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29. 양반들, ‘주자’ 신격화로 기득권 강화‘
주자 신봉’ 송시열 등 전체주의 세력, 사대주의를 개혁파 숙청 수단 삼아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시사저널 승인 2015.03.19(목) 18:24|1326호
한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지를 살필 수 있는 잣대 중 하나는 사상의 자유다. 사상의 자유란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을 허용하고, 또 그렇게 말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뜻이다.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이유는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는 중요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조선이 후기 사회로 접어들던 효종 4년(1653년) 윤7월, 지금의 충남 논산에 있던 황산서원(현 죽림서원)에서 사상의 자유를 둘러싸고 송시열과 윤선거를 중심으로 중요한 회의가 열렸다. 송시열의 문집인 <송자대전> ‘연보’의 숭정(崇禎) 26년(1653년) 윤7월21일조에 이 회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다.
황산서원에서 ‘전체주의’와 ‘다원주의’ 충돌
숭정이란, 중국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연호인데, 명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명을 숭상했던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계속 사용했던 연호다. 당시 조선에서 사상의 자유를 억압했던 중심세력은 이미 망한 명나라의 연호를 고집했던 극도의 친명 사대주의자들이었다. ‘연보’는 황산서원 회합에 대해 “황산서원에서 유시남·윤선거와 모였다”라고 쓰고 있다. 유시남의 ‘시남(市南)’은 유계의 호다. 그런데 윤선거 역시 ‘미촌(美村)’ 또는 ‘노서(蘆絮)’라는 호가 있었다. 그럼에도 유독 유계에게만 호를 쓰고 윤선거는 그냥 이름을 쓴 것은, 윤선거에 대해 송시열이 갖고 있는 비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었다.
<송자대전>의 ‘연보’는 “(선생(송시열)이 이날 밤에 재실(齋室)에서 자게 되었는데, (윤)선거와 윤휴(尹)의 일을 논했다. 대개 선생이 비록 윤휴를 이단이라고 배척했지만, 그래도 (윤휴를) 바로잡으려고 해서 갑자기 끊지는 않았고, 또 선거가 윤휴의 해독에 가장 깊게 빠졌기 때문에 먼저 선거를 바로잡고 나서 윤휴에게 미치려고 하여 항시 엄한 경계와 책망을 가해왔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송시열과 윤선거가 부딪친 이유는 윤휴 문제 때문이었다. 윤휴는 남인 계열이었다. 서인과 동인으로 나뉘어 당파 싸움을 벌이던 당시, 동인들 중 서인에 대해 강경한 입장이었던 부류는 북인, 온건한 입장이었던 부류는 남인으로 다시 나뉘었다. 즉 윤휴는 서인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입장이었던 셈이다. 당시만 해도 서인과 남인은 서로 적대적이 아니었다.
윤휴는 병자호란 이후, 치욕을 씻을 때까지 벼슬길에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24세 때(1642년) <홍범설(洪範說)>을 짓고, 26세 때 <주례설(周禮說)>을 지었는데, 그때마다 많은 찬탄을 받았다. 윤휴는 27세 때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인 여주로 돌아가는데, 윤휴의 ‘연보’에 따르면, 이때 송시열이 찾아와 “지금 멀리 이별하게 되었기에 섭섭한 심정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처럼 당초에는 두 사람이 서로 존중하던 사이였다. 그런데 그해 윤휴가 <중용설(中庸說)>을 지으면서 송시열과 사이가 벌어졌다. <송자대전> ‘연보’에 따르면, 송시열이 46세 때인 효종 4년(1653년) 종질(從姪) 송기후의 집에 갔다가 윤휴가 지은 <중용신주(中庸新註)>가 있는 것을 보고 땅에 던지면서, “윤휴가 어떤 놈이기에 감히 이런 짓을 했으며, 너는 또 어찌 감히 이런 책을 가지고 있느냐?”고 크게 책망했다고 전한다.
송시열이 윤휴의 <중용신주>(<중용>에 주석을 붙인 책)에 대해 크게 화낸 이유는, 송시열 자신이 그토록 떠받들었던 주자(남송 시대 학자로 주자학의 집대성자), 곧 주희(주자의 본명)의 <중용>에 대한 해석과 윤휴의 해석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윤휴의 ‘행장’에 따르면, 당시 송기후가 송시열에게 윤휴의 학설을 옹호하자 송시열이 “이 책은 주자의 논의에 어긋나는 것으로서 후학을 그르치는 책인데 무엇 때문에 읽는가”라고 비판했다고 전한다. 주자학의 이단(異端)이라는 주장이었다. 황산서원에서 송시열은 윤선거에게 “하늘이 공자에 이어 주자를 낳은 것은 진실로 만세의 도통(道統)을 위한 것이다. 주자 이후에는 드러나지 않은 이치가 하나도 없고 명백해지지 않은 글이 하나도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 견해를 내세워 방자하게 억설(臆說·억지로 하는 설)을 하는 것이다”며 윤휴를 격렬하게 비판했다.
송시열의 비판에 윤선거는 “의리는 천하의 공물(公物)인데 지금 윤휴에게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은 무슨 일인가”라고 반박하는데, 이는 중요한 사상적 배경을 가진 반박이었다. 의리는 천하사람 모두가 공유할 수 있고, 또 공유해야 하는 천하의 공물이지 어찌 주희 한 사람의 독점물이냐는 반박이었던 것이다. 이는 단순한 항변이 아니라, 오로지 주희만을 ‘절대 선’으로 격상시켜 나라 전체를 주희의 사상으로 뒤덮으려는 ‘전체주의 세력’과 주희를 ‘상대 선’으로 여겨서 그와 달리 해석하는 것을 허용하려는 ‘다원주의 세력’의 충돌이었다. 윤선거가 “윤휴도 학문이 고명하기 때문에 주희와 다른 해석도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반박하자, 송시열은 “윤휴 같은 참적(僭賊·참람한 역적)을 고명하다고 한다면, 왕망·동탁·조조·유유도 모두 고명하기 때문인가? 윤휴는 진실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서 무릇 혈기 있는 자라면 누구나 마땅히 그 죄를 성토해야 한다”면서 “춘추의 법이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를 다스릴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당여(黨與·추종자)를 다스리는 법이니, 왕자(王者)가 나타나면 공(윤선거)이 마땅히 윤휴보다 먼저 법을 받게 될 것이다”(<송자대전> ‘연보1’)라고 비판했다. 단지 주희와 다른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로 ‘주륙을 당할 것’이라는 지경이니, 이런 상황에서 자신과 다른 사상이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송시열과 윤휴의 충돌, 곧 송시열로 대표되는 전체주의 사상과 윤휴·윤선거로 대표되는 다원주의 사상의 충돌은 단순한 학문 논쟁이 아니라 조선 사회를 어디로 이끌고 가야 하는가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임진왜란(1592년)에 이어 서인들이 일으킨 ‘인조반정’(1623년,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왕에 세운 사건), 그리고 사실상 인조반정이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은 당시 조선 지배층이 사회를 이끌 능력이 이미 파탄 났음을 말해주는 일련의 국난들이었다. 임란 때 백성들이 일본군에 대거 가담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이상 신분제 유지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극단적인 사례였다. 이는 곧 양반과 상민이란 신분적 구분이 아니라 능력에 따라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회 저변의 요구이기도 했다.
서애 류성룡이 임란 때 상민과 천인들도 공을 세우면 양반이 될 수 있게 입법했던 면천법(免賤法)으로 임란을 극복했듯이, 신분제의 해체 내지 완화는 조선 사회가 반드시 걸어야 할 회생의 길이었다. 그러나 이미 망한 나라의 숭정이란 연호를 고수하는 사대주의 세력은 이런 시대적 요구와는 거꾸로 양반 사대부 중심의 신분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산서원 논쟁은 사회 변화의 요구를 수용하려는 세력과 이를 과거로 되돌리려는 세력의 충돌이기도 했다. 황산서원 논쟁은 결론 없이 끝났고, 윤휴는 ‘제2차 예송논쟁’(효종의 비가 죽자 복상을 몇 년으로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남인과 서인이 대립한 사건) 직후인 숙종 1년(1675년), 북벌(北伐)을 명분으로 조정에 나왔다.
조정에 나온 윤휴는 남인 가운데서도 개혁 정파인 ‘청남(淸南)’의 영수로서 맹활약했다. 그간 군역에서 면제되었던 양반들에게도 군포(軍布)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 실시를 주장하고, 일반 백성들에게도 무과 응시 자격을 주는 만인과(萬人科) 등을 실시해 신분제를 완화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개혁을 시도하던 윤휴는 숙종 6년(1680년)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아무 죄도 없이 사형당하고 말았다. <송자대전>의 ‘어록(語錄)’에 따르면, 윤휴가 사형당한 후 송시열이 제자 권상하에게 “윤휴의 죄 중에 무엇이 가장 큰가”라고 물었다고 나온다. 권상하가 “모역죄(謀逆罪·반역을 꾀한 죄)가 가장 큽니다”라고 답하자 “그대의 궁리(窮理·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함) 공부가 깊지 못하구나”라고 힐책했다. 권상하가 “그렇다면 주자를 모욕한 것이 가장 큰 죄입니까”라고 수정하자, 송시열이 “그렇다. 사람치고 성현을 모욕한다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는가”라며, 그때서야 권상하를 칭찬했다고 나온다.
지금도 시계 과거로 돌리려는 세력 있어
윤휴의 사형 이유를 ‘주자에 대한 모욕’으로 단정 지은 후, 주희는 조선에서 신이 되었다. 주체사상을 유일 사상으로 떠받드는 북한에서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서 김일성을 신으로 격상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주희가 조선에서 신격화된 것이다. 모든 사상은 시대의 반영이므로 1200년에 이미 사망한 주희가 만든 주자학이 17세기의 조선에 맞을 리 없었다. 명나라에서 왕수인(1472~1529년)이 주자학을 대체시키는 양명학(陽明學)을 주창했던 사정이 이를 말해준다.
주자학자들은 양반들의 기득권을 독점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주희를 신으로 떠받들었다. 지금 우리 사회도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크게 위축되었던 과거 1970~80년대나, 심지어 이념 논쟁이 극심했던 1950년대로 되돌리려는 세력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우려스러운 상황이다. 극단주의자 김기종의 테러 사건이 일어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사드 배치’ ‘테러방지법 제정’ 등의 주장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것은 지금의 한국 사회 역시 조선시대 후기처럼 기로에 놓여 있음을 말해준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