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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영남비(平嶺南碑 : 영남을 평정한 일을 기념하는 비) -대구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공적비

작성자낙민|작성시간17.03.15|조회수726 목록 댓글 0

평영남비(平嶺南碑) -대구

 

이 비는 1779년(정조 3년) 대구광역시 남구에 건립된 평영남비(平嶺南碑)로 이의철(李宜哲)이 비문을 지었고, 조카인 이경원(李景源)이 글씨를 썼다.

1728년(영조 4년) 3월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이인좌는 스스로를 대원수로 자칭하고 상여에 무기를 싣고 청주성에 진입해 충청병사 이봉상, 군관 홍림, 영장 남연년 등을 살해하고 청주성을 점령하였다. 이때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이인좌의 동생 이응보와 함께 안음과 거창을 점령했고, 이어 정희량의 인척인 조성좌와 함께 합천과 함양을 점령해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북상하던 주력 이인좌군이 안성과 죽산에서 도순무사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에게 대패하고 청주성의 신천영은 창의사 박민응 등에 의해 청주성에서 밀려나 상당성에서 패하였다. 결국 반란을 주도했던 이인좌를 비롯해 권서봉, 목함경 등이 생포되면서 이인좌 난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에 분개한 영조는 대구 입구에 ‘영남을 평정한 비'란 뜻의 ‘평영남비'(平嶺南碑)를 세워 이 사건을 영남지역의 반란으로 규정지었다. 나아가 영남을 반역향으로 지목해 일체의 과거 응시를 중지시키는 강경 조치를 취했다. 왕위에 오른지 4년만에 역모를 경험한 영조는 반역향 경상도를 용서하지 않았고 향후 약 50년간 경상도는 조정에 출사가 제한되는 차별을 받았다. 이러한 내용들이 담겨있다.

 

 

평영남비(平嶺南碑 : 영남을 평정한 일을 기념하는 비)

 

무신년(영조 4, 1728년) 봄에 영남(嶺南)에서 난이 일어났다. 이때 관찰사 황공(黃公)은 주군(州郡)의 병사들을 독려하여 그들을 토벌하였다. 한 달이 지나서야 이 난은 평정되었지만 그 해 4월 신묘일(辛卯日)에 황공은 재직 중에 생을 마쳤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책록(冊錄)하여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과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을 추증(追贈)하였다. 시호는 충열(忠烈)이었다.

공은 이름이 선(璿)이고 자는 성재(聖在)이며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문정공(文貞公) 정욱(廷彧)의 7세손이다. 그는 어려서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예조참판(禮曹參判)과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영조 3년(1727년) 가을에 그는 경상감사(慶尙監司)를 제수 받아 진(鎭)으로 나갔다가그 이듬해 난이 일어났다. 당시 상(上: 영조)이 새로이 즉위하셔서 역적 일경(一鏡)등을 역적으로 주살(誅殺)하셨는데, 그와 같은 당(黨)에 속하였던 자들 중에서 조정의 권력자들이 많았으므로 그들이 국왕을 원망하여 난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역적의 괴수 이인좌(李獜佐)는 호서(湖西)에서 병사를 일으켜 밤에 청주(淸州)를 습격하여 절도사인 이봉상(李鳳祥)을 살해하고 상당성(上黨城)에 웅거하였으며, 그의 동생 이웅보(李熊輔)는 영우(嶺右)에서 일어나 그 도당인 정희량(鄭希亮) · 나숭건(羅崇建)과 함께 안음(安陰) · 거창(居昌) · 함양(咸陽) · 합천(陜川)을 연이어 함락시켰다. 죄수 조정좌(曹鼎佐)가 탈옥하여 군을 차지하고 삼가(三嘉)의 군대를 아울렀는데 이웅보(李熊輔)의 원조를 받았다.

공은 우선 상주(尙州) · 안동(安東)의 군사를 일으켜 충주(忠州)에 집결시켰고 여러 고을의 병사들을 더욱 조련시켰다. 그리고 그 군사들을 12채(寨)로 나누어 강령(江嶺)의 요충지에 주둔시켜서 이인좌의 세력을 막았다. 또 성주목(星州牧)의 이보혁(李普赫)에게 격문(檄文)을 보내어 우방장(右防將)으로 삼고 조정좌(曹鼎佐)를 토벌하게 하였다. 그리고 관문과 반란군이 경계에서 늘어서 진을 치며 서로 마주하고 있을 때, 웅보는 거창(居昌)에서 7만을 불러 모았다. 이에 대해 공은 5로로 병사를 진격케 하여 거창에 이르게 하였다. 보혁은 여러 병사들에게 맹서하였고 사졸들로 하여금 ‘왕의 군사’라고 적어 가슴 앞에 표시하게 하였다. 스님인 해림(海琳)과 철묵(哲黙)으로 하여금 적진으로 들어가 무엇이 화가 되고 무엇이 복이 되는지를 알려주도록 하니 적은 크게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공은 특별히 정예병 300명을 내보내서 우방의 장졸과 합하여 재빨리 합천으로 나아가게 하니 조정좌는 크게 놀라고 군은 괴멸되었으며 그의 장수 김계(金洎)가 그를 베어 항복하였다.

이에 웅보는 형세가 고립되는 한편 여러 군들이 모두 이곳에 결집되었으므로 그 무리들은 도망하여 흩어진 자들이 많았다. 공은 선산부사(善山副使) 박필건(朴弼健)을 지례현(知禮縣)으로 나아가게 하고 또 고령현감(高靈縣監) 유언철(俞彦哲)을 우두산(牛頭山) 서쪽 계곡에 몰래 매복시켰다. 그러자 웅보(熊輔)는 과연 밤에 거창(居昌)을 버리고 서곡(西谷)으로 나아가다가 매복군을 만나게 되었고 그는 되돌아 도망하던 중 총환을 맞고 성초역(省草驛)에 이르렀다. 관군들이 그를 추격하여 희량과 숭건을 모두 사로잡아서 드디어 영남을 평정하였다.

당시 이인좌의 군사들은 청주(淸州)로 나아가 경기의 고을을 압박하였다. 박필몽(朴弼夢)과 박필현(朴弼顯)은 호남(湖南)에서 일어났고 이사성(李思晟)은 관서(關西)에서 호병(胡兵)을 가장하여 급히 궁궐을 침범하였으나 마침내 모두 패배하였다. 그런데 공이 영남의 난을 평정하지 못했다면 국가는 훨씬 위태로워졌을 것이다.

공은 사람됨이 침착하고 두텁고 믿음직스러우며 말이 적었으며 영특하고 안으로 온축되어 있었다. 그는 늘 산천도기(山川圖記)를 관찰하기를 좋아하여 관방이 어디가 험하고 평이한지, 또 어느 곳이 비고 실한 형세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백성을 다스리고 병사를 쓰는 것은 모두 법도가 있었으며, 기의(機宜)에 꼭 들어맞았다. 처음 나아간 관직에서 포곡(逋穀)을 느슨하게 하며 빈궁한 사람들을 진휼하고 아전들이 빚진 돈 15만량을 면제해 주니 남쪽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적이 처음 일어나서 허점을 틈타 공을 습격하려고 도모하였을 때 공은 감영(監營)을 닫고 정돈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가령 자객이 장차 이르려 하였더라도 공은 마찬가지로 요동치 않을 것이었으므로 인심은 이를 믿고 안정될 수 있었다. 애초에 안음(安陰)이 함락된 뒤에 현감(縣監) 오수욱(吳遂郁)은 죄가 죽어 마땅하였지만 순무사(巡撫使) 오명항(吳命恒)도 그를 감싸주었고 군중(軍中)에서도 사면을 청하였다. 공은 그것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 죄안을 처리하기를 더욱 서둘렀다. 합천수(陜川守) 이정필(李廷弼)이 군을 버리고 도주하여 정좌가 출옥하였으므로 공은 정필(廷弼)을 잡아 대구(大丘)에 이르러 조정에 죄를 청하였다. 공이 죽은 뒤에 정언(正言) 권혁(權爀)은 공이 병이 없는데도 갑자기 죽었다고 말하고 그 진상을 조사하기를 청하였으므로 주상이 본도에서 그것을 조사할 것을 명하였으나 관찰사 박문수(朴文秀)는 그 옥사(獄事)를 느슨히 처리하여 일단락 지었다.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애통히 여겼다. 공이 죽은 지 13년 뒤에 영남의 백성들과 선비들이 영치(營治)의 성 남쪽 남귀산(南龜山) 아래에 사당을 세우고 그 이름을 민충사(愍忠祠)라고 하였다. 다음 해에 조정이 새로 새운 여러 사원(祠院)을 헐라는 명에 의하여 아울러 공사(公祠)를 폐지하였다.이윽고 모든 의논으로 다시 그곳에 단(壇)을 쌓고 돌에 새겨 공의 공적을 기록하여 이곳 사람들의 생각에 깃들게 하여 마침내 나에게 와서 글을 구하니 나는 공의 공적이 국가를 보존하였으나 몸은 불행히 죽어서 묘식(廟食)도 하지 못하므로 그 이치가 슬퍼할 만한 것이므로 드디어 서문를 써서 기록하노라.

명(銘)은 다음과 같다.

 

큰 개울이 험한데다가 고개가 가파르고 도둑이 사나운데

수미일관 한결같이 온 몸으로 안과 밖이 다르지 않고

흉칙한 것 두려워 않아 그 폐단을 보았다네.

나라를 위하여 간악한 이를 다스리니

이에 충열을 드러냈으며 문무를 드높이었도다.

그 기지와 신명함은 밝히 거울삼을 만 한데

남은 초상 하나 없구나.

강관(江關)은 깍아 지른 듯 험난하고

군사들은 연이어 목책이 되었도다.

거창이 반란군의 소굴이 되니 그 무리가 7만이 되었으나

합천을 무찌른 뒤에 세력이 꺽이었도다.

우두산(牛頭山)에서 밤에 전복되었으니

그로 인해 적이 드디어 거꾸러졌도다.

대개 이러한 간악한 무리들은 하루에 쌓인 것이 아니었으므로

사민들의 잘못인데 영남이 더욱 심하였구나.

지금 이 난만 하더라도 역과 순이 마침내 가려 졌도다.

공의 은혜 사람들에 있으니 영남에서 더욱 심하였도다.

공적에 대한 포상이 끝나자/ 공이 갑자기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으니

일이 의심스러울 만 하지만 그 원수를 잡지 못하였도다

이 지방 사람들은 가슴 아파

애모함이 세월이 오래되어도 끝날 줄을 몰랐어라

무엇으로 갚을까? 민충(愍忠)이라는 사당을 지었구나

농사에 바쁜데도 이를 지어 여기에 모셨도다

지금은 못하게 되어 묘를 철거하고 단을 쌓았네

그 단은 삼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그 위에 우뚝한 비가 있구나!

이수(螭首)와 귀부(龜趺)를 만들고 글도 짓고 시도 지었으니

금수(琴水)의 유구함이여, 남쪽 백성들의 그리움이여

공은 떠나고 돌아오지 못하겠지만 그 남아있는 것은 유구하구나

이는 우리의 사적인 것만은 아니니/ 방가(邦家)의 영광이로다.

 

 

가의대부(嘉義大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겸(兼)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이의철(李宜哲)이 찬술하였고,

종자(從子) 숭정대부(崇政大夫) 행 이조판서(行吏曹判書) 겸(兼) 지경연사(知經筵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춘추관성균관사(知春秋館成均館事) 세손우빈객(世孫右賓客) 경원(景源)이 글씨를 썼고 아울러 전액도 썼다.

 

숭정기원후 세 번째 경자년(정조 4, 1780년) 11월 일

 

 

大邱 平嶺南碑

平嶺南碑(篆 題)

戊申春嶺南亂觀察使黃公督州郡兵討之踰月乃定其四月辛卯公卒于位 朝廷錄其功累 贈議」

政府左賛成兩館大提學諡曰忠烈公諱璿字聖在長水縣人文貞公廷彧之七世孫少以進士登第累」

官禮曹參判大司諫 英宗三年秋授節出鎭于南明年盜起時 上新卽位賊臣一鏡等以逆誅死其」

黨與多在朝用事怨國謀亂於是逆魁李獜佐自湖西起兵夜襲淸州殺節度使李鳳祥據上黨城其弟熊輔起嶺右與其黨鄭希亮羅崇建連陷安陰居昌咸陽及陜川囚曹鼎佐脫獄據郡幷三嘉軍爲熊輔」

援公先發尙州安東兵會忠州益調諸州兵分十二寨屯江嶺要害以遏獜佐之勢又檄星州牧李普赫」

爲右防將以討鼎佐而界上列戍相望熊輔時在居昌衆號七萬公遂五路進兵薄居昌普赫誓衆令士」

卒皆書王師以表胷前得浮屠海琳哲默入賊陣諭以禍福賊大懼公又別出精兵三百合右防將卒疾」

趍陜川鼎佐大驚軍潰其將金洎斬之以降於是熊輔勢孤而諸軍並集其衆多亡散公旣令善山府使」

朴弼健趍知禮縣又密遣高靈縣監俞彦哲伏牛頭山西谷中熊輔果夜棄居昌趍西谷遇伏還走中銃」

丸不殊至省草驛官軍追擊之▨希亮崇建俱就擒嶺南遂平當此時獜佐兵自淸州進逼畿縣朴弼夢」

弼顯起湖南李思晟從關西假裝胡兵刻日犯 闕卒皆敗誅然非公克平嶺亂 國家事其殆矣公爲」

人沉厚恂默神明內蘊常好觀山川圖記悉知關防險易虛實之形故其治民用兵皆有法度中機宜初出之官弛逋穀賑貧窮免吏負錢十五萬南人大悅賊之始起謀乘虛襲公公閉營示整假或言刺客且至公亦不爲動人心賴安焉初安陰旣陷縣監吳遂郁以罪當死巡撫使吳命恒匿之軍中乞免不聽按之」

益急陜川守李廷弼棄郡走而鼎佐出獄公執廷弼至大丘請罪于 朝而公卒正言權爀言公無病」

暴死請覈其狀 上命本道按之觀察使朴文秀緩其獄事遂己人皆痛之公旣沒之十三年嶺之民士」

爲公立祠於營治之城南龜山下名以愍忠明年因 朝命毁新立諸祠院幷廢公祠旣而諸議復卽」

其地築壇刻石以記公之績而寓邦人之思乃來求文余以公之功存 國家而身旣不幸沒不廟食其」

理有可悲者遂序而銘之銘曰」

涒灘之難嶺盜兩猘首尾一身內連外綴不恇于則觀其敝爲國督奸時維忠烈惟此忠烈文武之揭」

機神明鑑動無遺畫江關斷險勾卒連柵居昌虜巢其衆七萬旣翦陜援勢折乃頓牛頭宵覆賊遂死咋」

盖此姦萠非一日積士民詿誤嶺陬「又甚今茲之役逆順迺審公惠在人於嶺尤偏功施甫卒公遽不還」事有可疑仇者不得邦人恫慕日遠靡極何以醻之愍忠有祠歲事時修以揭以安閼于 朝今去廟而」

壇其壇三成上有崇碑螭首龜趺文以詩之琴水悠悠南民之思公去無歸其存者長匪我惟私 邦家」

之光」

嘉義大夫司憲府大司憲兼同知 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李宜哲撰

從子崇政大夫行吏曹判書兼知 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 事世孫右賓客景源書」幷篆

崇禎紀元後三庚子十一月 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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