 진군과 군량조달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양청천(楊晴川): 명나라의 문인이자 서예가로, 성은 양(楊), 이름은 첨(瞻), 자는 앙지(仰止), 호는 청천(晴川)이며 섬서성 함녕현 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종 14년(1519) 사신단을 따라 조선에 왔을 때 호방하고 기개 넘치는 글씨를 많이 남겼습니다.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의 ‘砥柱中流’ 네 글자 역시 그의 필적입니다. 겸암 류운룡은 선비의 꺾이지 않는 절의와 기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기에 양청천의 필체가 잘 어울린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이며, 이에 비석 전면에 크게 새겨 넣었습니다. 그가 쓴 힘 있고 기개 있는 글씨를 바위에 새겨 선비의 기상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지제음 (志諸陰): 여기서 '지(志)'는 기록하다, '음(陰)'은 비석의 뒷면(비음)을 뜻합니다. '제(諸)'는 어조사 '지어(之於)'가 축약된 것으로 "그것을 뒷면에 기록하라"는 준엄한 명령이자 부탁입니다.

[종(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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